14년간의 인터뷰.
<더블유 코리아>는 창간 이래 서울과 세계 곳곳에서 쟁쟁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14년의 유산이 쌓였고, 이따금 들춰보는 인터뷰 아카이브는 고이 묻어두긴 아까운 언어로 가득하다. 인터뷰의 한 대목이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지만, 여기 다시 꺼내놓은 그들의 말에서 통찰과 재치를, 긍지와 아픔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엿본다.
틸다 스윈턴( Tilda Swinton) 2013년 8월호
“어렸을 때 행복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기에 이후 내 삶은 점점 더 행복하게 변해갔다. 행복하지 않은 유년기를 갖는 것을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어떠한 순간에 행복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도록 결정할 수 있고, 이것은 당신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결정을 바꿔 행복할 수도 있다. 내가 인생에서 절대 줄일 수 없을 만큼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우정, 자연, 그리고 예술이다. 그리고 이 우정이라는 요소에는 가족 간의 관계도 포함된다. 가족 관계는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족에서 중요시 여기는 점은 우정이라는 요소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
<설국열차> 개봉을 앞두고 틸다는 <더블유 코리아>에 ‘우리 영화가 열차에 대한 이야기니 봉준호와 내가 에든버러에서 함께 기차를 타고 인버네스까지 오면서 인터뷰하면 좋겠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사진도 찍자’라고 먼저 적극적인 제안을 했다. 이 설레는 계획은 틸다와 봉준호의 스케줄이 아슬아슬하게 어긋나는 바람에 불발됐지만, 역시 그녀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멋졌다.
정경화 정명화 2014년 7월호
“언니와는 나란히 현악을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녔고 줄리어드에서도 함께 공부했다. 예전에는 목소리까지 비슷해서 전화로는 다들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언니는 성격이 첼로에 맞게 부드럽고, 난 영락없이 바이올린이다. 고음을 다루다 보니 신경질적이고 까다롭다. “언니, 이건 어떻게 해!” 빽 소리를 지르면 “응~” 하면서 차근차근 정리해주는 식이다. 오거나이즈 같은 건 언니가 참 기가 막히게 한다. 예전에는 정 트리오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거의 맡아서 진행을 했다.” – 정경화
“음악을 하는 동안 형제끼리 시기는 없었는지 묻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시기에 빠지면 남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다. 같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도 늘 해준다. 동생과 나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짚어줄 수 있는 사이다.” – 정명화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정확히 찌르듯 답하는 정경화, 그보다 몇 옥타브는 낮은 부드러운 음악을 들려주듯 이야기하는 정명화의 목소리는 악기 없는 이중주를 하는 듯했다. 언니가 시작한 문장을 동생이 끝맺거나 동생의 이야기를 언니가 부연하는 모습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탕웨이(Tang Wei) 2014년 11월호
“일은 삶의 일부일 뿐이다. 물론 상당히 중요한 일부이긴 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연기를 통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알게 됐다. 더 나아가 내 주변 사람, 그리고 삶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에디터가 ‘한국 관객에게 탕웨이는 좀 특별하다’고 말하자 그는 ‘글쎄, 내가 한국 감독과 결혼해서 그런가?’라고 되물었지만, 에피소드 하나에서도 인간적이며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여자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긴 어렵다.
이국주 2014년 12월호
“내 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엉덩이, 턱, 팔뚝도 싫어한다. 촬영하는 내내 속살을 보이는 게 신경 쓰인다. 하지만 당당하게 굴었던 건, 내가 그걸 통해 재미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고 웃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거다. 사람들이 웃음거리로만 삼는 게 아니라 멋지게 봐준다는 게 느껴지니 더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졌다. 처음에는 화보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예뻐요”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분위기를 위해 마음에 없는 말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기계적으로 잘한다 잘한다 하는 게 아니라, 포즈나 표정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내가 거기에 역할을 하고 있는 건데 마음에 안 들면 티가 나겠구나’ 느껴지고 나서는 더 편하고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많은 개그우먼이 ‘웃겨야 하는 사람’과 ‘여자’라는 속성이 충돌하는 비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페셔널하게 웃기고 사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이국주의 마지막 말에서 사려 깊은 자의 직업 정신이 드러난다.
이불 2015년 9월호
“감상자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어떻게 보면 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복잡한 레퍼런스나 메시지는 오히려 안으로 숨기려고 한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이고 어쨌든 나는 시각적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각각의 감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의 감각은 또 다른 감각과 함께 작동하기 마련이다. 내 작품을 겪는 사람들이 표피의 시각적 요소를 관통해 결국에는 이면의 어떤 지점까지 닿기를 바란다.
아이디어와 콘셉트의 전쟁터 같은 현대미술에서 작품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종종 소홀한 대접을 받는다. 당시 이불은 더블 미러를 사용해 무한한 반사를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작업의 이미지는 기계 같은 육중함을 만들어내면서도 신비하게 아름다웠다.
전도연 2015년 11월호
“지금은 익숙해졌고 그냥 편안해졌다. 전에는 뭔가 불편하고, ‘칸의 여왕’을 극복해야 할 거 같았다. 이제는 그 안에서 편안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거 같다. 아침에 여기 오면서 오랜만에 윤여정 선생님과 통화했다. ‘너는 그러니까, 그 ‘칸의 여왕’을 빨리 벗어나야 돼’ 하시더라. ‘저도 벗어나고 싶은데 그럼 아카데미에서 상이라도 받아야 돼요?’ 하니까 ‘너 영어 못하는 거 다 안다, 어디 홍콩쯤으루 해서 아시아의 여왕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하셔서 아침부터 크게 웃었다. 예전에는 극복해야 하고 벗어나야 한다고 강박 같은 걸 가졌다면 지금은 괜찮다. 칸에도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잊혀질 만하니까 또 심사위원으로 초대를 받아 ‘칸이 사랑하는 여자’ 이렇게 다시 회자되더라.”
윤여정의 깨알 같은 개그에 에디터 역시 웃음이 터지다가도, 한국 영화계가 전도연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 괜히 심각해진다.
손열음 2015년 11월호
“재즈는 클래식 음악이랑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관계다. 시대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지만 스트라빈스키, 코플랜드, 바버 이런 사람들은 재즈 요소가 없었다면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라벨의 후기 작품을 봐도 베이스가 정말 재지하다. 재즈를 배우면 배울수록 즉흥성, 화성, 구성 같은 것들이 1700년대 초반 음악과 닮아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에 아주 정통한 즉흥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즈도 잘할 것이다.”
1910~1920년대 클래식 음악에 큰 관심이 있다는 그는 리듬감이 뛰어난 작곡가, 거슈윈이 등장하면서 이전의 클래식 음악이 일단락됐다고 봤다. 그 과정에서 나온 음악인 재즈는 클래식과 서로 배척되는 관계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설명이 흥미롭다.
양혜규 2015년 3월호
“작가는 아무리 위대해도 개인이다. 특히 그 개인은 구조 안에서 초기에는 전형적인 모순을 경험한다. 활동이 많을수록 가난해지는 상태가 되는 거다. 전시는 많이 들어오고 전시를 위한 장소는 있지만, 전시 끝난 작업을 둘 장소나 내 몸 누일 공간도 없을 때가 있다. 당장 다음 달 방세 낼 돈이 없는데 몇백만원 몇천만원짜리 예산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하고 초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중략) 외국도 서른다섯 이후에는 지원 프로그램이 다 끊기기 때문에, 그때부터 마흔까지가 제일 힘든 것 같다. 그전에 속된 말로 ‘쇼부를 봐야’ 한다 (웃음).”
독일 유학 이후 20년 동안 베를린을 비롯한 여러 도시를 오가며 지낸 아티스트는 1 년 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리움에서 열린 개인전을 준비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전문가가 아직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자신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은 다 ‘불평분자’이며, 앞으로 불평은 계속할 거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씨엘 2016년 1월호
“나는 평생 악동이고 싶다.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보수적인 사람이고 나름의 룰이 강한 면도 있지만, 나에게 제한이나 한계가 없었으면 좋겠다. 늘 어린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악동이라 한 거다. 앨범이 나오면 어떤 스토리 속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테지만, 솔로 첫 곡인 ’나쁜 기집애’나 이번 ‘Hello, Bitches’는 모두 내 아이덴티티를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 곡이다.”
투어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멈춤 없이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 답답해진다는 에너자이저. 이 화보 인터뷰의 전문은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씨엘은 어디든지 간다.’
송혜교 2016년 6월호
“사실은 일찍 철들고 싶지 않다. 적어도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서로 나잇값 못한다는 얘기를 하고 들으면서 천진난만한 부분을 지켜가고 싶다. 직업이 배우니까. 50이 되고 60이 되어도 그런 순수한 면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 중에서도 소녀 같으신 분들 보면 아름다우시다. 언젠가 나도 그런 모습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태양의 후예> 종영 직후 만난 송혜교는 더 이상 드라마 시청률에 따라 들뜨거나 허전해 하는 연차의 배우가 아니었다. 인기를 더 얻고 싶다거나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목표가 없는 대신 책임감이 생겼다고.
소녀시대 2017년 8월호
“데뷔 후 지금까지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낄 만한 부분은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중 누군가는 아침 6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나머지 멤버들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또 누군가는 똑같이 새벽에 일을 마친 상황에서 차를 타고 다른 멤버들이 차례로 내린 후에야 자기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건 그룹 활동을 하면 당연히 겪어야 할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생활을 10년 동안 해온 우리에겐 당연하지만은 않은 인내였다. 물론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도 참고 견딜 줄 알게 됐다.” – 수영
“바른 생활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인생이 자칫 잘못 흘러갈 것 같아서였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바빴다. 어제 한 일조차 다 기억이 나지 않는 생활을 하다 보니, ‘와 이거 잘못하다간 시간에 휩쓸려가기만 하겠구나’ 싶었다. 청소년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선택한 삶인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의지로 시간을 잘 보내야 10년 뒤가 온전할 것 같았다.” – 서현
“소녀시대라는 점이 자존감이 되고 힘을 주는 것 같다. 우리한테는 멤버들밖에 없다, 라는 얘기를 간간이 할 때가 있는데 그만큼 서로 힘이 많이 되어주는 거 같다. 그리고 이제 멤버들이 아니라도 팀 자체가 그런 역할을 해준다. 혼자 어딜 가서 뭘 해도 소녀시대로서 해온 일들을 가진 상태로 나가게 되니까.” – 윤아
소녀시대 데뷔 10주년을 맞아 멤버들이 ‘완전체’로 출동하는 <더블유> 커버 촬영 인터뷰가 있었다. 멤버 8명과 개별적으로 진행한 이 인터뷰는 인터넷상에서 많이 회자되며 관심을 끌었고, 소녀시대 전 멤버가 함께한 마지막 작품으로 남았다.
이효리 2017년 9월호
“자존감은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구나’를 느끼는 순간이 쌓이면 점점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동물 보호 일을 할 때,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봉사와 기부를 많이 했다. ‘나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해 희생할 수 있구나’ 하고 처음 느꼈다. 제주도에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요가 수련하고 채식을 고수하는 생활도 마찬가지 경험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뭘 꾸준히 못 하고 노력을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옳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를 위해 단호해질 수 있다는 걸 안 거다. ‘난 바람둥이 나쁜 여자인가?’ 싶었지만 남편을 만나면서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고. 뭐든, 꾸준히 못 한 건 내 탓이 아니라 아직 못 만났기 때문이었다. 만나지 못했을 뿐, 자책할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에 앨범과 <효리네 민박>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효리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이효리가 하는 음악의 성숙도를 떠나, 90년대에 데뷔한 그가 요즘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연예인다운 불세출의 인물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김연아 2018년 2월호
“선수 시절에나 은퇴 직후에는 내 경기 영상을 많이 봤다. 그때의 기분을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잘 안 보게 되더라. 지금 내가 얻은 명예나 성취는 물론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거긴 하지만 과거에 너무 기대서 계속 그걸 추억하는 건 내 성격상 안 맞는다. 그 시절은 소중하지만 그냥 지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무덤덤함’은 김연아의 중요한 특징이다. 경기하는 순간만큼은 지구상에서 가장 예민할 동물일 수도 있는 선수가 매번 큰 산을 넘는 데에는 실력뿐 아니라 성격상 특성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은퇴 후 현역 시절에 연연하며 상실감을 느끼는 타입과도 달랐다.
김태리 2018년 10월호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게 자신을 오래가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래, 지금 일 끝나고 나서 생각해볼까?’ 이렇게 숨 쉴 틈을 만들어주는 거죠. 정답은 하나가 아니니까요. 제가 연기를 시작한 건 연기가 너무 재밌고 즐거워서였어요. 이 정도로 행복하다면 평생 일이 되어도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너무 힘들고 도망치고 싶어요. 연기를 처음 접하면서 느낀 즐거움이 많이 사라졌어요. 단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는 끌고 갈 수 없는 상태가 됐으니, 또 다른 구체적인 단어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김태리라는 화려한 이름 앞에 우리가 자꾸 잊기 쉬운 건 그녀가 연기 생활의 출발선을 끊은 지 얼마 안 됐다는 사실이다. 작은 김태리에게 왠지 에디터의 넓은 어깨를 내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작아도 단단한 그녀는 혼자서 꿋꿋이 걸어갈 것만 같다.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 2018년 12월호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유명세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고. 나는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서 심플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로서의 음악은 나에게 너무 중요하다. 남자들은 야망을 갖기 더 쉬운 구조이지만, 여성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일은 여성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좀 갇혀 살지 않았나?(웃음) 딸에게도 언제나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직업의 중요성에 대해 늘 강조한다.”
지난해 11월 공연차 내한한 카를라 브루니는 점성술사처럼 관객을 홀리다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관중을 웃게 만들고, 끝내 노래로 모두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음악 작업을 하고, 아침이면 잠도 덜 깬 사르코지에게 노래를 들려준다고.
- 피처 에디터
-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