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ro Guide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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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과거에서 취한 것들이 역동적인 현재를 만들고 있다. 레트로와 뉴트로, 추억과 추억팔이가 뒤엉킨 유쾌하고 혼란하고 아쉽기도 한 2021년을 진단한다. 

불과 몇 년 전 우리는 ‘뉴트로’를 말했다. 지금의 포스터나 간판을 레트로풍으로 패러디하는 놀이가 SNS에 챌린지처럼 번지고, 청청 패션과 어글리 슈즈가 흔했으며, 비디오를 보고 자라지 않은 이들이 VHS 효과를 구현해 영상을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뉴트로란 재현보다 해석에 방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겪지 못한 과거의 것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고 취하는 행위를 해석이라고 말하긴 거창하지만, 과거, 그리고 그와 무관한 세대가 만나 일으키는 생경한 화학 작용을 볼 때면 ‘뉴’를 느낄 순 있었다. 최근 다시 어른거리는 복고 경향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유튜브 콘텐츠와 예능이다. 연관 단어로는 ‘추팔(추억팔이)’이 있겠다. 사실 과거를 추억하는 건 시대를 불문한 인간의 오랜 습성일 텐데, 이제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그 과거와 지금의 텀이 갈수록 짧아진다는 것이다.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라는 부제를 달고 2014년 국내 출간된 <레트로 마니아>는 분노와 지성으로 무장한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팝 음악의 복고 경향에 대해 촘촘하게 분석한 책이다. 2000년대의 팝뿐 아니라 어느 주어와 문화를 갖다 대도 조응할 법한 꽤 많은  서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사회는 인류사에 없었다.’ 레트로의 미덕은 과거에 빛을 보지 못한 좋은 것을 발굴해 재조명하거나 지금의 결핍을 충족하는 데 있다. 그 주체는 세대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능하다. 디지털 패러다임이 세상을 지배하면 물질성을 그리워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양’이 기치인 사회가 되면 ‘질’에 대한 욕구가 솟는 것도 ‘지금 희소한 무엇’과 관련이 있다. 결핍을 채우려는 심리에서 그저 그랬던 과거가 윤색되기도 한다. 미덕이나 결핍 운운할 것 없이, 추억 거리와 향수라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는 그 ‘누군가’가 세대에 따른 문제가 된다. 추억할 게 있으려면 그만큼 산 날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전제 아래 2021년의 레트로 내지 뉴트로를 살펴보면 그 양상이전보다 복잡하다. 90년대생에게 ‘캬 추억 돋는다’고 할 만한 과거가 쌓였다.더불어 갈수록 추억하는 과거의 시점이 가까워진 건, 일일이 소화할 수 없을정도로 데이터 과다의 시절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예전부터 추억할 건 이미 실컷 했던80년대생도 관여된다. 80년대 중반생에게 띠동갑으로 윗세대는 나와다른 문화를 향유하며 자란 다른 세상 사람이지만, 아래로 그만큼 나이차가 나는 세대와는 아이돌과 인터넷 문화 등을 경험한 공통분모가 있다.결정적으로 유튜브와 인터넷에는 오늘도 과거가 되어 전보다 무수한 자료가쌓인다. ‘N년 전’ 같은 타임라인도, 세대차도 상관없이 만인이 어우러지는그곳을 탐험하는 동안 누군가의 추억 거리는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발견이되고, 댓글로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지점을 얘기하는 일도생긴다. 레트로와 뉴트로, 추억과 추억팔이가 뒤엉키는 가운데 유쾌한코드와 안일함이 뒤섞인다. 피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모든 현상이역동적인 것도 사실이다. 이쯤 해서 지금 레트로와 관련된 지형도를 한눈에보고, 그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며, 아직 추억 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세대의말을 들어보는 건 ‘세대 공감’이라는 말로 퉁칠 수 없는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더듬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이 지나면 금세 과거의 데이터가 쌓이는세상에서 현시점의 레트로를 정리해봤다.

2021 RETRO MAP
레트로는 힘이 세다. ‘추억팔이’란 손가락질에도 레트로는 N번째 전성기를 맞고 있다. 미디어, 음악, 식음료, IT 분야에서 다시 등장한 레트로 코드가 쌓여 그려진 새로운 지형도가 여기 있다. 
MEDIA 과거 미디어는 신선한 소재를 찾기 위해 기시감과 악전고투를 치렀다면, 이제는 현재보다 잘 팔리는 과거에 주목한다. 이전까지의 레트로 콘텐츠가 1980~1990년대를 정조준해 만들어졌다면 최근 흐름은 2000년대에서 소재를 길어오는 것이다. 2000년대는 지금의 주요 콘텐츠 소비층인 MZ세대가 ‘직접 경험’한 시절이다. 미디어계는 MZ세대가 겪어보지 못한 먼 과거의 호시절을 불러오는 대신 2000년대를 맹렬히 재활용 중이다. ‘추억팔이’라는 익숙한 화법에서 한발 나가 MZ세대가 반길 만한 양념을 한 스푼 더하면서.

음악 예능은 추억을 싣고
MBC <놀면 뭐하니?> MSG워너비 
<놀면 뭐하니?>는 이제 음원 차트와 함께 가는 방송이다. 하나의 권력이 된 듯하다.

MZ의 케이팝 동창회
유튜브 <문명특급> ‘컴눈명’ 
6월 애프터스쿨, 나인뮤지스, 2PM 등이 <문명특급>의 ‘컴눈명’ 콘서트에 참여해 펼친 무대 영상이 현재 유튜브에서 평균 조회수 400만을 달리는 중. 2세대 아이돌이 활발히 활동하던 때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은 댓글로 몰려들어 ‘케이팝 동창회’를 한판 크게 벌였다. 현재 조명할 수많은 아이돌보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이미 인기를 누렸던 이들을 굳이 소환한, 안일한 기획이라는 의견도 있다. 

관뚜껑 열고 돌아온 공포 예능 
MBC <심야괴담회> 
상금 444444원을 걸고 가장 공포스러운 괴담 사연을 선정하는 예능. KBS <전설의 고향>, SBS <토요미스테리 극장>, MBC <이야기 속으로> 등 1990년대를 마지막으로 맥이 끊긴 지상파 공포 예능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공포 
예능 : MBC <환상여행>(1996), <이야기 속으로>(1999), KBS <서세원의 공포체험 돌아보지마>(1997), SBS <토요미스테리 극장>(1997), 드라마 : MBC <M>(1994), <거미>(1995), SBS <어느날 갑자기>(1998), <고스트>(1999), <RNA>(2000) 

응답하라 2000 
<피식대학> ‘05학번이즈백’ 
가르텐비어, 조흥은행, UCC, 본더치 등 2000년대 유행한 문화를 완벽히 ‘고증’했다 말하면 지나칠까? 05학번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는 ‘화석’ 선배들의 이야기를 담은 콩트 코미디. 1990년대 초 버라이어티 예능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춘 한국 콩트 코미디가 유튜브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학원 공포물의 원조 
영화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 모교> 
12년 만에 성사된 <여고괴담> 리바이벌. 2005년 <여고괴담 4 – 목소리>에서 음악 선생님 희연으로 등장했던 배우 김서형이 교감 은희를 연기했다. 시리즈 영화가 좀처럼 힘을 못 펴는 충무로에서 1998년 첫 개봉한 이 영화는 2000년대 학원 공포물의 전성기를 활짝 여는 불씨였다. 

<여고괴담>이 쏘아올린 학원 공포물 계보 : <분신사바>(2004) → <고死: 피의 중간고사>(2008) → <소녀괴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 → <폐교>, <속닥속닥>(2018) 

FOOD & BEVERAGE 식음료 시장도 발 빠르게 추억에 응답하고 있다. 특히 여름철 성수기를 앞둔 주류 업계를 중심으로 레트로 마케팅이 과열되고 있는데, 재작년 하이트진로가 1924년 출시한 소주 ‘진로’를 복각해 ‘진로이즈백’을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는 복각은 물론 ‘협업’을 한 스푼 더한 새로운 스토리텔링 전략이 펼쳐지고 있다. 이제 옛 로고와 서체를 그대로 살린 패키지를 출시해 제품 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은 기본이 됐다. 한발 나가, 옛 먹거리 특유의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움직임은 ‘할매니얼’(밀레니얼 세대와 할매 입맛을 합친 말)이라는 신조어의 탄생을 이끌어냈다. 

‘보는 맛’ 더하기 
한정판 레트로 패키지 출시 
레쓰비, 삼양라면 등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의 초창기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한 한정판 레트로 패키지가 잇따라 출시되는 중. 

레트로 패키지 다시 보기 : 서울우유의 트레이드 마크인 우유 방울 무늬를 적용한 ‘홈타임 아이스크림’(2020), 예스러운 타이포그래피와 ‘셑-트’와 같은 과거 맞춤법을 사용한 ‘맥심 커피믹스 레트로 에디션’(2020), 1979년 출시 당시의 디자인을 적용해 봉지 타입으로 제작한 ‘고소미 1979’(2020), 1960년대 추억의 만화 <뽀빠이>를 활용한 SPC삼립의 ‘뽀빠이’ 베이커리(2020), 1995년 패키지 디자인을 그대로 되살린 ‘맥콜’ 한정판 에디션(2019) 등 

수제맥주의 레트로 전쟁 
장수 브랜드와 맥주의 협업 
‘아맛나’ 아이스크림과 수제맥주 브랜드 ‘브롱스’가 만난 ‘아맛나 맥주’, 75년 역사의 이너웨어 기업 BYC와 오비맥주가 협업한 ‘백양BYC 비엔나 라거’ 등. 지금 맥주 업계는 헤리티지를 가진 장수 브랜드와 협업하며 레트로 마케팅을 맹렬히 펼치는 중. 

‘할매’에 빠진 MZ 
전통 먹거리를 재해석한 신제품 출시 
별안간 ‘할매니얼’이란 신조어가 등장했고, 이 틈새를 노린 기업들은 중장년층 입맛이라 여겨졌던 검은깨, 쑥, 인절미 등을 활용한 제품을 출시하는 중. 매대에서 밀려났던 쫀드기, 달고나, 뻥튀기 등은 올해 상반기 마켓컬리에서 판매량이 184% 증가했고 ‘비비빅 더 프라임 쑥’, ‘삼육두유콘’, ‘쌍쌍바 미숫가루맛’ 등 전통 먹거리를 재해석한 아이스크림 신제품이 쏟아졌다. 

MUSIC 올해 상반기 음악계는 ‘역주행’과 ‘리메이크’로 갈무리된다. <놀면 뭐하니?> MSG 워너비 편의 방영, 8월 재개장 소식을 알린 추억의 싸이월드까지 가세하며 2000년대 초중반을 관통한 미드 템포 R&B가 차트에 재등장했다. 보컬과 감성으로 승부 보던 음악들은 클릭 몇 번으로 재소환됐고, 그렇게 콘크리트 음원 차트에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탈시간적 뷔페가 한 상 차려졌다. 리메이크 앨범도 레트로 흐름에 탄력을 받으며 음악 시장을 키워가는 중이다. 아이돌을 비롯해 여러 장르의 가수가 전부터 리메이크 음원을 내놨지만 최근엔 레트로 열풍에 기대, 또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불황형 전략’의 하나로 돛을 더욱 높이 올리고 있다. 

2000년대 미드 템포 R&B의 귀환 
SG 워너비, 빅마마 컴백 
2001년 브라운 아이즈가 ‘벌써 일년’으로 열풍의 신호탄을 쏜 후 이어진 씨야, 가비엔제이, 먼데이 키즈, V.O.S 등 절절한 미드 템포 R&B의 시대를 다시 떠올리다. SG 워너비, 빅마마의 컴백 소식과 함께. 

알고 보면 유서 깊은 
<레트로 깃든 아이돌 팝>
일찍이 아이돌 팝 신에선 레트로 콘셉트의 음악, 의상, 뮤직비디오를 일종의 ‘패키지’처럼 선보여왔다. 올해도 그 익숙한 문법을 따른 앨범을 만날 수 있었다. 애초 복고를 정조준해 기획된 로켓펀치의 <링 링>은 물론, 비주얼 콘셉트에 레트로를 양념처럼 가미한 태연의 <Weekend>, 방탄소년단의 <Butter>까지. 

아이돌 팝 신에서 건져 올린 레트로 코드 레트로 3부작 원더걸스 ‘Tell Me’(2007), ‘Nobody’(2008), ‘So Hot’(2008) → 본드걸 패러디와 고고리듬 소녀시대 ‘훗’(2010) 허슬 춤, 다이아몬드 스텝과 디스코 티아라 ‘롤리폴리’(2011) → 1960년대 아메리칸 레트로의 재현 시크릿 ‘샤이보이’(2011) → 레트로풍 체크 패턴, 데님 룩과 1990년대 뉴 잭 스윙 샤이니 <1 of 1>(2016) → 유로 비트와 디스코, 블링블링 패션 선미 <Warning>(2018) → 1980년대 시티 팝 차용 브레이브걸스 <We Ride> 

재해석, 재조합의 맛 
리메이크 앨범의 발매 
과거부터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리메이크가 최근 더욱 다층화되는 추세. 레드벨벳 조이, 폴킴, 청하 등은 1990~2000년대 곡을 재편곡해 프로젝트 앨범을 발매했고 NS윤지, 마이티 마우스, 이석훈 등은 과거 자신의 히트곡을 요즘 입맛에 맞게 변주했다. 

싸이월드가 쏘아올린 공 
<싸이월드 BGM 2021 프로젝트> 
2000년대 ‘미니홈피 신드롬’을 일으켰던 싸이월드의 BGM 데이터를 분석해 역대 톱 100곡을 MZ세대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다시 부르는 프로젝트. 소유가 2004년 발매된 프리스타일의 3집 타이틀곡 ‘Y’를 리메이크하며 첫 삽을 떴고 데이브레이크, 에일리, 죠지 등이 바통을 이어받아 참여할 예정이다. 

IT 2000년대 초반 IT업계를 장악했던 토종 SNS 플랫폼 ‘싸이월드’, ‘버디버디’가 새로운 부활을 예고했다. ‘싸이월드Z’는 과거 3200만 이용자가 사이트에 업로드한 사진 180억 장, 동영상 1억5000만 개의 복구 작업을 마쳐 8월 이 추억의 타임캡슐을 봉인 해제할 예정이다. 게임 업계는 과거 PC방 열풍을 주도했던 클래식 게임을 재소환 중이다. 3040 유저들이 가장 재미있고 새롭게 게임을 대하던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이자, 화려한 그래픽 위주의 최신 게임에 익숙한 MZ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지난해 ‘바람의나라: 연’,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 등 2000년대를 풍미한 온라인 게임이 모바일로 새로이 구현돼 추억을 자극했다면 올해는 그 흥행을 이어받아 ‘리니지 클래식’,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 출시될 예정이다. 

메타버스로 옷 갈아입기 
8월 싸이월드 재오픈 예정 
과거 PC에서 2차원 그래픽으로 표현됐던 ‘미니룸’은 메타버스 기술을 통해 3D 공간으로 구현되고 당시 사이버 화폐였던 ‘도토리’는 암호화폐로 탈바꿈할 예정. 네이버Z의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가 십대 유저 중심이라면, 2021년 판 싸이월드는 2040 유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틈새를 노리는 중이다. 당초 3월 계획됐던 재개장이 5월, 7월, 8월로 연기되고 있어 어쩐지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추억의 인스턴트 메신저 
버디버디 
한때 PC 메신저 점유율 56%를 차지하며 국민 메신저로 통했던 버디버디가 올해 서비스 재개를 엿본다. 최근 트렌드에 발맞춰 음성 지원, 숏폼 콘텐츠 등이 접목될지는 지켜볼 일. 

인스턴트 메신저 서비스 계보 : MSN 메신저(1999) → 지니(1999) → 버디버디(2000) → 타키(2002) → 네이트온(2002) → 터치(2006) → 카카오톡(2010) → 마이피플(2010) → 네이버톡(2011) → 라인(2011) → 페이스북 메신저(2011) → 행아웃(2012) → 텔레그램(2014) 

게임의 시작점으로 
리니지, 디아블로 클래식 버전 출시 
2000년대 초중반 PC 게임의 출시 초기 모습을 복각한 클래식 버전으로 리부트. 6월 ‘리니지 클래식’은 사전 예약을 시작했고 ‘디아블로’의 리마스터 버전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 3D 구현돼 9월 출시된다. 1990년대생에게 추억의 리듬 게임이었던 ‘알투비트’도 하반기를 론칭 시기로 잡았다. 


왜 과거인가? 
레트로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서로 다른 축을 세우면 이야기할 것도 결론도 전혀 달라진다. 레트로 열풍의 소스가 되는 이국적인 과거를 활용한 비즈니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달라진 시공간에서 경험하는 가요를 둘러싼 두 가지 시선. 
레트로라는 가성비템

레트로 유행의 가장 큰 토양은 유튜브와 구글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플랫폼은 요즘 세상의 자료실이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무제한에 가까운 동영상 덕에 인간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20세기 자료들을 말도 안 될 정도로 쉽게 열람할 수 있다. 올해 한국 나이로 39세인 내 세대쯤 되면 지금 시대의 정보 열람이 얼마나 쉬운지 알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때는 체코어나 인도네시아어 같은 언어의 원어민 억양을 접하고 익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명 클래식 연주자의 고전 공연 영상이나 세계적인 밴드의 라이브 앨범 같은 건 전설 속에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검색만 하면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폴란드 공연 실황 같은 것도 유튜브로 볼 수 있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Past is the Foreign Country>로, ‘과거는 외국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말 그대로다. 레트로의 소스가 되는 과거는 ‘이국적 외국’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외국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구할 수 있다. 과거라는 이국적 정보는 어른에게 추억이 되고,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젊은이에게는 이국적인 즐길 거리가 된다. 온갖 분야에서 레트로가 조명받는 이유다.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에서의 레트로는 어떨까. 그 사회 문화적 의미 말고, 실제 비즈니스 면에서 말이다. 간단하다. 한마디로 ‘단가가 저렴한 레퍼런스’다. 여전히 자주 발매되는 90년대 캐주얼이 좋은 예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90년대 캐주얼의 몇 가지 요소인 핏과 큰 로고만 구현하면 물건을 팔 수 있다. 발상도 생산도 어려울 게 없다. 근 몇 년 동안의 하이테크 운동화와 비교하면 둘의 차이가 더 선명히 드러난다. 나이키나 아디다스는 새로운 운동화를 생산하기 위해 별도의 금형이나 신소재를 개발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대중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비용도 상당히 많이 들여야 했다. 그에 비해 국내 회사에서 라이선스권을 획득해 전개 중인 마리테 프랑소와 저버는 제품에 로고만 새로 박으면 됐다. 하이테크 운동화에 비하면 엄청나게 쉬운 게임이다. 레트로 요소가 단가 저렴한 레퍼런스로 쓰인 경우는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의 다른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F&B 비즈니스에 속할 다양한 식당과 카페도 레트로 요소를 많이 차용한다. 특히 디자이너들이 총괄한 식당에서 그런 요소가 많이 보인다. 성수동을 걷다 보면 20세기 후반 미국이나 일본 식당의 디자인 요소를 이용한 식당을 몇 개씩 찾아볼 수 있다. 

비즈니스의 참고 자료 관점으로 보면 결국 레트로 유행은 콘셉트계의 ‘가성비템’이다. 공급자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저렴하고 기대 효과가 높으니까. 따라 할 소스가 많으니 단가가 저렴하고, 알아볼 사람이 많으니 기대 효과가 높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복되면 재미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큰 고민이 없고 돈도 조금 쓴다면 그럴듯한 효과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박시한 실루엣의 티셔츠에 커다랗게 박힌 로고. 굵은 레터링으로 장식한 식당에서 먹는 그저 그런 버거의 맛. Z세대라면 몰라도 1970~1990년대 호황을 겪은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 지금 레트로 유행의 평평하고 얄팍한 헛헛함을.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레트로는 점점 더 유행할 것 같다. 유튜브에는 더 많은 20세기 동영상이 쌓일 것이고, 인쇄매체의 마지막 전성기이자 디지털 출판 대중화의 초창기인 90년대의 자료도 점점 많이 올라올 테니 말이다. 더 많은 그때 그 시절 소스는 더 많은 어른들의 추억을 불러낼 것이고, 그만큼 젊은이들의 환상도 더욱 부추길 것이다. 어른의 추억과 젊은이의 환상을 현금화하고 싶은 사업가들의 시도도 끊이지 않을 터다. 사람들은 늘 지금이 아닌 시대의 것을 좋아해왔다. 그러지 않고서야 몇천 년 전 유물이나 작품을 보관하고 좋아하고 값비싸게 사고파는 문화와 시장이 생겼을 리 없다. 여기서 일반적인 ‘빈티지 애호’와 지금 레트로 유행의 차이가 나온다. 빈티지 애호의 대상에는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그 시대의 최고, 혹은 그 시대의 일상이었으나 지금에는 구할 수 없는 고품질이 된 것(미드센추리 가구 같은 게 여기 속한다)들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심사를 받아 빈티지의 지위로 격상됐다. 반면 지금 사람들이 돌아보는 20세기 후반이라는 레트로 소스에는 실질적 우수함보다는 호황의 분위기가 묻어 있다. 물론 90년대 물건만의 우수함을 찾아나서는 현대판 박물적 애호가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다. 우수한 90년대 빈티지의 시장 가격은 아직도 저렴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나는 21세기의 가장 크고 슬픈 특징이 양극화라고 보는데, 레트로 역시 양극화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좋은 옛날 물건이나 풍조는 금세 모던 럭셔리로 재발견될 것이다. 90년대의 고품질 대량생산 제품은 머지않아 모던 빈티지가 되어 값비싼 값에 거래되고, 그 반대쪽 레트로는 재생산의 소스 혹은 레퍼런스로서 값싼 물건의 품질을 가려주기 위해 쓰일 것이다. 요즘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이는, 레트로 스타일 오버핏 티셔츠의 낮은 품질처럼. 그래서인지 요즘 길거리 청년들이 입고 다니는 오버핏 셔츠 재단과 원단의 품질이 높지 않은 걸 보면 뭐라 말하기 힘든 우울한 기분이 든다.                   

글ㅣ박찬용(<디렉토리> 부편집장) 

레트로라기보다, 라이브

2000년대 음악 차트에선 ‘소몰이’가 강세였다. 당시에도 논란은 있었다. 즐기는 쪽과 부정하는 쪽이 맞서는 형세였다면, 시대가 지나고 나서는 비판론이 무게를 얻었다. 2000년대 패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쪽은 패션의 암흑기란 표현만큼 더 극단적이었다. 베스트, 화려한 비니, 로고가 큰 벨트 등은 웃음의 대상으로 소비되곤 했다. 얼마 전부터 어쩐지 전세가 역전됐다. <놀면 뭐하니?>의 SG워너비 출연편은 오랜만에 1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돌아온 ‘토토가’인가? 그런데 토토가의 가수들이 ‘레트로’였다면, SG 워너비를 대하는 시선은 꽤 다른 듯했다. 과거가 아닌 지금 이석훈의 ‘짤’이 SNS에서 인기를 끌었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냉동 인간’이라는 식이 아니라,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예전보다 더 잘하고 ‘이렇게 훈훈한 이석훈’으로 소개됐다. 소몰이의 상징과 같던 보컬 김진호가 소환되는 대신(혹은 동시에), 이석훈이 재발견됐다. ‘05학번이즈백’은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히트 상품이다. 등장인물들은 바로 그 2000년대 패션으로 연기하고, 적절한 재현과 과장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다만 비나 KCM의 전성기 시절 패션이 암흑기란 관점에서 거론되기보다, 길거리에 그때 그 아이템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연착륙한 부츠컷 청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래퍼들은 다시금 트러커 캡과 뉴에라를 찾는다. 

레트로라는 말은 회상과 그리움을 포함한다. 재해석이란 단서가 붙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핵심은 과거의 것에 있다. 녹색 멜라민 그릇을 쓰는 식당, 목욕탕 타일을 그대로 둔 카페 같은 식의 ‘뉴트로’는 어렴풋한 추억과 과감한 시도, 즉 레트로와 뉴가 사이좋게 섞인 모양새 같았다. 그러다 경계가 흐려지기도 했다. 겪은 적은 없지만 정서에는 열광하게 되는 시티팝은 뉴트로인가, 레트로인가? 구분하기 어렵다. 시티팝의 모호함처럼 지금 과거의 문화가 소비되는 방식은 전과 좀 다르게 보인다. 레트로라기엔 지금이 앞서고, 뉴트로라기엔 ‘뉴’와 ‘트로’의 화학작용이 노골적이지 않다. 그보다 과거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차용 및 재생산한다는 인상이다. ‘90년대가 대세’, ‘이제 2000년대’ 같은 주장도 그리 위력적으로 들리진 않는다. 대체로 15년에서 20년 정도 지나면 유행이 돌아오고, 몇 년 전이 가장 뒤처져 보인다는 통념 자체가 무의미해진 탓이다. 애프터스쿨이 출연한 <문명특급>과 <스브스뉴트로> 속에서 재생되는 과거 <SBS 인기가요>를 즐기는 시청자의 성격 사이에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딩고가 ‘킬링 벌스’의 성공에 힘입어 시작한 기획 ‘킬링 보이스’에 최근 빅마마가 출연했다. 그다음 주 출연자인 샘김 편 조회수가 7월 초 현재 약 46만인데, 빅마마는 이미 550만을 넘겼다. 진작 업로드된 에일리, 펀치, 폴킴 등의 누적 조회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치다. ‘킬링 보이스’에서는 ‘킬링 벌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뮤지션이 동일한 영상 포맷 안에서 노래한다. 그렇기에 2000년대에 활동한 빅마마 편이라고 해도 딱히 레트로의 기운은 미미하다. 되레 최근 드문 보컬 그룹이라는 특징 덕에 신선한 쪽에 가깝다. 신곡 발매를 앞두고 있었고, 목소리도 녹슬지 않았다. 이 영상에 <피식대학>이 ‘본인등판’해 싸이월드체로 댓글을 달았다. 여느 유튜브 인기 게시물이 그렇듯 <피식대학> 스타일의 대사를 따라 하거나 빅마마와 최준의 콜라보를 요청하는 ‘대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재미있는 지점이다. ‘B 대면 데이트’로 알려진 최준은 <피식대학> 세계관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최준의 니곡내곡’이라는 코너를 진행하며 가수들과 함께 노래 부르기도 한다. 빅마마 영상에 달린 <피식대학>의 댓글은 ‘05학번이즈백’의 쿨제이 스타일에 착안한 것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은 쿨제이보다 최준을 먼저 떠올렸다. 빅마마가 ‘킬링 보이스’처럼 ‘최준의 니곡내곡’에 등장해도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긍정적 의미로. 

플랫폼의 왕중왕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상당히 똑똑한 한편 관대하다. 빅마마의 ‘킬링 보이스’를 시청하는 동안 유튜브에서 추천 영상으로 권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장나라의 추억 소환 무대, ‘킬링 보이스’ 해외 리액션, 브라운 아이드 소울 2018 콘서트, 싸이월드 BGM 리스트 등등. 그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한다. 무엇을 클릭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빅마마 = 2000년대 = 파워 고음’이라는 의식의 흐름만으로는 계열화하기 어려운, 파편의 집합이다. 누구는 문나이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고, 누구는 애프터스쿨을 보며 신기해한다. 이런 소비를 자신 있게 ‘레트로’라 부를 수 있을까? 그보다 우리가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는 가운데 존재하는 흥미로운 ‘레퍼런스’에 가까워 보인다. 다소 웃기지만 좋은 부분이 있다면, 전체가 아니라도 일부가 맘에 든다면, 5년 전 것이든 15년 전 것이든 지금의 관점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90년대생들이 회상하는 과거가 되어버린 동방신기 무대의 결기, 샤이니 멤버 간의 호흡은 언제고 누구라도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2019년, 아마도 지난 대중가요를 소환하는 현상의 시발점 중 하나로 꼽을 만한 <SBS K-POP CLASSIC> 유튜브 채널의 <SBS 인기가요> 24시간 스트리밍이 큰 호응을 얻은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전시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파편이든 레퍼런스든 거기에 수많은 ‘로우(Raw) 데이터’가 있어서다. 그 채널의 기획자는 한 인터뷰에서 기획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SBS 인기가요> 자체가 라이브이고,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기 때문에 항상 끊이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건 레트로가 아닌 ‘라이브’다. 지금이라는 앞뒤 재지 않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글ㅣ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 

피처 에디터
권은경,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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