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아트 위크에서.
정신만큼은 ‘진격의 아트바젤 홍콩’을 외치는 듯한 홍콩의 봄이 다시 한번 지나갔다. 페어장 바깥, 서구룡 문화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PHOTO BY IWAN BAAN, © HERZOG & DE MEURON, COURTESY OF HERZOG & DE MEURON.

COURTESY OF 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 AUTHORITY.
3월 25일 아트바젤 홍콩 프리뷰 날, 페어장이 문을 닫기 10분 전. 늘 그렇듯 영혼이 반쯤 휘발한 채로 막판 스퍼트를 내기 위해 거닐다가, 적갈색 벽에 왠지 고요한 느낌으로 걸려 있는 그 유명한 그림을 봤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갈색 머리의 젊은 여인’(1917-18). 누군가는 페어장 문이 열리자마자 이 페이스갤러리 부스를 찾아갔겠지만, 도매 상가처럼 비슷한 상점이 줄줄이 자리 잡은 곳에서 유독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일반인이라면 아트페어장에서도 메가 갤러리 부스 하나쯤은 놓칠 법하다. 오랜 시간 진위 논란에 휘말린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이번 페어에서 가장 높은 출품가(약 200억원)로 알려졌다. 결국 판매되진 않았다. 최고가 혹은 초고가라는 금액이 한 해의 아트페어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왕좌’를 차지한 예술이 무엇일지 궁금한 심리는 어쩔 수가 없다.
올해 페어에서 최고가 판매를 기록한 작품은 바스티안 갤러리가 선보인 피카소의 ‘화가와 그의 모델’(1964)이었다. 약 61억원.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홍콩 컨벤션&전시센터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는 9만 1,500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41개 국가 및 지역에서 240개 갤러리가 참가했고, 이는 작년과 거의 같은 규모다. 그중 절반 이상이 아시아 태평양권에 기반을 둔 곳들이다. 참여 갤러리와 출품작 전반에서 분명 감지할 수 있었던 ‘범중화권’ 분위기 속, 데이비드 즈워너가 중국 작가 류예(Liú Yê)의 ‘백설공주’를 피카소에 이어 약 57억원에 거래한 점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하우저앤워스의 담보된 필살기인 루이즈 부르주아나 조지 콘도보다 반가운 건 화이트큐브가 선보인 트레이시 에민의 2024년 작이었다. 투병 후 다시 부지런히 작업 중인 작가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회화는 약 24억원에 판매되었고, 현재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는 트레이시 에민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 작가들이 돋보인 조현화랑은 박서보, 김택상, 강강훈, 이배 등의 작품을 총 37여 점 판매했으니, 이 또한 인상적인 소식이다.

KANG KANG HOON, NOSEBLEED, 2026, OIL ON CANVAS, 194X130CM, COURTESY OF JOHYUN GALLERY.

COURTESY OF ART BASEL HONG KONG.
아트바젤과 금융기관 UBS가 발표한 글로벌 아트 마켓 리포트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미술시장의 매출은 약 596억 달러다. ‘시장이 완만한 회복 국면을 맞았다’ 같은 정보는 페어장에서 실은 감상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별 매력이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트페어장은 미술사 거장의 작품을 불시에 마주칠 수 있는 장소다. 디지털 아트를 조명하는 아트바젤의 새로운 섹터 ‘Zero 10’, 부스 형태를 벗어나 대형 설치작 위주로 선보이는 섹터 ‘인카운터스’처럼 관람하는 재미를 안기는 현장이기도 하다. 올해 ‘인카운터스’는 여느 때보다도 힘을 준 느낌이었다. 도쿄 모리미술관장인 마미 카타오카를 비롯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모인 네 명이 협업 체제로 큐레이팅한 점에서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오행’이라는 개념을 공통 주제 삼아 물, 불, 대지, 에테르라는 소주제로 섹터를 구성했다. 총 열두 명의 작가들이 페어장 곳곳에서 미니 전시를 선보였다. 국제갤러리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강서경의 존재감을 적극 드러냈다. ‘인카운터스’를 통해 다양한 조각 작품군을, 부스 안의 또 다른 부스 형태로 한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캐비닛’ 섹터에서는 회화를 집약적으로 전시해 자연과 인간을 넘나드는 강서경의 작품 세계를 소개했다.
아트바젤 홍콩이 예의 허브로 거듭나고자 한다는 신호는 페어장 바깥에서 더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페어를 둘러싼 홍콩 아트 위크 기간,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홍콩 국제 문화 서밋(Hong Kong International Cultural Summit)’이 열렸다. 서구룡 문화지구 관리국인 WKCDA에서 주최하는 이 행사는 올해 홍콩 아트 위크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주제는 ‘새로운 시대: 예술을 통해 재해석하는 공동체’. 전 세계 14개 지역에서 모인 유수의 미술관 및 기관 수장들, 관련 인사들 약 30명이 연사로 나섰다. 주요 발표 의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분야 예술지구가 직면한 도전과 기회’, ‘21세기 미술관에서 학습의 역할’, ‘예술, 커뮤니티, 리더십간 관계 재정의’ 등. 행사는 이틀 동안 서구룡 지역의 기관들에서 총 6회 진행되었는데, WKCDA에 따르면 약 2,00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숫자의 정확도야 알 길이 없지만, 홍콩이 세계 각지에서 관계자들을 적극 불러들여 담론의 장을 형성하려는 포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 HONG KONG PALACE MUSEUM.
홍콩의 서구룡 문화지구는 원래 빅토리아 하버 해안선의 바깥쪽이었던 구룡반도 일부를 추가 매립해 조성한 곳이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 이 지역에 M+와 홍콩고궁박물관(HKPM)이 개관했다. 그 타이밍은 좀 슬플 정도였는데, 어쨌든 이후 미술 관계자들은 물론 여행자들의 동선이 바뀌었다. 유명 갤러리들이 밀집한 지역인 센트럴보다 더 아랫동네인 웡척항에도 갤러리며 핫한 스튜디오가 나날이 늘고 있다. 과거 산업지대였던 웡척항 일대의 인상은, 굳이 한국으로 비유하면 을지로나 예전 문래동쯤 될까? 웡척항에서 M+까지, 아트와 디자인을 주제로 홍콩을 둘러본다면 남에서 북으로 부지런히 이동해야 한다.
M+에서 현재 진행 중인 주요 전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아시안이다. 중국 전통 수묵과 서양미술을 결합해 풍경을 그리는 추상화가 자오우키 전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설치 음악’ 전시가 열리고 있다. 특별전으로는 3월 14일부터 8월 9일까지 한국 작가 이불에 대한 서베이 전시 가 열린다. 이불 전시는 작년 9월부터 올 초까지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순회전이다. M+는 홍콩 아트 위크 기간에 맞춰 피카소전, 야요이 쿠사마 회고전 등의 특별전을 기획해왔다. 서울에서 이불 전시를 이미 본 한국인으로서는 올해 주어진 기회가 다소 아쉽기도 했지만, M+ 전시장은 리움 전시장보다 넓고, 공간의 분위기 자체도 사뭇 다르다. ‘아마릴리스’, ‘몬스터: 블랙’처럼 리움에서 볼 수 없었던 작품도 있다.

PHOTO BY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COURTESY OF KUKJE GALLERY.
이번 홍콩행에서 가장 흥미롭고 값진 경험은 M+와 홍콩고궁박물관의 소장품 보존 및 보관 시설을 둘러본 시간이다. M+의 현재 목표대로라면, 몇 년 후 보존을 둘러싼 과정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보존 전문가라는 놀라운 직종의 세계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아주 유니크한 경우입니다. 아시아 지역에는 현대미술 보존 관련 교육 기관이 따로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팀에는 각 분야 전문가가 다양하게 포진해 있죠. 전문가들을 투입하려니 구성원이 국제적인데, 인턴십이나 펠로우십 형태로 홍콩의 젊은이들을 참여시키기도 해요.” 이곳 프레스 투어를 이끈 M+의 컬렉션&전시 디렉터, 베로니카 카스티요(Veronica Castillo)의 말이다.
이 7층 규모의 소장품 보존 및 보관 시설(Conservation and Storage Facility)은 M+ 미술관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다. 층별로 시각예술, 사진, 디자인&건축 등으로 분야를 구분해두었다. 방문객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는 곳이다. 7층에 들어섰을 때, 직원들은 일본 플럭서스 계열 작가인 아이오(Ay-O)와 베이징 출신 작가 류웨이(Liu Wei)의 작품을 두고 무언가 작업 중이었다. 커다란 창으로 자연광이 들어오는 밝은 분위기였다. “이 건물은 북향이에요. 색 보정 작업을 할 때는 북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가장 좋거든요.”
프린트 매체가 있는 또 다른 층은 다루는 매체 특성상 빛을 차단한 상태였지만, 거기서 만난 한 직원의 말이 낭만적이었다. “물리적인 오브제 이면에는 늘 어떤 이야기가 있어요. 긁히거나 손상된 흔적을 봐도 저는 그것들이 이야기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작가들이 작품을 봉투에 넣어 해외 공모전으로 보내곤 했거든요. 심사 과정에서 작품이 사람의 손을 타기도 하고 벽에 핀으로 고정되기도 했죠. 작가에게 다시 발송되는 과정에서 또 손상을 입기도 하고요.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주름지고 흉터도 남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었다거나 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물론 수십 년 전 프린트에 남은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말끔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을 굳이 보톡스 맞은 것처럼 매끈하게 만들어야 할까요?” 인력들의 배경이 다국적이라는 점은 ‘융합’이라는 시대정신마저 포용하고 있는 듯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공부한 백인과 중국 한지에 특화된 동양인, 일본의 마운팅 기법에 지식이 많은 동양인이 한 팀으로 머리를 맞댄다면? 각자의 관점과 지식, 여러 언어로 된 참고문헌이 교차하는 가운데, 서로 믹스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보존에 관한 이들의 해결책은 굉장히 흥미롭고도 창의적일 수 있다.

PHOTO BY WILSON LAM, COURTESY OF M+, HONG KONG.
홍콩고궁박물관의 보존 연구실(Conservation Lab)을 방문했을 때는 꽤 정중한 자세가 필요했다. 외부인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유물이 있는 곳이니만큼, 움직일 때도 조심하라는 지침(“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물건이 놓인 테이블 위에서 폰을 수직으로 들고 촬영하진 마세요!”)이 몇 가지 따랐다. “곧 뉴욕 메트의 보석 작품 약 200점을 대규모로 선보이거든요. 우리는 전시를 열 때마다 늘 홍콩과의 연관성을 담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박물관 소장품과 컬렉터들의 소장품 일부도 함께 보여줄 예정이에요.” 수석 큐레이터 데이지 이유왕(Daisy Yiyou Wang)이 테이블 위의 유물들을 소개하며 말했다.
청나라 상류층이 결혼식이나 행사 때 주로 착용했다는 화려한 모자, 공작새 깃털로 장식된 직물, 직물 방향으로 향한 현미경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이미지 프린트가 놓여 있었다. “이 깃털 장식의 섬유 분석을 해봤거든요. 놀랍게도 대부분 자수를 놓아 긴 깃털처럼 문양을 만든 거였어요. 흥미로운 건 사이사이에 진짜 공작새 깃털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깃털 하나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그것들을 수없이 겹치고 연결한 후, 거기에 실크를 섞어 완성한 거죠. 아주 특수한 기술이 사용되었어요.” 4월부터 열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세계의 보석들: 변형된 몸>전은 기원전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0년의 시간과 다섯 대륙을 아우르며 장신구 문화 전반을 조명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방대한 주얼리 컬렉션을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첫 자리다.
서구룡 문화지구는 계속해서 개발 중인 단계다. M+와 홍콩고궁박물관 외에도 문화 관련 공간으로 공연 예술 센터, 중국 전통극이나 오페라 무대를 올리는 공연장, 대관 공간 등이 있고, 2027년에는 무용 전문 센터가 오픈할 예정이다. ‘투자를 받으면 가동할’ 야심찬 프로젝트도 여러 개다. 홍콩의 ‘인터내셔널’한 특징과 ‘관’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추진과 자금이 결합하면 무슨 일이든 더 벌어질 수 있을 것 같달까? 홍콩 아트 신의 프라이드로 자리 잡았을 M+에 머물다 보면, 공원과 주변을 향해 열려 있는 건축, 빅토리아 하버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야외 테라스, 아트바젤 홍콩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는 미디어 파사드 등 우월한 물리적 여건이 ‘다른 경험’을 안겨준다는 걸 실감한다. 아트바젤 홍콩이 ‘귀환’을 선언한 2023년, ‘정상화’의 2024년, ‘회복’의 2025년을 지나, 2026년 홍콩 아트 위크에서 결국 서울의 사정을 자주 떠올리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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