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마주한 보테가 베네타의 루이스 트로터

김신

하우스의 유산과 개인의 직관을 수공예라는 단단한 구조로 직조하며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

서울에서 마주한 그녀에게, 옷의 형태와 구조, 현실의 삶과 움직임을 담아내는 특유의 깊고 담백한 철학을 들었다.

<W Korea> 밀라노 데뷔 쇼에 이어 두 번째 컬렉션이다. 처음에는 하우스의 언어를 다듬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당신만의 미학이 보테가 베네타의 헤리티지 위에 선명히 보인다. 이번 작업도 아카이브에 대한 탐구에 기반을 두는가, 아니면 직관을 바탕으로 하는가?
Louise Trotter
두 가지 다 해당한다. 하우스에 합류한 초기에는 브랜드의 역사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뿌리가 된 이탈리아 문화를 이해하는 연구가 필요했다. 지난 1년여간 밀라노에 머물며 하우스의 역사와 유산을 치밀하게 탐구했는데, 이러한 배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보테가 베네타와 나만의 유대를 쌓아가며 특별한 여정을 모색한다. 따라서 유산 속에서 개인적으로 깊이 반응하는 지점, 즉 직관 또한 작업의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나의 정체성이 브랜드와 함께 새롭게 재형성되고 있다는 평가 역시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특히 나를 끊임없이 매료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수공예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인트레치아토를 색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설계하는 과정에 강렬한 흥미를 느낀다.

당신의 디자인은 ‘움직일 때의 아름다움’이 특히 돋보인다. 런웨이 위를 걷는 순간 옷이 비로소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당신에게 ‘움직임’이란 컬렉션을 구상하는 첫 시작점인가, 아니면 완성 단계에서 구현되는 결과물인가?
결국 옷과 제품은 현실의 삶, 즉 데일리 라이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것들은 착용자의 움직임과 함께 비로소 살아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옷이나 가방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움직임의 감각을 통해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존재와도 같다. 오늘날 우리는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굉장히 활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작업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패브릭과 소재 개발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모든 과정의 시작점이다. 그다음으로 그 소재가 몸 위에서 어떻게 드레이프되고 상호 작용하는지를 지켜보는 일 역시 무척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의상이 구조적으로 설계되는 방식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겉에서 안으로, 다시 안에서 밖으로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보테가 베네타에서 표면 장식이나 수공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지만, 나는 이 역시 단순한 장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상의 구조와 연결된 일부라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표면과 내부 간의 구조적 연결감 사이의 상호 작용을 즐기는 편이며, 지난 두 번의 컬렉션에서도 이러한 의도가 꽤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이번 2026 겨울 컬렉션 쇼노트에 밀라노 건축물의 차가움과 그 이면에 숨겨진 관능적인 삶의 대비를 언급했다. 당신이 발견한 밀라노 특유의 반전 매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이러한 시각적·문화적 대비를 컬렉션의 소재나 디테일로는 어떻게 치환했는가?
내가 경험한 밀라노는 자신을 아주 천천히 드러내는 매혹적인 도시다. 첫인상은 거칠고 차가운 회색빛 분위기일지 몰라도,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시의 진짜 매력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마치 열쇠를 얻어 비밀의 문을 연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진입하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중정과 정원이 나타난다. 밀라노는 이렇듯 느리고 은근하게 사람을 유혹한다. 이번 컬렉션에 이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투영하고 싶었다. 밀라노의 색채와 형태, 텍스처를 포착해 우리만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하우스의 본사인 팔라초 산 페델레가 과거 밀라노 최초의 코미디 극장이었다는 점도 좋은 영감이 되었다. 공간 자체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셈이다. 현재 보테가 베네타는 이러한 매력적인 대비를 작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외형의 회색빛이 지닌 완고하고 견고한 모습,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선명한 색채와 유희적 즐거움. 그 상반된 요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컬렉션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구현해내고 싶었다.

이 인터뷰와 나란히 실릴 에디토리얼 화보를 함께 기획하고 있다. 물론 <더블유>의 시선으로 룩을 큐레이션하겠지만, 컬렉션을 창조한 당신이 이번 시즌 가장 애착을 갖는 피스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가장 결정적인 룩 3가지를 꼽아준다면?
이번 컬렉션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룩이 세 개 있다. 첫 번째는 하우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오프닝 룩 1이다. 외견상 밀라노의 브루탈리즘 건축을 연상시키는 단단함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구조로 설계된 코트다. 남성적인 골조 위에 어깨와 힙 라인을 둥근 곡선으로 굴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드러운 구조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 룩의 정서는 컬렉션 후반부인 룩 63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번째로 꼽는 룩 63은 이탈리아 고유의 ‘차려입는 문화’를 투영한 결과물이다. 모두가 편안함과 캐주얼함만을 추구하는 시대지만, 밀라노에는 여전히 격식을 갖춰 드레스업하는 공동체적 의식이 존재한다. 극장을 찾거나 타인을 마주할 때 정성을 다해 옷을 입는 행위는 곧 상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그런 문화적 정서를 이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핸드 니트 스웨터에 담아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룩 76은 극장이라는 무대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이브닝 가운이다. 이 디자인은 보테가 베네타의 본질인 ‘스킨(skin)’에 대한 탐구와 맞닿아 있다. 하우스의 뿌리인 가죽과 인트레치아토 기법 모두 피부의 감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에는 가죽 대신 니트 짜임을 활용해 퍼(fur)의 질감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스킨을 색다르게 해석했다. 살결에 닿는 지극히 촉각적인 경험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다.

당신은 ‘코스튬이 아닌 워드로브’로서의 패션을 지향해왔다. 실제 당신의 삶 속에서 10년 넘게 타임리스하게 활약 중인 아이템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더불어 당신의 생애 첫 ‘보테가 베네타’에 얽힌 사적인 기억이나 추억이 있다면 들려달라.
평소 ‘워드로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만, 보테가 베네타 안에서는 사실 ‘의상(Costume)’이라는 개념 역시 함께 깊이 탐구하고 있다. 일상성과 특별함을 유연하게 오가며, 잘 차려입는 것과 편하게 입는 것의 경계를 허물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옷장에는 10년, 20년 넘은 옷이 정말 많다. 일종의 유니폼처럼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자주 반복해서 입는 편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애정을 느끼는 옷도 존재한다. 오래 곁에 둘 것들을 구매하는 편이라 특정 피스를 꼽기는 어렵다. 일관된 취향은 유지하되, 매일 입는 유니폼의 스펙트럼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갱신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 보테가 베네타는 토마스 마이어 시절에 조우했다. 그 시기의 아카이브를 몇 점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20년도 더 된 회색 파우치다. 지금도 밀라노에서 거의 매일 가방 안에 넣어 다니며 사용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특별한 아이템이다. 흥미로운 점은 토마스 마이어 이전 시대의 보테가 베네타 제품 역시 오랜 시간 수집해왔다는 사실이다. 인트레치아토 기법이 등장하기 전인 1966년부터 1975년 사이 초창기 피스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브랜드 공식 아카이브에도 존재하지 않은 귀한 피스들이라, 내가 직접 하우스 아카이브에 다시 기증하기도 했다. 이렇듯 나의 과거와 현재는 보테가 베네타의 유산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많은 예술 매체 가운데 당신이 유독 패션이라는 장르에 매료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인형 옷을 만들며 자랐다. 흥미로운 건 그 어린 나이에도 인형에게 입힌 옷을 보며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틀리다’는 시각적 본능이 작동했다는 점이다. 어딘가 어색한 옷을 보면 참지 못하고 자주 갈아입히곤 했다. 나에게 패션의 모든 것은 이 명징한 시각적 감각에서 출발했다. 재봉사였던 할머니는 유년 시절의 내가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조력자다. 사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재봉틀을 다룰 줄 알았다. 그렇듯 내게 처음 중요했던 것은 패션이라는 거창한 개념보다 ‘옷을 만드는 행위’ 자체와 ‘구조를 설계해가는 과정’이었다. 패션이라는 거시적인 세계를 이해하기도 전에, 옷을 구축하는 장인 정신에 먼저 매료된 셈이다. 할머니는 언제나 사람의 몸이 지닌 형태와 구조를 기반으로 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어린아이가 지닌 기술이란 그저 네모난 천에 머리가 들어갈 동그란 구멍을 뚫는 수준이었지만, 그 천을 몸에 걸쳤을 때 어깨 라인이 왜 어색해 보이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몸과 옷 사이에 존재하는 유기적인 관계를 할머니를 통해 배운 것이다. 그렇듯 나에게는 패션보다 ‘옷을 창조하는 과정과 수공예’가 언제나 본질이었다. 이후 수공예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패션이 문화, 예술, 음악과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했고, 그 일련의 여정이 결국 나를 패션 디자이너의 길로 인도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시작과 현재는, 결국 몸과 옷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본질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는 미술사에서 소외된 여성 작가들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뜻깊다. 이러한 맥락은 문화 예술 전반에서 여성의 기여를 알리고 창의적 목소리를 지지하는 케어링의 ‘우먼 인 모션’ 프로젝트와 궤를 같이한다. <더블유>는 매년 이 프로젝트의 움직임을 기록해왔고, 당신의 인터뷰가 실릴 7월호 역시 ‘우먼 인 모션’ 특별 커버라인으로 발행될 예정이다. 본지 또한 다음 주 그 연대의 현장을 생생히 담기 위해 칸영화제로 향한다. 이처럼 여성의 창의성을 지지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 당신이라는 존재가 있듯, 당신 또한 누군가의 연대와 영감을 발판 삼아 지금의 위치에 섰을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정립해가던 커리어 초기, 이정표가 되어주었거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준 여성 아티스트나 선배가 있다면 누구인가?
내 커리어를 통틀어 위대한 여성들과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그들은 언제나 나의 정신을 고양하고 성장을 견인해준 존재들이다. 초기 커리어 단계에서는 루실 르윈(Lucille Lewin)이라는 탁월한 멘토를 만났다. 현재는 세라믹과 유리를 매개로 조각 작업을 이어가는 아티스트인데, 물성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 커리어의 첫 10년은 그분의 지향점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도 주변의 여성들, 혹은 멀리서 영감을 주는 여성들의 궤적을 보며 끊임없이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작업 세계는 나에게 늘 배움의 장이자 스스로를 반추하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우리 곁에 있는 여성들의 저력을 절대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매일을 함께하는 이들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여성은 여성을 지지해야 마땅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연대의 힘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SPONSORED BY
BOTTEGA VENETA
포토그래퍼
안주영
헤어
배경화
메이크업
최시노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