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한 이야기 #1

권은경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긍정하는 두 이야기

‘사랑의 시작’이라는 시제를 던지자, 이에 대해 닮은 듯 다른 고백 두 편이 배달되었다. 한 사랑의 관계에는 끝이 있어도 마음을 쓰는 일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성실하게 열매의 시절을 키워보자는 다정한 권유. 그리고 욕망과 사랑이 혼재된 세상에서 진짜 ‘사랑’이 뭔지 흥미롭게 추적해가며 끝내 사랑을 이해시키는 논리적인 유권.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 혹은 시작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는 이들을 향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긍정하는 두 이야기를 건넨다.

사랑의 뒷면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석류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수피즘의 창시자이자 시인인 루미의 시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수십 세기 동안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많은 시인들이 시를 짓고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지요. 예술가들은 사랑과 슬픔의 그 어디 사이에서 영감을 얻고,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요. 봄의 과수원에는 물빛으로 부푸는 열매가 있고, 빛을 먹고 자라나는 식물이 있지요. 과수원지기는 열매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요.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제게 낯설기도 합니다. 제가 쓰는 시며 만드는 노래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가깝기 때문에요. 5년 만에 다시 소개팅을 했다는 후배와 차를 마셨습니다. 통유리로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그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다시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사랑의 감정을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 너무 좋고 설레긴 하나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쓺이 쉽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익숙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배의 고민에 사랑이라는 ‘애(愛)’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은 본래 사랑 애(愛)자의 ‘애(愛)’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 사(思), 헤아릴 량(量)’의 ‘사량’이 변한 말로, ‘생각’에서 ‘애정’의 의미로 바뀌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을 위해 마음을 쓰는 일이 사랑이라는 거지요.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후배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글쎄, 같은 하늘 아래서 고요히 눈을 맞는 일. 비유적으로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제가 시인이다 보니 제게 연애 상담을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습니다. 정작 저도 잘 모르고 해주는 말들에 어떤 위안을 받나 봅니다. 후배를 보내고 겨울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새들을 보면서 최근 재개봉한 영화 <이프 온리>가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던 연인과 다투고 여자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어요. 비탄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눈을 떠보니 다시 여자 주인공이 살아 있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던 남자 주인공 이안은 그녀와 전날 함께한 모든 상황이 똑같이 재현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보지만, 주어진 시간이 하루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프 온 리>에서 참 좋아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오늘 너에게서 배운 것 덕분에 내 선택과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영영 난 사랑을 몰랐을 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

@yeslydimate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계산 없이 시작해야 하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내가 없는 당신의 곁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하는 것,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 가끔 만져지지 않는 통각, 몸과 마음이 동시에 느끼는 모든 감각. 한밤의 꿈처럼 잊힐 듯 잊히지 않는 것.

다시 결론지어 이야기한다면, 제게 사랑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를 아끼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 정도로 사랑의 복잡한 의미를 정의해볼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면야 어떤 사랑도 오래갈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현실이기도 하지요. 모든 걸 다 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남남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인간의 감정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 사랑의 속성에 대해 곱씹다 보면 제가 참외로 지은 시가 떠오릅니다. 참외는 안이 텅 비어 있기도 하지만 달콤한 씨앗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지요. 상대를 사랑할수록 나의 비어 있는 마음을 어떤 투명한 감정들로 채워가는 것, 언제 왈칵 쏟아질지도 모를 마음을 머금고 그렇게 노란빛으로 부풀어가는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그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불안과 의심 속에서 기다림이 더 많은 사람이 더 지는 느낌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으로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요. 제 시 ‘사랑의 뒷면’을 잠시 가져와 봅니다.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나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 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사랑의 시작에는 끝이 있기에 결국 우리를 울게 할 것이고, 이미 돌아선 그 사람의 뒷 모습을 사랑이라고 믿어도 되냐고 우리를 자꾸 눈 감게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등 돌릴 사랑의 얼굴을 알면서도 또 사랑을 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다시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아마 인간의 숙명이겠습니다.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은 다정한 진심의 순간 아닐까요.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세계에 닿기 위해. 상대방의 마음에 손을 얹는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서 침묵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의 숨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

사랑을 다시 하려는 혹은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눈을 질끈 감게 하는 생채기 난 빛들도 결국 사랑으로 다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그 시절로 그 힘으로 또 살아가게 한다는 것, 그래서 다시 딛고 일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덜 아프게 사랑을 건네는 것, 그러니까 그 사랑하는 꽃을 꺾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뿌리까지 자라는 열매의 시절을 키워보는 것. 사랑이 있던 자리에 나 혼자 남겨지더라도, 우리를 꽃피우게 했던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기도 하겠습니다. 사랑의 관계에는 유통기한이 있겠지만, 마음을 쓰는 일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사랑을 시작하려는 당신은 한 사람을 향한 마음 쓰는 일에 성실하게 임할 것. 다정하게 그 사람의 눈빛을 읽는 것, 상대방의 마음이 어떻게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지 살피는 것. 징검돌을 건너듯 서로의 별자리를 천천히 이어보는 것. 당신의 눈빛이 오늘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 단 하루만 그 사람에게 전화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해줄 건가요? 돌아와 꽉 한번 안아주는 마음. 말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사랑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겨울바람에 상처가 나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상처만 봐도 울컥하는 마음을 사랑이라 적어봅니다.

– 정현우(시인, 시집 <소멸하는 밤>, 산문집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 저자)

사랑과 파스타

우리는 연애 같은 건 안 해도 그만인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돌부터 연애 예능과 소셜 미디어 속 일반인들, 아이와 강아지, 고양이들까지 사랑한다 말하고 관심과 현금을 쏟아부을 대상이 넘쳐나니까. 하지만 그게 우리가 사랑을 더 잘 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마트 매대 가득히 파스타 면과 소스가 있다고 우리가 파스타를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니까.

사랑하면 원한다. 파스타를 파스타이게 하는 게 면인 것처럼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것도 원함의 상태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욕구나 욕망도 똑같이 뭔가를 원하는 상태니까. 사랑은 그것과 어떻게 다른 걸까, 우리는 왜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걸까. 욕구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먹으려 한다. 식판에 올린 푹 퍼진 쌀국수에 크림소스를 부어줘도 얼마든지 맛있게만 먹을 수 있는 게 식욕이고 그 무차별성이 식욕의 유용함이다. 하지만 욕구의 한계 역시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 식판에 담긴 사료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이다.

욕망은 대상을 특정해 원한다. 욕구가 식판 위의 국수로 족하다면 욕망은 흰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파스타를 원한다. 그뿐이 아니다. 접시는 희고 넓은 도자기여야 하고, 면은 알덴테로 익혀야 하며, 소스는 기예에 가까운 만테카레로 완벽히 유화시켜 면에 도톰히 묻어나야 하고 치즈와 올리브유는 어느 지역 어느 품종을 어떻게 짜낸 것이어야 한다 등등 욕망은 변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선을 긋고 색칠해가며 특정한다.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다면 욕망이 아니다. 예리하고 예민하게 가장 우월한 것을 변별하고 차별해낼 때 우리는 취향이 세련됐다고 칭찬한다. 그릇부터 면과 소스의 재료, 종류뿐 아니라 테이블의 높이, 씌운 보의 무늬와 청결함, 서빙 온도와 서버의 태도까지 오직 가장 맛있는 맛, 쾌감을 위해 완벽히 선별되고 조율된 한 접시의 파스타를 상상해보자. 침이 고일 뿐 아니라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고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그 진부한 수식어가 자극하는 것도 바로 욕망이고 그래서 막상 그걸 해보면 우리는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걸 했다고 당장 죽어도 좋겠다는 마음 같은 건 조금도 나지 않는다. 더 유명한 사람이 추천한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것’을 먹겠다는 마음만 생길 뿐.

흔히 욕망을 음식물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무척 편협한 의견이다. 욕망은 우리가 제각각 다르다는 진술이다. 좋아하고 쾌감을 느끼는 대상이 각자의 생김새, 경험, 기질, 성향, 성별 등등에 따라 거의 무한에 가깝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고, 그렇기에 세상 역시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이 흑백 사진이 아닌 총천연색 컬러 사진인 건 욕망 때문이고 그것이 욕망의 유용함이다. 하지만 욕구가 그렇듯 욕망의 한계도 바로 그 유용함에서 비롯한다. 욕망의 속성이 다름과 차별이라는 건 우리가 다르고 차별적인 것들만 욕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우리가 욕망하는 파스타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보다 다르면서 더 맛있는, 다시 말해 새롭고 더 나은 파스타다. 그렇지 않을 때, 이미 먹어본 맛이고 어떤 탁월함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는 확 식어버린다. 욕망이 좌절됐고 더는 욕망할 수 없게 된, 실망의 상태. 이게 사랑일까, 연애의 끄트머리에서 던지는 이 질문은 그러므로 이게 내가 원했던 그 파스타일까, 라는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나 맛있게 먹은, 그땐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평생 이것만 먹고 살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파스타가 정말 이거였을까. 처음 먹은 맛집의 파스타가 수많은 파스타를 거친 뒤 여전히 가장 맛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뭔가가 변했고 그건 돌이킬 수 없다. 많은 연애가, 사랑이 거기에서 끝난다. 더는 가슴이 뛰지 않아서, 설렘도 흥분도 느낄 수 없어서. 하지만 거긴 사랑의 끝이 아니라 욕망의 끝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 외에 대안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 더 나은 사람을 찾아야 하고 그렇게 새로운 사람, 더 나은 사람만이 내 사람일 수 있다는 게 욕망의 공식이니까. 우리가 실망하는 건 먼저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한 우리는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만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대방 역시 우리를 욕망하고 실망한다. 그래서 연애란 누가 먼저 실망하느냐, 그리고 누구에게 실망하고도 바로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능력과 매력이 있느냐의 경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위해 기꺼이 맞춰준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조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어느 한쪽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새롭고 더 나은 사람을 보면 지금 이 사람에게 노력하고 조심하는 게 한심하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자기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노력과 조심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른바 사랑하니 헤어지자는 헛소리를 하게 되는 지점이 여기다. 자기가 뭐라고 상대방한테 더 좋은 사람 만나라 마라 지껄이는 걸까. 하지만 모든 걸 특정해서 끝까지 대상화하는 것이 욕망이라서, 욕망은 우리 자신마저도 특정되는 대상으로, 타인으로 만들고 만다. 욕망은 무한한데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유한함을 무한한 욕망이 잘못과 결핍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결국 우리를 멸시한다. 관계를 부정한다. 많은 연애가 벽에 부딪히는 것도, 서로 같이 사랑하는 사람일 뿐인데 강자, 약자로 나뉘고 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슬픈 건 우리가 고작 그런 걸 원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욕망이 아닌,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게 욕망했기 때문에 기어이 다다르게 되는 지점을 우리는 연애할 때, 그 절정에서 경험한다. 더는 상대방을 그 어떤 대상과도 비교하지 않는다. 오로지 확신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라고, 내가 사랑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사람도 오직 이 사람이라고. 새롭거나 더 나은 사람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유일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우릴 위해 정성 들여 만든 파스타처럼. 그 파스타가 맛집의 파스타보다 맛이 덜하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멋진 조명이 비추는 탁자 위에, 예쁜 접시에 담겨 있지 않다는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안다. 여태껏 경험한 모든 완벽한 파스타와 식사보다 더 먼저, 더 오래 기억하게 될 게 바로 그 파스타라는 걸. 역시나 유일하기 때문에, 그런 유일함을 마주할 때 우리 자신도 유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단지 구분할 뿐이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파스타를 욕망하는 사람은 새롭고 더 나은 파스타를 찾아 끝없이 떠돈다. 하지만 파스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방에서 파스타를 만든다. 욕망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외부에서, 누군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그걸 해내기를 기다릴 뿐. 욕망은 끝없는 대상화로 자신조차 타인처럼 멀리 떨어뜨려버리지만 사랑은 한낱 파스타조차 자기 자신만큼 소중하고 생생하게 마주하게 해준다. 자기가 먹고 싶은, 자기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잘 만든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것이다. 맛집 순례가 유랑이 아닌, 진짜 순례가 되는 것도 파스타를 사랑할 때, 그걸 만드는 사람이 될 때다. 단지 미각적 쾌감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니까, 자기가 원하는 지점을 찾기 위한 경험과 학습의 과정이자 여정이 되니까. 그렇게 만든 파스타도 단순히 새롭거나 더 맛있는 파스타 같은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떳떳이 내고 싶은, 추억이 될 가장 즐거운 시간을 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한 파스타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방식.

사랑이 분명해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명확해진다. 가장 좋은 것, 가장 남다르고 우월한 걸 나누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만든 파스타를 조금 미진해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 만드느라 고생하고 수고했다며 말끔히 설거지해주는 사람이다. 내 입에 맞는 파스타를 만들어 대령하라고 시킬 사람도 우리가 무조건 만들어 갖다 바쳐야 하는 사람도 아니다. 관계에 있어서는 더 나은 사람도, 새로운 사람도 없다는 걸 아는 사람, 기꺼이 우리와 함께 실수하고 잘못하면서 끝까지 곁을 지켜주고 대화해 줄 사람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도 타협이 아니라 약속이다. 서로 참을 수 있는 최저선을 마지못해 그어놓고 언제 넘길지 관리 감독하는 건 관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최고점에 선을 긋고 각자 최선을 다해 선을 지킬 각오와 믿음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3년이든 30년이든 관계의 시간 역시 의미가 생긴다. 그 수많은 날들 동안 서로를 배신하지 않은, 가장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돼줬다는 뜻이니까. 서로에게 다른 어떤 새롭거나 더 나은 사람도 있을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게 사실로 증명되는 거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타고날 수 없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들조차 그런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불행했다. 오직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만들 수 있는 관계이고 사람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오직 사랑이고.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허무한 건 20년, 30년이나 함께 온갖 풍상을 겪은 사람이 남보다 더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된 순간일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얘기일까. 나는 현실에 그런 사랑은 없고, 욕망에 불과한 것들이 사랑의 전부라고, 현실의 연인이나 부부는 모두 겉보기에만 멀쩡할 뿐 속으로는 욕구 불만 속에 서로를 증오하거나 무관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단지 자기가 먹은 파스타가 맛없다고 세상의 모든 파스타도 맛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파스타를 하는 집은 많지만 잘하는 집은 드문 것처럼. 오히려 이런 의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파스타를 배운다면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울 거면서 연애나 결혼에 대해서는 왜 실패담에 더 귀를 기울일까.

– 이혁진(소설가, 소설 <광인>, <사랑의 이해> 저자)

정현우, 이혁진
사진
gettyimages, Instagram @yeslydi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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