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를 찬미하고 새롭게 향유할 시간

김민지

패션계에 다시 찾아 온 90년대의 시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사바토 드 사르노의 2024 S/S 데뷔쇼에 참석한 수많은 유명 인사 중 단연 눈에 띈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배우이자 90년대 슈퍼스타 줄리아 로버츠가 구찌 쇼를 위해 밀라노에 깜짝 등장한 것. 그는 클래식한 회색 블레이저와 스커트, 검정 슬링백 펌프스 차림으로 등장해 정장 차림을 즐겨 입던 199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사바토 드 사르노의 ‘새로운 구찌’를 보니 수십 년 전 유명 인사들의 아카이브들이 스쳐 지나갔다. 패션 검색엔진 태그워크(Tagwalk)에 따르면 뉴욕을 거쳐 런던, 밀라노, 파리의 2024 S/S 컬렉션에서 등장한 1만1,000여 개 이미지를 스캔한 결과 ‘미니멀리즘’이라는 태그가 붙은 룩은 지난해에 비해 4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태그가 붙은 룩 또한 42% 증가한 반면 브랜드 로고 태그가 붙은 룩은 52% 감소했다고. 전반적으로 브랜드를 드러내지 않는 미니멀하고 심플한 1990년대 스타일의 유행이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몇 달 사이, 조용한 럭셔리라 불리는 올드머니 룩을 선보이는 셀러브리티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시작은 뜻밖에도 법정이었다. 2022년 3월, 귀네스 팰트로가 미국 유타주 파크 시티 법원에 출석할 때 걸친 ‘더 로우’의 그린 울 코트와 프라다의 가죽 부츠, 로로 피아나의 크림색 터틀넥 니트가 이 트렌드에 불을 지폈다. 이외에도 티모시 샬라메와의 공개 열애로 당대 가장 핫한 셀러브리티인 카일리 제너를 필두로 켄들 제너, 헤일리 비버 등 가장 현재적인 패션 아이콘들의 차분하고도 럭셔리한 차림에 디자이너들은 즉각 반응했다. 요란하고 거칠고 개성으로 무장한 Y2K가 저물고 시대를 초월한 미니멀리즘이 컬렉션 전반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것.

톰 포드의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피터 호킹스는 톰 포드의 90년대 최고 히트작으로 데뷔 컬렉션을 펼쳤다. 벨벳 테일러링은 1996년 VMAs에서 귀네스 팰트로가 입은 빨간색 구찌 슈트를 회상하게 했고, 톰 포드의 구찌 96-97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낮은 힙-슬렁 클랩 스타일을 모델들의 엉덩이에 걸치는 벨트로 변형시켰다. 대담함과 글래머러스함의 상징인 베르사체 또한 95-96년의 컬렉션을 다시 소환한 듯 미니멀리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는 컬렉션을 내놓았다. 이들의 컬렉션은 귀네스 팰트로, 카를라 부르니, 케이트 모스와 같은 이들이 스타일 아이콘이던 9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페라가모의 이번 시즌 런웨이를 본다면, 미니멀 패션의 아이콘인 캐롤린 베셋 케네디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것이 당연했다. 프로엔자 스쿨러 또한 헐렁한 팬츠와 가죽 부츠, 그리고 트렌치코트로 클래식 미니멀 패션에 대한 경외를 표했고, 막스마라, 보테가 베네타 컬렉션에서도 테일러링, 화이트 셔츠, 그리고 보이프렌드 진 등 90년대 아이코닉한 스타일을 찾아볼 수 있다. 미니멀리즘과 현대적 여성을 대변하는 피비 파일로의 복귀는 또 어떤가. 런웨이 쇼도 없이 치러진 그의 온라인 컬렉션은 셀린느를 떠난 지 5년 만이었음에도 완판 행렬을 이어가며 디자이너의 굳건한 팬덤과 영향력을 입증했다.

1990년대, 미니멀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의 패션이 이번 시즌에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얼어붙은 경제 상황, 끊이지 않는 정치적 분쟁에 디자이너들은 2024 S/S 런웨이만큼은 안전지대로 정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이러한 유행이 캐롤린 베셋의 갑작스러운 사망 25주년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트럼프의 잠재적 귀환이 임박한 상황에서, 냉철한 미니멀리즘이 유일하게 적합한 풍자시처럼 보인다는 것. 불경기에 유난히 복고 트렌드가 자주 등장하는 현상은 으레 목도해온 일이다. 고단하고 힘들 때면 아름답게 미화된 과거에 기대고 싶기 마련이니까.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외치던 이들은 클래식의 회귀를 이야기하며 이전보다 차분해졌고, 패션업계가 지난 10년 동안 지속해온 ‘더 대담한 것이 낫다’는 슬로건은 무기한 정지 상태인 것만 같다. 한동안 패션은 눈에 띄기 위해 아우성치는 이질적인 미학의 거대한 온상이었지만 어떤 피로가 엄습한 걸까? 그와 함께 소셜미디어의 광폭한 발전은 오히려 기억에 남는 옷을 만들라고 부추긴 것일까? 그래서인지 미니멀리즘의 귀환은 소셜에서의 시끌벅적함을 벗어나 기억에 남는 옷을 만드는 데에 방점을 둔다. 모든 게 똑같이 무한 복제되어 널리, 또 빠르게 퍼져 나가는 시대에 ‘기억에 남는 옷’이란 어떤 의미일까?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의 옷장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플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것이 가장 어렵다고들 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부터 줄리아 로버츠까지 90년대 유명 인사들이 보여준 미니멀리즘을 다시금 만끽할 시간이다. 아름답고도 그리운 과거, 그리고 가장 찬란한 지금을 모두 끌어안은 이 트렌드를 두 팔 벌려 환영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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