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기획사들이 소속 아티스트와 자체 제작진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시도가 이어진다. 개개인이 1인 미디어인 시대라면, 기획사라는 울타리는 과연 어디까지 유효할까?
이제 시즌 3 준비에 돌입한 〈프로듀스101〉이 남긴 건 수십 명의 아이돌 외에도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우리나라에 금강산 봉우리만큼이나 많은 연예 기획사가 존재한다는 발견. 연습생마다 달고 나오는 생소한 ‘oo엔터테인먼트’ 이름표, 마지막 순위 발표식 경연에서 라이브 현장에 마련된 ‘소속사 사장님’ 자리는 이 아이돌들 뒤의 회사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삼 일깨웠다. 아이돌은 많고, 데뷔를 꿈꾸는 연습생은 더 많으며, 그 뒤에는 숱한 연예 기획사가 있다. 얼마 전 만난 경력 15년 차의 중견 음악 기획사 부장은 최근 군소 기획사들의 할거가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일을 오래 해오면서 작은 회사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춤과 노래, 연기 등 일정 트레이닝을 시켜야 하는 아이돌 기획사 테두리 밖에서는 더 그래요. 실력 있는 래퍼들이 기존의 기획사에 소속되기보다 단독으로 회사를 차려서 성공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힙합 신에도 1인 회사가 출현하는 추세죠.” 디지털 음원이 대세가 되면서 앨범 기획과 제작에 투여하는 시간과 자본이 줄어들고, 미디어와의 스킨십보다는 서바이벌 쇼 프로그램이나 아티스트들의 SNS로 홍보 채널이 다변화한 가요계에서는 전통적인 연예 기획사보다 더 작고 유연한 조직이 적합할 수도 있다. 소규모로 효율과 수익을 추구하는 작은 기획사들이 늘고 있는 한편으로,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 기획사들은 자본과 영향력, 소속 연예인의 홍보 효과를 활용한 사업을 꾸준히 벌인다. 일례로 YG엔터테인먼트는 올해 드라마 제작 자회사(YG스튜디오플렉스)를 설립했는데, JYP 역시 2013년부터(JYP픽쳐스),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미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던 바(SM C&C)다.
대형 연예 기획사의 비즈니스 영역은 매니지먼트 외에도 다양하다. SM은 거슬러 올라가면 2008년 설립한 노래방 ‘에브리싱’부터 ‘SUM카페’, ‘SMT서울’ 같은 공간을 운영해왔으며, ‘SM 아티움’에서는 아티스트와 연계한 다양한 굿즈를 판매한다. 이마트와의 협업으로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에 어필하는 다양한 협업 상품도 판매한다. YG는 의류(노나곤), 뷰티 브랜드(문샷)를 론칭했으며, 외식 사업(삼거리푸줏간, 쓰리버즈, 케이펍)으로 방콕에 진출했다. 하지만 최근 속도를 높여가는 부분은 단연 콘텐츠 제작이다. 이달 초 JTBC에서는 YG에서 제작하는 새 예능 프로그램을 편성한다고 밝혔다. 양현석 대표가 직접 출연해 다양한 연예 기획사에서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포맷이며, 엠넷에서 〈쇼미더머니〉, 〈프로듀스101〉, 〈언프리티 랩스타〉 등의 프로그램을 만든 한동철 PD가 YG로 적을 옮겨 새로 발표하는 첫 결과물이다. 한동철 전 국장 외에도 MBC 〈라디오스타〉, 〈무한도전〉, 〈진짜 사나이〉, 엠넷 〈음악의 신〉, 티비엔 〈SNL코리아〉 등의 연출자들이 YG 로 대거 이적했다. SM에서도 〈우리 동네 예체능〉의 KBS PD를 영입해〈NCT 라이프〉등을 제작한 바 있다. YG에 들어간 PD들이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아직 발표된 바는 없지만 위너, 블랙핑크 등 소속 아이돌 팀의 리얼리티 쇼, 그리고 YG 남성 연습생 가운데 데뷔 멤버를 가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 역량을 가진 인재들을 확충하고 제작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기획사들은 방송사의 섭외 요청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능동적으로 자기 아티스트들을 활용할 수 있다.
두 달 전 더블유와 인터뷰한 뮤지션 프라이머리는 최근 음원 시장에서 예능 프로그램이 가지는 막강한 힘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얘기한 건 매 시즌 〈쇼미더머니〉나 〈프로듀스 101〉에서 방송을 탄 곡들이 급격히 차트를 점령하는 현상 정도였지만, 사실 예능이 음악 차트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광범위하다. 〈무한도전 가요제〉부터 시작해서 〈언니들의 슬램덩크〉처럼 제작 과정을 방송으로 보여주는 콘텐츠의 경우 파급력이 특히 크다. SM이 대주주로 있는 미스틱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시작한 〈눈덩이 프로젝트〉는 아마 이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기획일 가능성이 높다. NCT의 마크, 박재정, 윤종신, 헨리, 레드벨벳 등 양사의 소속 뮤지션이 출연해 컬래버레이션하는 포맷의 이 프로는 네이버 TV에서 전체 재생 수 1천만 뷰를 넘어섰다. 그간의 드라마 제작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반면 예능 프로그램 출연 및 제작, 음원 발표, 공연까지 연계해서 순환되게 한〈눈덩이프로젝트〉의 성과는 탄탄한 음악 제작 역량을 뿌리에 둔 회사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궁극적인 지향은 연예 기획사를 넘어서 미디어가 되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아티스트로, 우리가 제작해서, 우리 플랫폼에 뿌리고 싶다는 큰 그림이죠.” 익명을 요청한 SM엔터테인먼트의 한 직원은 회사에서 공유하는 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획사가 미디어의 꿈을 꾸는 데 있어 최종적인 문제는 채널이다. 자체 제작으로 콘텐츠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더라도, 기존 방송사를 거쳐 송출하면 편성하는 최종 권한이 결국 방송사에 있고, 완전하게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플랫폼’에 대한 고민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 시대의 콘텐츠는 퍼져 나가는 공기 같은 것이어서 한 군데 담아두는 게 불가능하다. 폐쇄적으로 한 채널, 한 계정에서만 즐기도록 하는 시도가 무의미한 것이다. SM에서는 소속 아티스트들의 사진과 영상을 모아서 볼 수 있게 하는 앱인 ‘바이럴’을 론칭했고, 많은 팬들이 이를 다운로드받아 사용했지만, 결국 팬들이 공유하고 즐기는 공간은 외부의 커뮤니티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콘텐츠들이 이런 식으로 유통된다. SM은 차라리 요즘 인스타그램의 아티스트 공식 계정 운영에 다시 집중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뷰티, 여행 등의 콘텐츠를 활발하게 업로드하는 f(x) 루나처럼 유튜브 채널을 통해 개별 아티스트의 일상과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콘텐츠 역시 앞으로 키워가려는 분야다. 이효리는 컴백 즈음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의 라이브 기능을 통해 이상순, 아이유와의 합주를 내보내기도 했다. <효리네 민박>보다는 단출한 촬영과 소박한 그림이지만 그녀에게서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많은 부분이 그 속에 있었다. 스타가 곧 채널이다.
한때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매체를 ‘뉴미디어’라고 불렀다. 이제는 역으로 신문, 방송 같은 기존의 매체를 ‘레거시(Legacy, 과거의 유산) 미디어’ 라고 부르는 상황이다. SNS를 가진 개개인이 곧 미디어가 되는 시대라면, 연예 기획사가 미디어가 되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셀럽들이 기획사를 통하지 않는 개별 SNS 활동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기획사에서 스타 개인 계정에 대해 특정 브랜드 포스팅에 제약을 두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팔로어 수라는 강력한 영향력을 놓고, 은근한 힘의 견제와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인 것. SNS 시대 미디어와 콘텐츠의 미래에 뭐가 기다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일 것이다.
- 에디터
- 황선우
- 사진
- GETTY IMAGES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