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디지털 파도의 정체는?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도심 한복판, 디지털 파도가 휘몰면

2020-08-02T00:10:50+00:002020.08.02|FEATURE, 컬처|

성난 파도가 도심 한가운데서 굽이친다. 오로지 시각미디어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파도는 ‘자가격리된 파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의 공공미술 프로젝트‘Wave’다.

첫 번째 공공미술 프로젝트 ‘Wave’. 아나몰픽 기술을 통해 평면 스크린 속 실제처럼 굽이치는 파도를 구현했다.

올해 4월, 지하철 삼성역 6번 출구 앞, 가로 81m, 세로 20m 크기의 초대형 디지털 사이니지에선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2면으로 구성된 평면 LED 스크린 속 파도는 화면 너머로 곧 들이닥칠 듯 실제처럼 굽이쳤고, 디지털로 구현된 회색빛 천장엔 파도가 철썩이며 만든 물 자 국이 마르다 생겼다를 반복했다. 매시 정각과 30분마다 전광판 너머로 거세게 굽이치는 이 파도를 본 누군가는 ‘자가 격리된 파도’라는 그럴싸한 주석을 달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구현된 디지털 파도는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의 첫 번째 공공미술 프로젝트 ‘Wave’다. 평면 디스플레이 환경 에서 3D 효과를 극대화하는 ‘아나몰픽’ 기술로 구현한 영상은 트위터에 최초로 소개된 지 하루 만에 800만 뷰를 이끌어냈고, 이를 소개한 유튜브 페이지엔 7월 현재 10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려 있다. 그중 가장 많은 공감을 끌어낸 댓글이 있다. ‘서양의 진보적 현대미술이 고작 테이프로 고정한 바나나라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8K UHD LED 스크린 속 구현된 파도라 할 수 있다.’

‘대체 왜?’ 디스트릭트의 ‘Wave’를 보고 처음으로 스친 생각이다. 2004년 국내 1세대 디지털 미디어 디자이너 고(故) 최은석이 설립한 디스트릭트는 초창기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의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에이전시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가장 비싼 프리랜서’라고 불리던 최은석이 설립한 에이전시라는 이유만으로도 화제를 모았고, 이후 인터페이스와 디스플레이가 다변화되는 산업 환경에 발맞춰 2008년부터는 홀로그래피 디스플레이, 프로젝션 매핑 등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마케팅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2011년 개장한 세계 최초의 4D 아트 파크로, 국내외 디자인 신에서 화제를 모은 ‘라이브파크’도 이들 의 작업이다. 커머셜 디자인 워크를 전문으로 제작하던 기업은 그렇게 갑작스레,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그로 인한 반향이 생각보다 폭발적이었다는 거다. “2016년 정부가 삼성역 일대를 옥외 광고물 자유 표시 구역으로 지정하 면서도심 속 스크린이 점점 늘어났어요. 이런 스크린을 가진 사업자는 일정 비율 이상 공공미술 콘텐츠를 상영해야 하는데, 제 입장에서 그간 상영된 콘텐츠가 좀 불만족스러웠어요. 삼성역 일대는 특히 금요일만 되면 교통체증으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혼잡해지는 지역이에요. 대형 스크린에선 TV나 모바일에서 익히 보아온 광고가 그대로 나오죠. 이를테면 지글거리면서 타오르는 햄버거가 거의 집채만큼 확대되면서 공해에 가까운 피로감을 일으키는 거죠. ‘Wave’는 기존의 옥외 광고 문법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 공간에서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장면을 보여주자’를 목표로 세웠어요. 그렇게 도심이란 장소적 맥락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자연, 파도를 떠올리게 된 거죠.” 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가 말했다.

확실히 ‘Wave’는 이동의 제약으로 멀리 바다로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시간적 맥락과 도심 한가운데서 파도를 본다는 장소적 맥락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프로젝트였다. 4월 처음 상영된 직후 외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뒤이어 국내 매체에서 잇따라 뉴스로 다루며 520일, 결국 재상영이 결정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혀끝에서 맴도는 문장 하나가 있다. 이들의 프로젝트는 디자인과 미술 사이, 그 어느 지점에 위치하나?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그 누구도 절대적인 답을 내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마우 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바나나 작품 ‘코미디언’과 ‘Wave’를 비교하며 남긴 유튜브 댓글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어요. 현대미술은 높다란 성역이 존재하고, 많은 현대미술 작품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죠. 현대미술이라는 테두리로 진입하려는 숱한 시도는 언제나 불순분자 취급을 당한 채 철저히 배제되어온 측면도 있고요. 한편으로는 예술과 디자인 모두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정서적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Wave’와 같은 작업이 현대미술에서 수용할 수 있는 외연을 충분히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성호 대표의 말은 결코 예술에 대한 느슨한 논의가 아니다. 차라리 예술과 디자인, 평행을 이루는 두 개의 직선에서 곡선을 발견 하려는 노력이라면 모를까.

7월 중순 공개를 앞두고 있는 두 번째 공공미술 프로젝트 G‘ iant Toy’.

현대미술에 돌을 던져보려는 디스트릭트의 시도는 8월에도 계속될 참이다. 오는 813일 국제갤러리 K3관에서 진행 되는 전시 <astrict>가 그것이다. 예술(Art)을 강조해 ‘에이 스트릭트’(astrict)라는 이름을 단 일종의 아티스트 컬렉티브로 변신한 이들은 화이트 큐브에 또 한가득 디지털 파도를 일으킬 예정이다. 아나몰픽 기술을 활용해 전시장 바닥과 벽면에 3D처럼 굽이치는 파도를 구현한 후 나머지 3면은 거울로 마감해 전시장에 발을 디딘 관람객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해변에 서 있는 듯한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앞 서 7월 중순부터는 ‘Wave’를 상영한 SmTown 코엑스 아티움에 두 번째 공공미술 프로젝트 ‘Giant Toy’를 공개한다. 훌쩍 커버린 어른들이 유년 시절 갖고 싶어 했던 장난감을 위트 있게 형상화한 영상 작품이다. “신작 ‘Giant Toy’에는 여름휴가에 흔히 들고 가는 갖가지 물건들도 소재로 녹였어요.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현시점에서 지난 휴가를 추억하게 하는 촉매제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처럼 시각미디어 기술은 ‘고립’과 같이 현재 우리가 앓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많은 열쇠 중 하나라고도 생각해요. 나아가 경험의 빈부격차를 없애는 수단이 될 수도 있어요. 상상해보세요. 안경처럼 착용했을 때 불편함이 적은 디지털 디바이스가 가까운 미래에 개발된다면, 우리는 집에서도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은 효용을 누릴 수 있어요. 말인즉슨 과거엔 돈이 있어야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 근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돈이 없더라도 새로운 기술로 인해 얼마든지 그와 유사한, 혹은 버금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죠. ”

트위터와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통해 ‘Wave’를 관람한 인원을 집계하면 1억 명이 넘는 숫자가 나온다. 평면 스크린 속 거세게 움직이는 파도를 본 이들의 대부분은 디자인과 예술이라는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 도시에 있는 건물들 사이를 옮겨 다니는 물리적 이동이 삶의 전부인 요즘을 안타까워하거나, 스크린 이면에 작동 모터를 숨겨 실제 파도를 움직이도록 구현했을 거라는 기묘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애초에 디자인과 예술은 틀 안에 갇힌 무언가가 아니다. 절대불변의 틀을 가장한 퇴행적 시선을 거두면, 도심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파도가 그리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