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반란

임예성

오늘날 패션엔 경계가 사라졌다. 패션계에 하이와 로 패션의 캐주얼한 조우가 무르익자 곧이어 막을 올린 젠‘ 더 플루이드(Gender Fluid)’의 전성시대! 다시 말해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문 자유와 취향의 존중 속에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나를 완성하는 ‘선택과 도전의 시대’가 눈앞에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루이 비통의 16 S/S 여성복 광고 캠페인에서 스커트 차림의 여성복을 입은 채 등장한 제이든 스미스.

17 S/S MEN & WOMEN VETEMENTS

우아한 소매의 실크 프린트 드레스를 입은 채 공연하는 글램 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

짧은 헤어가 주는 강렬한 글램함이 돋보인 생로랑의 16 F/W 시즌 룩북.

섬세한 레이스 소재의 블라우스를 입고 공연한 프린스.

15 F/W MEN VFILES

17 S/S MEN & WOMEN VETEMENTS

“난 남성복과 여성복을 나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그걸 두려워하는 이와 편안해하는 이들이 보일 뿐이죠.”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윌 스미스의 아들, 배우이자 뮤지션에서 패션 아이콘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 중인 제이든 스미스가 한 말이다. 평소 스커트를 입은 채 등교하고 탑샵 매장에 여성복을 쇼핑하기 위해 들르는 열여덟 살의 이 개성 강한 소년은 이미 지난 S/S 시즌 루이 비통의 여성복 광고 캠페인에 모델들과 함께 등장해 화제를 모으며 ‘치마 입는 남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에 루이 비통의 수장인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고정관념이나 성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세대를 대변하고 있다”며 그를 선택한 이유를 밝히기도.

물론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도 간혹 쇼의 피날레나 이벤트 현장에서 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놀라움을 안겨줬지만, 그건 패션계의 별난 괴짜가 벌이는 기이한 퍼포먼스 정도로 치부되었다. 반면 제이든이 선사한 대중적인 파급력은 엄청나다.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이미지 사이에 단순히 흰 사각형을 아티스틱하게 배치해 1만8천 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는 그이기에. 그런데 지금의 경향은 80년대 흰색 러플 블라우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공연한 프린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나 90년대 유니섹스의 쿨함을 즐긴 세대가 만끽한 그것과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즉, 이번 판은 양성의 앤드로지너스나 유니섹스의 컴백이 아니란 뜻이다. CNN과 <뉴욕 타임스> 등에서 명명한 오늘날의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는 서로의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차용하는 남녀 혼성이 아닌 ‘나는 나대로’의 마인드를 설파하는 무성, 즉 젠더의 결여에 가까운 개념이다. 핵심은 언제, 어디서나 선택적으로, 그때그때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차용해 ‘나다움’을 만들어낸다는 유연성에 있다. 유연함을 뜻하는 ‘플루이드’란 단어에서 느껴지듯 내가 원할 때 제한 없이 선택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오가며 자연스레 나의 스타일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차이가 아직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디자이너 조너선 앤더슨이 로에베의 수장으로 선보인 첫 컬렉션인 15 S/S 남성 컬렉션의 ‘공유하는 옷장(Shared Wardrobe)’이라는 콘셉트를 떠올려 볼 것. 조너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새로운 컬렉션을 소개했다. “기존의 유니섹스 아이템이 남녀 모두를 위해 디자인된 반면, 이건 누구든 아름다울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젠더리스는 남자에서 여자로, 혹은 여자가 남자의 아이템을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이번 컬렉션의 방향은 바로 남자가 입고 싶은 여자 옷, 여자가 들고 싶은 남자의 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이든 스미스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가 스커트를 입는 이유는 여자답고 싶어서가 아닌 그저 자신답게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라도 입고 싶은 멋진 스커트라면 안 입을 이유가 없다는 당당함으로 그는 자신의 생각이 나쁘거나 틀리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조너선 앤더슨이 선보인 첫 로에베 남성 컬렉션은 남녀 모두가 공유하는 옷장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흥미로운 광고 비주얼을 선보였다.

조너선 앤더슨이 선보인 첫 로에베 남성 컬렉션은 남녀 모두가 공유하는 옷장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흥미로운 광고 비주얼을 선보였다.

영민한 젊은 디자이너 조너선 앤더슨은 WWD와의 인터뷰를 통해 또 하나의 시사점을 남겼다. “물론 옷이 중요해요. 하지만 옷에는 어떤 이미지들이 수반됩니다. 이를테면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어떤 캐릭터인지, 혹은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났는지 등 말이죠. 옷을 통해 점차 더 많은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스토리’가 담겨 있지 않은 드레스나 가방은 이제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가 말한 스토리는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 다시 말해 강렬한 캐릭터를 부여한다.

이러한 맥락은 오늘날 브랜드의 모델 캐스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례로 유명한 모델 에이전시의 캐스팅 디렉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오늘날 SNS가 띄운 셀렙 모델이든 혹은 베트멍과 고샤 루브친스키 덕에 주가를 한껏 높인 동유럽 모델이든, 중요한 건 사람들이 기대하는 스토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최근 주요 광고 캠페인과 쇼를 막론하고 가장 핫한 러브콜을 받는 모델 나탈리 웨슬링의 경우, 일반적인 것을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매력적인 빨간 머리 모델의 계보를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아바타처럼 보이는 독특한 페이스를 지녔으며, 스케이트 마니아로서 최근 ID 매거진과 함께 현대 여성의 가이드를 주제로 한 스케이트 보딩 에티켓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그 말은 이제 몸매 좋고 예쁘기만 한 모델은 매력을 끌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모델에게 요구되던 미덕의 경계 역시 허물어진 것. 그런가 하면 지난해 에디 슬리먼이 지휘한 생로랑 크루즈 컬렉션 광고 캠페인에는 마치 갓 입대한 군인 같은 보송보송한 헤어스타일을 지닌 모델 루스 벨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흑백의 감도 높은 비주얼 속에서 그녀는 에디 슬리먼 특유의 그런지 룩을 입은 채,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그런데 과연 빡빡 깎은 머리가 매스큘린한 이미지만을 상징할까. 오히려 남성다움을 차용했다기보다는 여성다움의 상징인 긴 머리를 포기한 채 성의 모호한 경계에 선 그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토리, 나아가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어필하며 이내 빡빡이 모델 신드롬을 낳았다.

NEW YORK, NY - JUNE 06: Creative director of Gucci Alessandro Michele attends the 2016 CFDA Fashion Awards at the Hammerstein Ballroom on June 6, 2016 in New York City.  (Photo by Jamie McCarthy/Getty Images)

부드러운 분홍색 슈트로 로맨틱한 카리스마를 선보인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지난해 초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 젠더 플루이드 현상의 선봉에선 건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지극히 새로운 관능의 시대를 연 알레산드로 미켈레였다. 그는 지난해 1월, 구찌의 남성복 컬렉션 데뷔 무대에서 하늘거리는 보 장식 블라우스와 레이스 장식의 시스루 톱을 입은 남성 모델을 등장시키며 화두를 던졌다. 이는 바닷가의 강렬한 햇살 아래, 터질 듯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남정네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내기도 한 전설적인 사진가 허브 리츠가 보면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풍경이었다.

이윽고 한 달 뒤에 이어진 구찌의 여성복 데뷔쇼에서도 그는 그 성적 경계가 모호한 여린 들꽃과 같은 남녀 모델들을 캐스팅했으며, ‘꽃무늬는 남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드러내듯 곱디고운 꽃무늬 슈트를 입은 남자 모델을 등장시켜 시선을 모았다. 나아가 그는 “남녀 컬렉션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그렇다”라고 말하며 2017년부터 남녀 쇼를 통합해 선보일 예정이라고 공표했다!

16 F/W WOMEN VETEMENTS

16 F/W WOMEN VETEMENTS

더구나 뎀나 바잘리아의 뮤즈이자 오른 팔인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 역시 베트멍의 2016 F/W 컬렉션에서 독창적인 매력을 뽐내며 오프닝 모델로 등장했으니 뭐, 더 할 말이 있으랴. 더구나 뎀나는 자신의 역사적인 발렌시아가의 데뷔 쇼에도 중성적인 외인부대 같은 ‘어글리 뷰티’를 고고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무대에 입성시키며 새로운 스타일의 기준, 즉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한층 자유롭고 친근하며 쿨한 이미지를 강렬하게 선보였다. 가장 미래적인 비전을 갖고 동시대 패션을 이끈다고 평가받는 베트멍의 수장 뎀나 바잘리아. 그를 얼마 전 파리에서 만났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중의 하나는 모델 캐스팅과 옷에 담긴 젠더 플루이드 현상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인상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날은 성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다. 여자가 팬츠를 입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 아닌가. 오늘날 여성들은 팬츠를 살 것인가, 스커트를 살 것인가를 두고 더는 고민하거나 자신의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옷을 볼 때면 자신의 ‘독자성’과 스타일을 더 염두에 둘 뿐이다.” 트렌드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뿐 브랜드 저마다의 개별적인 특징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그러므로 앞으로 독자성을 지닌 브랜드만이 살아남을 거라고 단언하는 그의 말에서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 한 자락을 놓을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개성을 더욱 중시해가는 문화 덕에 우리가 보았던 SF 영화 속 장면처럼 남녀 모두가 똑같은 레오타드를 입은
채 우주선에서 지루하게 생활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선보인 젠더 뉴트럴를 주제로 한 ‘Agender’ 프로젝트. 그(He)나 그녀(She)가 아닌 나 자신(Me)이 되자는 메시지를 던지며 흥미로운 디스플레이와 남녀 모두를 위한 의상을 선보였다.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선보인 젠더 뉴트럴를 주제로 한 ‘Agender’ 프로젝트. 그(He)나 그녀(She)가 아닌 나 자신(Me)이 되자는 메시지를 던지며 흥미로운 디스플레이와 남녀 모두를 위한 의상을 선보였다.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선보인 젠더 뉴트럴를 주제로 한 ‘Agender’ 프로젝트. 그(He)나 그녀(She)가 아닌 나 자신(Me)이 되자는 메시지를 던지며 흥미로운 디스플레이와 남녀 모두를 위한 의상을 선보였다.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선보인 젠더 뉴트럴를 주제로 한 ‘Agender’ 프로젝트. 그(He)나 그녀(She)가 아닌 나 자신(Me)이 되자는 메시지를 던지며 흥미로운 디스플레이와 남녀 모두를 위한 의상을 선보였다.

지난해 3월,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은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이란 주제로 쇼핑존을 색다르게 변형시켰다. 섹스리스 리디자인이라는 콘셉트로 같은 옷을 입은 앤드로지너스 마네킹 디스플레이를 했으며, ‘Agender(무성)’이라는 단어를 내세운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다. 여기서 이 공간을 구성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페이투굿의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모호한 성은 디자이너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새로운 형태와 실루엣을 탐색하게 만들죠.” 그러니 자신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인간을 위해 옷을 만들고 싶다’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소망은 곧 고정된 성 개념까지도 허무는 표현의 무한한 자유를 뜻하리라. 나아가 대중 역시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 개개인의 캐릭터와 개성에 맞는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고 말이다.

오늘날 대중의 동시대적 욕망을 헤아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비전을 갖춘 명민한 패션 디자이너들은 미래적인 양성성을 회복하거나 여권 신장에 앞서고, 꽃미남과 여전사가 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성적인 것과 여자다운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다양성과 개성에 초점을 맞춘 채 스스로를 찾아가라고 이야기한다. 누구나에게 더욱 많은 시도를 장려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행을 떠나게 만들고, 성별의 유연한 흐름 속에 더욱 흥미로운 스타일을 제한 없이 자유롭게 시도하도록 격려한다.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기 이전의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 여성 혹은 남성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오롯이 존재한 채. 마지막으로 제이든 스미스의 매력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스타일은 창조에 대한 것이고, 한 세대를 입히는 것이자 동시에 한 세대를 돕는 것이며, 또 한 세대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냥 자기 자신이 되세요.”

에디터
박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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