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골목을 거닐었다. 일상에 기분 좋은 자극을 줄 만한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를 만났다.
서울 송리단길 송파동
1_엘리
‘엘리스리틀이태리’라고도 불리는 엘리는 호텔에서 근무하던 4명의 셰프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탤리언 비스트로다. 퇴근길에 가볍게 들러 와인 한 잔, 파스타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공간을 꿈꾸다 석촌호수 변에 2015년 9월 문을 열었다. 하우스 와인을 음료 가격에 제공하는 걸 보면 말뿐만이 아닌 건 확실하다.
2_에브리데이몬데이
비대칭으로 컨테이너를 쌓은 듯한 외관을 알루미늄 철근으로 한 번 더 두른 독특한 형태의 이 건축물에는 일러스트, 아트 토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국내외 작가를 주로 소개하는 갤러리 ‘에브리데이몬데이(Everyday Mooonday)’가 자리한다. 1월 28일까지는 홍콩의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부비 아오 양(Bubi Au Yeung)의 전시가 진행된다. 작가의 캐릭터 트리손(Treeson)은 비록 단순한 형태지만 존재에 대한 철학을 제시해 가볍게 또 진지하게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한다.
3_오늘한밥
송리단길의 아기자기한 카페들을 투어하다 보면 어느새 식사 시간. 코코아, 커피, 당분으로 느끼해진 위장을 달래고 싶다면 석촌호수 대로변 바로 뒤 블록의 ‘오늘한밥’으로 향하자. 당일 도정한 5분, 7분, 9분도 쌀을 섞어 밥을 짓는 퓨전 한식 덮밥집. 몸에는 현미가 가장 좋지만 식감이 떨어져 10분도 이상으로 도정한 흰 쌀밥만 소비되는 게 아쉬워 블렌딩 밥을 기획했다고. 2016년 10월 오픈한 오늘한밥은 2017년에 문을 연 곳이 대부분인 송리단길에서 일찍이 자리 잡은 가게 중 하나. 오가며 석촌호수를 보는 게 이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 즐거움 중 하나라는 대표는 스스로 ‘송리단길 맛집’ 지도를 만들어 블로그에 배포할 정도로 송파에 애정이 크다.
4_라라브레드
오후 4시.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이니 업장이 한가할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몇 분 간격으로 ‘라라브레드(Lala Bread)’의 문은 계속 열렸고 매대의 빵은 빠르게 사라지고 다시 채워졌으며 널찍한 지하 공간은 만석이었다. 갈 만한 동네 빵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했다. 매장 한쪽에 튜브형 잼이 눈에 들어왔다. 맛보기용 블루베리, 딸기, 팔레트 위에 놓여 있었다. 이 가게의 대표 품목인 ‘쫄깃식빵’에 그림을 그리듯 짜서 베어 물었다. 스트링 치즈에 버금가는 식빵의 쫄깃함과 무색소, 무방부제, 무설탕을 원칙으로 전남에서 공수한 원료만을 넣어 만들었다는 잼의 달큰함이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주거 인구가 많은 송파 지역에서 남녀노소 막론하고 사랑받는 빵집이 되고 싶다는 라라브레드의 소망은 지금의 열정을 잃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뤄질 것 같다.
5_카페 마달
‘마달’이 무슨 뜻일까?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지만 박소현 대표의 입에서는 의외의 답이 나왔다.“아무 뜻도 없어요.”이 공간을 발견하고 카페를 열 생각으로 유럽 각지에서 공수한 빈티지 가구를 채워 넣은 뒤 시각적으로 예쁜 폰트와 글자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란다. 하지만 각자의 조합이 완벽한 의자와 테이블,‘카페 마달(Madal)’에만 어울릴 것 같은 귤나무, 여름이면 활짝 열릴 통유리창은 이곳에 올 손님과 자신이 만들어갈 공간에 대해 오랜 시간 깊이 고심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감 좋은 손님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주말이면 꽉 들어찬 손님들로 내부가 복닥거리겠지만 정성스레 매만진 공간에서 풍미 좋은 스페셜 티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날엔 카페 마달이 떠오를 것 같다.
6_이월로스터스 송파점
‘이월로스터스’는 2월과 인연이 깊다. 로스팅 공장을 오픈한 시기가 2014년 2월이었고, 건대점에 이어 오픈한 송파점은 2017년 2월에 문을 열었다. 운영자들이 겨울을 좋아해서다. 바 형태로 설계된 나무 테이블에 앉아 소복이 쌓인 눈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이 가게의 시그너처 커피인 ‘만월 블렌드’를 홀짝이노라면 겨울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듯하다.‘만월’은 보통 2월에 맞게 되는 정월대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매달 시즈널 원두를 선정해 브루잉 커피를 선보이며, 에스프레소의 쌉쌀함과 녹차 파우더의 달큰한 향이 더해진 ‘에스프레소 그린티 라떼’도 인기 메뉴다.
7_얼터너티브 커피로스터스
전신은 상수동의 카페 그런지(Grunge) 였다. 5년간 홍대 상권에서 커피를 만들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카페 문화를 만들고 싶어 한 세 명이 의기투합해 송파동에 자리를 잡았다. 오픈한 지 겨우 두 달째지만 미용실, 부동산, 철물점, 중고 가구점이 즐비한 거리에서 이 카페는 이미 동네 명소가 됐다.“집 앞에 이런 카페가 있어 활력소가 된다고, 여기 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옷을 차려입게 되고 설렌다는 손님이 계세요. 일할 맛 나고 감사하죠.” 상수동에 비해 다양한 연령층이 오가는 송파동 특징을 감안해, 쑥, 단호박, 검은깨가 들어간 스콘을 만들고, 초콜릿과 브라우니의 중간 정도 식감으로 말차쇼콜라테린느를 직접 구워 매대에 올려놓는다. 2018년 첫 시그너처 블렌드는 동명의 색소폰 연주자를 오마주한 ‘폴 데스몬드’.“원래 록을 가장 좋아해서 그런지라 이름 붙였는데, 여긴 록은 안 어울려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재즈를 주로 틀어요. 저에게는 록 대안이기도 하고요.”
8_오린지
인테리어에 힘을 준 카페도 좋고, 커피에 자부심이 강한 카페도 좋다. 하지만 가끔 내 입맛을 잘 아는 친구가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간단한 식사나 디저트를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오린지(Oh,Linzi)’가 그렇다. 오린지 사장의 본가는 천안이다. 현재는 복정동에 살고, 공간을 물색하던 중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의 이곳을 발견했다. 주변에 천안 출신의 친구 몇이 카페나 밥집을 하고 있거나 열 계획이라 오린지의 근방이 송리단길 대신 ‘천사(천안 사람들)거리’로 불려도 재밌겠다며 웃었다. 식사 대용 샌드위치인 타마고산도는 일본 여행 중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더듬어 출시했고, 예쁘지만 하나 이상 먹기 힘든 마카롱은 흑임자, 쑥, 미숫가루 등의 재료를 더해 만들어냈다. 쑥이 들어가 고소함이 일품인 미도리 라떼도 안 마시면 서운하다.
터줏대감 인터뷰
김효남 엘리 헤드 셰프
‘송리단길’은 송파 지역에 지난 2년새 소규모 카페나 콘셉추얼한 식당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블록을 지칭하는 말로 석촌호수와 석촌역 사이의 송파 1, 2동 주변이 그 상권에 포함된다. 송파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석촌호수의 풍광과 벚꽃 시즌의 특수, 롯데몰 고객들의 유입을 기대하고 자리를 틀었다. 김효남 엘리 헤드 셰프도 그들 중 하나다. “석촌호수 대로변에 큰 규모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선 지는 꽤 됐어요. 기본 상권은 형성돼 있던 셈이죠. 하지만 트렌디한 분위기는 없어서 뒤쪽 블록 골목을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로변에 비해 1/5 이상 저렴한 월세도 골목 상권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일조했다. “권리금이 없는 곳이 제법 있어요. 그런 곳은 소자본으로 창업 가능한 카페를 하려는 분에게 아주 매력적이죠. 저희도 상대적으로 월세가 낮은 덕에 식재료에 좀 더 투자하고 메뉴 개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어요.” 주변 카페의 음료값도 서울 지역의 물가를 감안했을 때 결코 비싸지 않다. 그 때문인지 주거와 사무실 지역이었던 송파동 근방에 최근 타 지역 20, 30대 커플이 많이 늘어났다고. 근방에 살지 않아도 카페와 맛집을 찾아 일부러 송파동에 온다는 뜻이다. 골목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시야에 롯데타워가 들어왔다. 매일 이 장면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위협적으로도 느껴지는 저 고층 건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김효남 셰프는 ‘송리단길’ 이라는 단어에 반감은 없는 눈치였다. 아직 가까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체감한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니 안도감마저 들었다. 젊은 세대가 상권에 들어와 이런저런 가게를 여는 요즘에 대해서는 반색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적이고 자기 일에 욕심이나 애정도 많은 것 같아요. 가게 앞만 살펴봐도 알아요. 주변 정돈도 잘되어 있고 골목에 활력을 주죠. 그런 이웃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 프리랜스 에디터
- 신정원
- 포토그래퍼
- 이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