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의 크리에이터들은 요즘 어떤 곳에서 일을 하고 일상을 보내고 영감을 얻고 파티를 벌일까. 서울에 새롭게 등장한 공간들의 문 안쪽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PKM 갤러리
첫인상은 과묵한 편이다. 출입문 하나, 창 하나가 나 있는 게 전부인 파사드는 내부에 대해 별다른 단서를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피케이엠 갤러리’라는 은색 글씨 옆으로 걸어 들어갔더니 널찍한 전시장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축대가 있던 자리였어요. 두부 자르듯 네모나게 파내면 높은 층고가 나오겠구나 생각했죠. 대형 작품의 전시에 대비해 천장을 키워야 했거든요.” 박경미 대표의 설명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면 잔디 마당과 면한 카페가 나온다. 현재의 2, 3층에 해당하는 공간은 원래 1960년대에 지어진 주택이다. 그 건물을 카페와 사무실 용도로 개축하고, 축대를 깎아내 만든 전시장과 연결해 신 사옥을 구성한 것이다. 꽤나 규모가 큰 공사여서 허가를 받고 일정을 마무리하기까지 약 2년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래도 완성된 모습을 보면 괜한 기다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옛 가옥의 구조를 살린 내부도 뜯어볼수록 재미있지만 더욱 매력적인 건 잔디 마당 위에서 마주하는 서울의 풍경이다. 지대가 높기도 하거니와 청와대와 인접 한 위치여서 시야를 가로막는 고층건물 따위는 주변 에 당연히 없다. 멀리 남산타워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 은근히 호젓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다소 섭섭할 수도 있는 사실은 이렇듯 근사한 경관을 품은 카페가 현재는 멤버십으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점. 지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높이가 있다 보니 인원 통제가 되지 않을 경우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부득이하 게 내린 결정이다.
박경미 대표가 피케이엠 갤러리의 사옥을 새로 지으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또 하나는 주변과의 조화였다. “고궁의 돌담 같아 보이면서도 현대적인 외관이었으면 했어요. 요란하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나름의 캐릭터는 분명하길 바랐고요.” 내부를 샅샅이 둘러본 뒤 다시 회색의 파사드를 대하자 최초의 인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말이 없다기보다는 감추고 있는 이야기가 많은 디자인에 가까운 듯했으니까.
신도시
각종 공구나 전기 부품을 판매하는 수표 동의 해묵은 상가에 다소 이질적인 공간이 비집고 들어섰다. 청계천 옆 낡은 건물 의 꼭대기 층에 자리를 잡은 신도시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이자 인디 뮤지션들의 공연장이며 누구든 편하게 들러 가볍게 취할 수 있는 바(Bar)이기도 하다. 사진가 이윤호와 함께 이곳을 운영 중인 미술작가 이병재는 이태원이나 홍대앞처럼 이미 북적대는 지역은 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종종 이 부근을 찾곤 해요. 저 역시 그렇게 오가다 이 건물을 발견했고요.” 낮과 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동네라 는 점도 그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근처에서 일하는 분들은 해가 질 때쯤 거의 퇴근하거든요. 그러면 주위가 조용하고 한산해지죠.” 즉, 모여들어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인근의 서울극장 건물로 옮겨오기도 했다. 고전 영화를 감상한 뒤 신도시로 이동해 음악과 술을 즐기는, 썩 괜찮은 저녁 한때를 종로에서 계획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사용 중인 공간은 원래 전기학원이 있던 자리였다. 별다른 구조 변경은 하지 않았고, 인테리어 역시 이윤호와 이병재 가 직접 맡았다. 한약방의 약재 서랍장부터 오래된 소파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다 재활용했는데, 거의 설치미술처럼 보일 지경이다. 아티스트들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특히 시선을 끄는 건 천장에서 번쩍 이는 네온 간판이다. 오브제로도 흥미롭 지만 신도시라는 단어의 어감 또한 마음에 들어서 아예 이곳의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오래전 영업을 종료한 어느 식당 앞에 붙어 있던 글자들이 이렇게 다시 불을 밝히게 됐다.
아직까지는 술 한잔을 위해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앞으로 이곳의 용도는 좀 더 다양해질 듯하다. 신청자를 모집해 낮 동안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멤버십 제도는 7월 초부터 시작됐다. 옥상의 건물 외벽을 스크린 삼아 비디오아트나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소규모 출판과 독립 음반 제작을 하며 그 판매처로 활용하 겠다는 구상까지 세워둔 상태다. “일종의 레이블처럼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거 든요.” 이병재가 덧붙인 말이다. 오래된 풍경 안에 네온 간판을 반짝이며 들어선 신도시는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밤이 기울도록 파티를 벌일 수 있는 장소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 언더스테이지
현대카드는 ‘딴 짓’을 무척 열심히, 그리고 잘하는 기업이다. 슈퍼콘서트부터 테마별 도서관 설립까지, 문화 마케팅의 규모와 질이 워낙 인상적이라 가끔은 이 금융회사의 본업이 헷갈릴 지경이다. 지난 5월 개관한 뮤직 라이브러리와 언더스테이지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킨 프로젝트다. 음악 팬들이 특히 반가워한 건 아무래도 2층의 자료실이다. 1만여 장에 달하는 바이닐과 3천 권이 넘는 서적, 그리고 <롤링스톤> 매거진 전권 컬렉션 등을 마음껏 열람할 수 있다니 덥썩 물지 않고는 못 배길 인심이다. 오랜 역사를 버틴 뒤 다시금 가장 새로운 매체로 부상한 LP에 집중한 점에서도 이 공간은 특별하다. 음악이 무형의 음원으로만 소비되는 시대에, 공들여 디자인한 커버 아트를 살피며 거추장스 럽게 턴테이블을 작동시켜 잡음 섞인 사운드를 감상하는 물리적인 경험은 새삼스러운 감흥을 준다.
지하로 내려가면 컨테이너 형태의 스튜디오와 소규모 공연장인 언더스테이지가 이어진다. 현재 일부 신인 뮤지션들이 시험적으로 이용 중인 합주실과 미디 작업실은 효율적인 운영 방식이 정리되고 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한편 유희열, 윤종신, DJ 소울스케이프, 김수로 등의 큐레이터들은 언더스테이지의 프로그램이 충실하게 채워지도록 조언을 보탠다. 이 건물은 곡을 만드는 것 부터 연주를 감상하는 것까지, 음악을 즐기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망라하는 놀이터에 가깝다.
실내 디자인에서는 각 공간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도록 신경을 쓴 눈치다. 포르투갈 출신 아티스트 빌스의 그라피티는 복층 형태로 뚫린 지하 1층과 2층 사이를 관통한다. 지상 2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작업은 라이브러리와 언더스테이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연결 고리다. 또 대지의 절반을 과감하게 비워둔 디자인 덕분에 이태원 주변의 풍경은 건축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포섭된다. 이곳의 목적은 다양한 음악적 취향의 공존과 소통이다. 건축의 구조는 이러한 콘셉트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