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튀르 에볼루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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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가 한땀 한땀의 정교한 장인 정신만 대변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번 시즌, 파리 오트 쿠튀르 현장은 하이패션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각축장이었으니까. 모던한 소재와 액세서리의 믹스 매치, 미니멀리즘을 표현한 칼 같은 재단과 조형적인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이 네오 쿠튀르의 축은 오늘날 쿠튀르의 새로운 고객층으로 급부상한 젊은 VIP들의 취향을 두루 만족시키며, 21세기 쿠튀르의 새로운 도약을 알렸다. 그러니 여기 감각의 한 수를 보여주는 디자이너들의 새롭고 흥미로운 시각이 담긴 모던 쿠튀르, 그 진화하는 패션의 현재를 느껴보길!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와 베르사유의 만남.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이번 오트 쿠튀르 쇼를 통해 이 두 주인공의 기능적인 미니멀리즘과 화려한 로코코풍의 장식미라는 상반된 가치의 아름다운 충돌을 보여주었다. 특히 신선했던 건 르코르 뷔지에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빌라 사보아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콘크리트 벽으로 만든 심플한 무대 장치. 그간 초특급 슈퍼마켓이나 아트 갤러리를 연출하며 그랑팔레를 가득 채운 그의 전작에 비하면 지극히 단조로웠지만, 주얼 장식과 어우러진 콘크리트 소재와 라미네이트를 입힌 레이스 등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소재의 등장은 흰색의 순수로 채워진 콘크리트 벽 앞에서 보다 설득력을 더했다. 간결하고 모던한 실루엣의 룩들은 직각의 어깨선, 코르셋으로 조인 허리 라인, 새장 위에 천을 늘어뜨려 만든 봉긋하게 솟은 볼륨감 등과 어우러지며 때론 부드럽고 때론 강인하게 직선과 곡선의 교차점을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여기에 프랑스식 블루머와 후작 부인의 룩을 연상시키는 볼륨감을 더한 리틀 드레스, 콘크리트 소재의 단추가 달린 프록코트, 이브닝 룩을 위한 긴 트레인 장식의 엠파이어 드레스가 베르사유의 환영을 황홀하게 묘사했다. 나아가 발목을 묶은 보 장식의 시크한 플립플롭 슈즈로 젊은 VIP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칼 라거펠트의 실험은 ‘변화 없이는 진화할 수 없다’는 패션의 명제를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이번 쿠튀르는 극도의 모던함을 이끌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동시에 패션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라프 시몬스의 말처럼 디올 쇼에는 매우 모던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일례로 지난해 ‘쿠튀르의 해방’을 외친 그가 패션사에서 찾아낸 점프수트라는 스트리트 패션의 부산물을 아리따운 꽃들로 치장한 고고한 쿠튀르 무대에 등장시켰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쿠튀르 정신을 저버린 건 아니다. 그에겐 건축적인 실루엣을 적용한 또 다른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여인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는 엉덩이 부분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드레스, 고풍스러운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자수 장식과 잘록한 허리 라인이 돋보이는 프록코트. 이들은 더없이 우아한 오트 쿠튀르의 취향과 무슈 디올의 뉴 룩에 밴 실루엣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켰다. 한편 채도를 한껏 높인 원색의 컬러 팔레트를 활용한 팬츠 룩 역시 라프 시몬스의 ‘모던 쿠튀르’에 대한 명쾌한 시선과 해답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만약 장 폴 고티에에게 쿠튀르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아마 자신의 팜므 파탈을 향한 애정과 상상력이 쇼적연출을 넘어 견고한 테일러링과 장인 정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답하지 않을까. 이번 시즌 고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뱀파이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며, 서늘한 관능미를 드러낸 핏빛 시퀸 드레스와 검정 테일러드 턱시도 수트, 밀푀유를 보는 듯한 겹겹의 오간자 드레스 등을 선보였다. 또한 마릴린 맨슨을 연상시키는 메이크업에 과장된 몸짓으로 등장한 그의 뮤즈들은 후드 장식 톱이나 트랙 팬츠와 같은 캐주얼한 요소들마저 강인하고 글래머러스하게 소화했다.

아르마니는 사실 붉은색과 그다지 친밀한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그는 주로 회색과 검정, 혹은 신비한 미드나이트 블루와 옅은 애플그린 색상 등으로 그의 뮤즈들을 유혹했다. 그런데 이번 쿠튀르 쇼가 막을 올리자 큼직한 검정 래커 박스가 열리며 고혹적인 붉은빛의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경쾌함, 포멀함과 캐주얼함, 이브닝과 데이 웨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르마니 프리베 특유의 테일러링을 강조한 룩이 런웨이를 가득 채웠다. 조형적인 디자인의 짧은 팬츠가 어우러진 트라페즈 실루엣 재킷의 소매는 우아하게 부풀려졌고, 간결한 실루엣의 코트나 재킷은 지퍼를 반쯤 올려 연출되었다. 그런 한편 강렬하게 반복된 도트와 줄무늬 등의 기하학적인 패턴, 아티스틱한 붓 터치, 그물 형태의 그래픽적 요소들은 팝아트적이 고 생동감 넘치는 기운을 더해주었다.

“50년대 쿠튀르를 사랑해요. 내게 있어 그건 완벽한 커팅과 구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니까요.” 약 2년 전, 아틀리에 베르사체의 쿠튀르 컬렉션을 재개한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자신만의 글램한 방식으로 쿠튀르 쇼를 이끌어오고 있다. 이번 시즌 역시 예외는 없었다. 다만 쇼에 초대된 제니퍼 로페즈를 겨냥한 듯 한층 더 모던한 해석이 돋보였는데, 이를테면 조형미를 더한 코르셋 실루엣의 상의에 버클이나 메탈 장식의 가죽을 덧댄 것이 대표적인 예. 또 와일드한 방식으로 가죽 장갑을 매치하고, 스커트엔 과감한 슬릿을 넣거나 허리 부분을 노출한 컷아웃 효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관능적인 베르사체 우먼을 완성했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박연경(Park Youn Kyung)
포토그래퍼
jason Lloyd-Evans
기타
PHOTOS | BENOIT PEVERELLI(CHANEL), FREDERIQUE DUMOULIN(MAISON MARTIN MARGIELA), EDOUARD CAUPEIL(MAISON MARTIN MARGIELA), COURTESY OF INDIGITAL, ARIMANI PRIVE, ATELIER VERSACE, CHANEL, DIOR, MAISON MARTIN MARGIELA, SCHIAPARELLI, VALEN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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