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정연두가 판타지와 현실, 패션과 일상의 얼굴을 나란히 포착했다

배경 사진의 진주 장식 스윔수트와 니트 소재 재킷, 크기가 다른 진주를 겹쳐서 연출한 목걸이, 그리고 향수병 모티프의 체인 백은 모두 Chanel 제품.

배경 사진의 진주 장식 스윔수트와 니트 소재 재킷, 크기가 다른 진주를 겹쳐서 연출한 목걸이, 그리고 향수병 모티프의 체인 백은 모두 Chanel 제품.

 

JUNG YEON DOO

꿈과 환상은 정연두의 작업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주제다. 하지만 작가의 진짜 관심사는 그럴듯하게 구현된 판타지가 아니라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인 듯하다. 판타지가 없는 사실은 건조하며 사실이 없는 판타지 역시 공허하다고 말하는 그는 꿈을 통해 애틋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더블유와의 협업을 위해 정연두는 모델의 두 가지 모습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았다. 꾸며진 패션 화보 속의 이미지일 때와 맨 얼굴로 자신의 옷을 입고 섰을 때 피사체는 같으면서도 다른 인물이다. 패션이라는 판타지는 정연두의 사진 안에서 사려 깊게 해체된다.

배경 사진의 검정 미니 드레스와 초커형 목걸이는 Saint Laurent 제품.

배경 사진의 검정 미니 드레스와 초커형 목걸이는 Saint Laurent 제품.

 

배경 사진의 화려한 비즈 장식의 브라톱은 Prada, 기하학적인 패턴이 돋보이는 스커트는 Mary Katrantzou by Mue, 이카트 패턴의 조형적인 뱅글은 Hermes 제품.

배경 사진의 화려한 비즈 장식의 브라톱은 Prada, 기하학적인 패턴이 돋보이는 스커트는 Mary Katrantzou by Mue, 이카트 패턴의 조형적인 뱅글은 Hermes 제품.

 

배경 사진의 파스텔 톤의 이브닝드레스는 Escada, 해골 모양 손잡이가 독창적인 클러치와 금빛 팔찌는 모두 Alexander McQueen, 조형적인 헤드피스는 Due Filo 제품.

배경 사진의 파스텔 톤의 이브닝드레스는 Escada, 해골 모양 손잡이가 독창적인 클러치와 금빛 팔찌는 모두 Alexander McQueen, 조형적인 헤드피스는 Due Filo 제품.

더블유와의 작업은 ‘내 사랑 지니’ 시리즈를 뒤집는 발상 같기도 하다. ‘내사랑 지니’가 사진으로 피사체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프로젝트였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모델이 입고 있던 판타지, 즉 패션을 벗겨내는 쪽을 택했다.
사진이란 매체를 가장 대중적으로 활용하는 분야가 패션이다. 예술로서 사진을 찍는 나 같은 사람의 작업이 패션 잡지에 실린다면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했다. 트레이시 에민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침대 위에 빈 술병과 사용한 콘돔 등을 흩뿌려둔 작업을(‘나의 침대’)
테이트 갤러리에 설치했을 때다. 한 남자가 그 위에 벌거벗은 채로 올라서서 한참을 뛰었다는데 미술관 직원들이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작품의 일부라고 착각한 거다. 어떤 문맥이 이미 존재한다면 전혀 다른 걸 해도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내 작업도 패션지에 실릴 경우, 다른 사진과 변별성을 지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피하는 대신 차라리 패션을 나름대로 다루자고 생각했다. 패션이라는 게 대체 뭔지, 옷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주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모델에게 자신의 일상복을 챙겨와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기존의 화보와 나란히 세운 채로 촬영을 했다. 꾸민 모습과 꾸미지 않은 모습, 연출과 연출되지 않은 상황, 패션과 패션이 아닌 것을 배치시킨 셈이다. 두 이미지의 공통점인 사람을 그래서 더 잘 볼 수가 있다.

정연두의 작업에서 판타지는 상당히 빈번하고 중요하게 언급된다. 꿈, 혹은 판타지라는 소재의 어떤 점이 그토록 흥미로운가?
꿈이나 판타지 자체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세상을 달리 보는 시선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사진은 굉장히 기록적인 작업이다. 그럴듯한 기교로 이미지를 꾸미는 대신 셋업을 사실적으로 노출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판타지가 없는 사실은 건조하고, 사실이 없는 판타지는 공허하다. 두 가지가 다 공존해야 한다.

대단히 수공예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방식으로 판타지를 구현한다. 한 인터뷰에서 사용하는 도구의 기술적인 면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한 걸로 기억한다.
관심이 있다. 왜 없겠나. 다만 기술에 의해 시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 시각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을 이용하는 게 중요하다. 영국 유학 시절, 코넬리아 파커라는 작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잘못 이해한다는 뜻이에요.” 본인의 지식과 기술에 대한 신뢰가 지나치게 크면 뭐든 그걸 이용해 해결하려 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구현 방식을 다양하게 고민하고 아마추어처럼 배워가는 사람이 매체를 더 자유롭게 다루지 않을까?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내용 때문에 표현의 가능성을 한정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판타지를 CG로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관객으로서도 큰 흥미를 못 느끼는 편인가? 컴퓨터그래픽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걸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데 집착하다 보면 잃는 것도 많다. 1990년대 말에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정말 열심히 읽었지만 영화에는 실망을 했다. 너무 직접적이고 말초적인 체험인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어린 시절 시청한 인형극 프로그램이 환상을 담는 데는 더 적합한 형식이라고 본다. 상상은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해
서 사람들에게 더 자극이 되는 건 아니다.

3월 13일부터 플라토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어떤 작업을 볼 수 있을까?
<Spectacle in Perspective,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라는 긴 제목이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재해석해 만든 ‘베르길리우스의 통로’라는 작품을 로비에서 오큘러스 리프트(3D 가상현실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로 보여줄 계획이다.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죽음 앞에 공평하게 놓인 인간 군상을 묘사한 작업이다. 이와 상치되게 미술관 가장 안쪽에는 크레용팝이 언제든 와서 게릴라 콘서트를 할 수 있도록 무대가 설치된다. 크레용팝 팬클럽인 ‘팝저씨’들은 미리 와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했다. 남성 50여 명의 우렁찬 코러스가 곁들여진 MR 4곡이 전시장에 울려 퍼질 것이다. 사회적으로 여러 압박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들이 추리닝 차림의 키 작은 여자 가수들에게서 힐링을 얻고,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합창으로 응원하는 데서 현대인의 외침 같은 걸 들었다. 그리고 도쿄 고급 브랜드 숍의 점원들 사진, 상록타워라는 아파트에 사는 서른두 가구의 가족 사진, 짜장면을 배달하는 청소년 사진 등이 무겁고 가벼운 작품들 사이를 채우게 된다.

Artist / Jung Yeon Doo
 

1. 모델 세라를 둘러싸고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혜영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연이 교대로 심혈을 기울여 작업 중. 그 결과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첫 번째 룩이 완성되었다. 2. 특별한 화보를 위해 해외 본사에서 직접 쇼피스들을 공수했다. 그 중 런던에서 온 알렉산더 매퀸과 밀란에서 온 에밀리오 푸치의 쇼피스들. 3. 모델과 교감하는 포토그래퍼 유영규의 프로 정신! 더 없이 감도 높고, 아름다운 컷이 완성된 데 그의 하이패션적인 안목과 열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4.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의 작업 현장. 대형 인화된 화보컷 앞에 선 모델 세라를 향한 작가님의 열정적인 자세와 고민이 결과물에 오롯이 묻어 난다. 5. 새벽을 가르며 가열차게 진행한 16컷의 화보 촬영이 끝나고, 고마운 컨트리뷰터들과 함께.

1. 모델 세라를 둘러싸고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혜영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연이 교대로 심혈을 기울여 작업 중. 그 결과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첫 번째 룩이 완성되었다. 2. 특별한 화보를 위해 해외 본사에서 직접 쇼피스들을 공수했다. 그 중 런던에서 온 알렉산더 매퀸과 밀란에서 온 에밀리오 푸치의 쇼피스들. 3. 모델과 교감하는 포토그래퍼 유영규의 프로 정신! 더 없이 감도 높고, 아름다운 컷이 완성된 데 그의 하이패션적인 안목과 열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4.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의 작업 현장. 대형 인화된 화보컷 앞에 선 모델 세라를 향한 작가님의 열정적인 자세와 고민이 결과물에 오롯이 묻어 난다. 5. 새벽을 가르며 가열차게 진행한 16컷의 화보 촬영이 끝나고, 고마운 컨트리뷰터들과 함께.

<화보 비하인드 스토리>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유영규 스튜디오로 향하면서도 머리 속은 복잡했다. 단순한 협업을 넘어 패션과 예술이 서로 메시지를 교감하는 화보, 그리고 패션에서 출발해 예술로 마무리 될 수 있는 화보는 어떻게 구상해야 할까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사진에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닌 포토그래퍼에게 본인의 사진이 크리에이티브한 아티스트들에 의해 어떻게 재해석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줘야 했기에 더욱 더 설득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패션 화보팀이 스타트 지점에서 최선을 다해 뛰고 아티스트에게 바톤을 넘겨준다면, 다시 말해 우리의 작업이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자유로운 형태의 예술로서 결승점에 들어온다면 그걸로 만족하자는 것으로 명쾌하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의도가 이러하기에 화보 촬영 스태프들도 최대한 즐겁고 자유롭게 표현해 보자는데 서로 의견을 모았다. 예를 들어 총 16컷에 이르는 방대한 컷의 배경과 조명, 헤어와 메이크업, 그리고 모델의 애티튜드를 다양하게 변화해가며 촬영하기로 한 것. 이를 위해 유연하고 순발력 좋은 최고의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가졌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단 한 컷의 결정적인 이미지와 몇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이혜영, 원조연 실장은 에디터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드디어 촬영 시작! 모델인 세라는 우리의 고민들이 무색할 정도로 툭툭, 특유의 감도 높은 표현력으로 충분히 멋진 뮤즈가 되었다. 새벽까지의 노곤한 촬영이 끝났고, 화보팀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일주일 뒤 작가들에게 결과물을 건네는 순간이 왔다. 국제 갤러리의 박지선, 홍남경, 김정연 큐레이터는 각 결과물을 김홍석, 박미나, 정연두, 홍승혜 작가의 특성에 맞게 나누어 전달했고, 그 중 정연두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화보를 3미터 높이로 대형 인화해 배경으로 설치하고 그 앞에 모델이 자신의 일상복을 입은 채 같은 포즈를 표현했으면 좋겠어요. 전 패션 사진 속 모델이 아닌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세라씨의 모습을 담고 싶거든요.” 이 흥미로운 아이디어에 에디터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촬영을 준비했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촬영 스케줄을 조정해 모델을 섭외하고 스튜디오를 렌탈해 이 기록적인 컷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결코 쉽지 않았던 이번 프로젝트가 가장 순조로울 수 있던 것은 아마 혼자 할 수 없는, 팀워크가 필요한 공동 작업으로서 서로의 입장과 상황에 대해 배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진정성 있는 비주얼과 의미 있는 메시지, 그리고 순수한 즐거움에 대한 모두의 열정이 맞물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패션 화보는 김홍석 작가의 노동의 윤리학에 대한 관점이, 홍승혜 작가의 패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모듈화된 그래픽이, 박미나 작가의 동심 어린 순수함이 화려한 컬러의 딩벳화와 스티커 작업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흥미롭게 빛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화보 이미지를 단순한 소재로 여기며 해체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그 안에 품은 아름다움과 메시지를 존중하며 작업해준 작가들의 우아한 배려와 매너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이로서 패션이 예술이 된 순간, 우리 모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에디터 | 박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