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저편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조금은 유연한 시선으로 나아가는 시간들. 올해 문채원에게 흐른 시간이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속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W Korea> 올해는 유난히 변화가 많은 한 해였죠. 새로운 소속사와 손잡았고, 오랫동안 애정을 품어온 라디오에서 첫 디제이에 도전했어요. 쿠팡플레이 에서는 망가짐을 불사했고, 9월에는 첫 공포 영화 <귀시>에 이름을 올렸죠.
문채원 예전 같았으면 겁나서 못했을 것들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원래 걱정이 많은 편인데, 올해만큼은 ‘그렇게 큰일이 나겠어?’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귀시>의 경우 소재가 굉장히 독특해요. 인간의 욕망을 사고파는 시장 ‘귀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죠. 작품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위험한 거래를 하지만, 현실의 문채원은 어떤 것을 바꾸고 싶나요?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제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성적을 받아 진로를 바꿔볼 것 같아요(웃음). 어릴 때는 발레, 조금 커서는 미술, 그리고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지만, 예체능이 아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삶은 어떨지 궁금해요. 이를테면 첨단 스타트업을 이끄는 대표라든가요(웃음). 현실에선 불가능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꽤 흥미롭잖아요.
이번 작품으로 처음 공포 장르에 도전했어요. <귀시>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작품인가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라 제가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이 적었어서 오히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부딪쳐볼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배우가 전혀 다른 장르에 도전할 때, 그 낯선 얼굴이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걸 통해 그 배우에 대한 상상력이 확장되기도 하고요. 저 역시 <귀시>를 통해 관객분들이 저에 대해 그런 새로운 상상을 해보셨으면 했어요. 그래서 기꺼이 도전하게 됐죠.
올해 일의 영역에서 많은 변화가 있던 만큼, 삶에서도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들어요. ‘요즘 한결 유연해진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참 편안해 보이고 좋아 보여.’
스스로도 느끼는 중이고요?
이런 건 있어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몸이 피곤할 때면 가까운 사람에게 더 실수하게 되더라고요. 그러고 나면 스스로 엄청 자책하는데, 또 금세 잊어요. 그래서 엄마 연락처를 ‘엄마, 짜증 내지 말자!’라고 저장해뒀어요. 전화가 올 때마다 그 문구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 거죠.

효과가 있고요?
놀랍지만, 정말 있어요(웃음). 어렸을 땐 계획한 대로,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이라는 게 언제든 상황이 바뀌고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변화들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제 안에서 어떤 범위가 넓어진 기분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나도 편해지고 주변도 한결 편안해진다는 걸 알게 됐달까요.
차기작은 영화 <노키즈>(가제)죠? 2015년 개봉한 동명의 아르헨티나 코미디를 새롭게 리메이크한 작품이라 들었어요.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 남자가, 우연히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비밀로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예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보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예요. 굉장히 보기 편하고 따뜻한 작품이에요.
2020년 tvN <악의 꽃> 종영 직후 바로 들어간 작품이었는데, <악의 꽃> 속의 ‘차지원’은 울고, 분노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느라 정말 고단한 인물이었죠.
그때는 정말 울고 또 울었죠. 제가 생각했을 때 웃음은 제 2의 화장 같아요. 똑같은 얼굴인데도 웃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악의 꽃>이 끝나고 나서 저 자신도 제 웃는 모습을 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첫사랑의 전형과 순수함을 담은 로코 장르의 <노키즈>에 더 끌린 게 아닌가 싶고요.
“허무함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악의 꽃>에 들어가며 품은 마음이었다 들었어요.
그 당시엔 제 안에 있던 모든 고민을 잠시라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그런 때엔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물로 나 자신을 던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더라고요. <악의 꽃>이 딱 그런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끌렸어요. 그저 연기하는 재미나 회차마다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면서 길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촬영이 장장 7개월이나 이어졌죠. 그걸 다 찍고 나니까 정말 해소가 됐어요. 비워지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작품이었는데, 오히려 좋은 기운으로 가득 채워진 채 끝났어요.

연기가 일종의 치유 장치였던 셈이네요.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그때 그 선택을 하지 말아야 했나,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을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현실이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면 현실적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 고민은 철저히 제가 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죠. 다시 해보는 거예요. 무엇이든 부딪쳐봐야 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악의 꽃>은 그런 마음으로 돌진하기에 너무 좋은 작품이었어요. 제가 작품을 하면서 마지막 촬영 날 운 적이 없는데, 그때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제가 그렇게 울 줄은 몰랐거든요. ‘다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 있구나. 그렇다면 더 갈 수 있겠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악의 꽃>에서 보여준 연기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는 인상이 있어요. 감정의 폭도, 표현의 결도 한층 과감해진 느낌이었달까요.
그땐 조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아까 유연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연기에서도 그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내가 유연하지 못하면 늘 하던 방식, 익숙한 틀 안에 머물게 돼요. 그래서 <악의 꽃>에서는 ‘이번엔 이렇게도 해볼까?’ 하며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어요. 큰 변화를 준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결을 바꾸며 다른 방향으로 열어보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감독님께 먼저 다가가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예전엔 배우라면 모든 걸 다 준비한 채 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른다고 말하는 게 두려웠고요. 그런데 그걸 한번 깨고 나니까 그 자체가 연기의 일부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이후 SBS <법쩐>에 이름을 올리며 냉철한 육군 소령 ‘박준경’을 연기했어요. 커리어 초반 SBS <바람의 화원>, KBS <공주의 남자>, 영화 <최종병기 활>로 ‘사극 퀸’이란 수식을 얻은 데 이어, 시간이 흐르며 <법쩐>을 비롯해 MBC <굿바이 미스터 블랙>, tvN <크리미널 마인드>등을 거치며 장르물에도 강하다는 인상을 남겼어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고 싶은 역할도 조금씩 변하더라고요. 장르물을 관객으로서도 참 좋아하는데, 막상 직접 해보면 상상과는 또 다르잖아요. <법쩐>의 ‘박준경’은 특히 쉽지 않았어요. 그 당시 극본을 맡은 김원석 작가님이 주신 디렉션이 ‘건조하지만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였는데, 그게 처음엔 잘 감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이건 미리 내 연기를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셀프 레코딩을 하며 연습하는 게 쉽진 않지만, 그땐 불안을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비중이 아주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애정이 많이 남아요. 특히 현장에서 함께 호흡한 이선균 선배님의 연기를 보면서 굉장히 놀랐고요. 늘 준비한 걸 하기에도 급급한 제 모습과 달리 어떤 자유분방함이 연기에 묻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은 연기에 정답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연기’는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방금 얘기한 자유분방한 연기는 문채원이 추구하는 결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라이언 고슬링, 마크 러팔로, 레이철 맥아담스. 이 세 배우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술적 완성도보다 연기 속에서 인간미가 느껴져 마음을 뺏기는 배우들이거든요. 사실 배우라면 누구나 얼굴에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어떤 얼굴은 신비롭고, 또 어떤 얼굴은 사랑스럽죠. 그런데 관객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얼굴, 그런 감정에 마음이 움직이고 자연스레 동화돼요.
어느덧 20편에 가까운 작품에 이름을 올렸어요. 스스로 배우 문채원의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면, 그 경계에 서있는 작품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악의 꽃>일 것 같아요. 그 작품을 하면서 ‘연기가 이렇게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엔 단순했어요. 울어야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면 잘한 줄 착각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오늘도 할 일 다 했다’는 안도감이 있었고요. 그땐 몰랐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이 쌓이고 연기를 보는 눈이 조금씩 생기니까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저 배우가 나오면 몰입이 된다’라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돼요. 젊음의 생기로 많은 걸 덮을 수 있는 시절이 있잖아요. 지금 돌아보면, 그땐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그저 예쁘게 봐준 거구나 싶어요. 그런데 그 생기는 언젠가 사라지잖아요. 그다음엔 노련함이 생겨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악의 꽃>은 그걸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한 작품이었어요.
지금 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화두가 있어요?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반대인 기쁘고 행복한 감정을 연기하는 게 훨씬 더 어렵게 느껴져요. 할리우드 배우들을 보면 리액션이 크고 표현이 자유롭잖아요. 웃을 때는 정말 박장대소하며 웃고요. 그걸 보면서 늘 궁금했어요. 이건 문화의 힘일까, 아니면 날 때부터 탑재된 성향일까? 어두운 감정은 자기 긴장을 이용할 수 있어요. 그 긴장을 에너지로 바꾸면 돼요. 그런데 기쁨은 한순간의 틈, 그러니까 마음이 조금이라도 닫히면 소위 ‘뽀록’이 나기 쉬워요. <노키즈>를 하며 어느 정도 코미디에 도전해봤지만 언젠가는 코미디 연기를 정석대로 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만나고 싶은 이야기나 캐릭터가 있을까요?
요즘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전에 느낀 연기의 재미가 ‘어렵지만 몰입해서 해냈다’였다면, 지금은 조금 달라요. 너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감정인데, 그걸 얼마나 진짜처럼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그 리얼함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영화 보는 취향도 많이 바뀌었어요. 편안하고 담백한 작품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너무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진 캐릭터보다 그냥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훨씬 끌려요.
지금의 배우 문채원을 만든 영화가 있다면요?
<러브레터>요. 중학생 때 영화부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CA 시간에 부원들과 함께 극장에 갔어요. 그때 본 영화가 <러브레터>였어요. 그 영화의 감정, 미장센, 음악 모든 것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집 앞 서점에서 포스터가 표지로 실린 책을 사서 들고 다닌 기억도 나요. 그때 <러브레터>가 제게 준 감정과 감수성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요. 그리고 그건 제가 연기를 하며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감수성이기도 해요.
지금 마음속에 품고 사는 문장이 있을까요?
좋은 사람이 되어 곁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두자. 너무 진부한 말 같지만 요즘은 그 의미가 점점 더 마음에 와닿아요. 예전엔 동화 같은 이야기로만 들렸는데, 지금은 그게 결국 내가 바라는 삶의 모양이구나 싶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스포트라이트>예요. 볼 때마다 마치 좋은 책을 읽은 뒤처럼 마음이 정화돼요. 그 영화 속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에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죠. 그래서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그 영화를 찾아봐요. 욕심에 매달릴 때,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누군가를 배려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요. 다행인 건,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여전히 부족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그런 이들을 곁에 두는 삶을 요즘 더 자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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