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 선율이 추상적인 앰비언트 사운드를 만나 말할 수 없이 아득한 풍경을 그려낸다. 김오키의 앨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음악과 미술의 근사한 만남이다.
6월 24일부터 7월 26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진행하는 동명의 그룹전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금을 “계보의 죽음, 해체 이후의 시대”라 진단하고,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만의 선명한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는 국내의 젊은 현대미술가 8명을 호출한다. 김오키의 앨범은 전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번역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매체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감각하며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응답에 가깝다.

<W Korea> 2020년 단색화 화가 윤형근에게 영감을 받아 앨범 <Yun Hyong-keun>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그림이 마치 음표처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어떤 경험이었나?
김오키 2020년 PKM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윤형근 1989- 1999>와 연계해 만든 앨범이었다. 작업 구상을 위해 갤러리에 가서 처음 그림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림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나름 윤형근의 일대기나 작품 세계를 공부하고 갔는데, 실물을 맞닥뜨리는 순간 그 모든 게 무색해지더라. 머리로 계산할 것도 없이 ‘이런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게 자동으로 그려졌다. 거장의 작품과 함께할 수 있어 좋았고, 내 인생에 있어서도 큰 사건이었다.
그간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 많았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모티프로 삼은 데뷔 앨범 <천사의 분노>가 대표적이다. ‘문학’에서 출발한 음악과 ‘미술’에서 출발한 음악은 작업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
문학에서 출발할 땐 내가 그 글의 OST를 만든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텍스트라는 확실한 서사가 있으니까. 반면 미술과 음악은 똑같이 ‘추상’의 영역이지 않나. 그래서 작업할 때 확실히 선명하게 잡히는 맛은 덜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로워지는 면이 있다. 생각해보면 미술에서 출발했을 때 머릿속으로 더 많은 생각을 굴리고 살을 붙이게 되는 것 같다.
전시명이자 앨범명인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뮤지션으로서 어떤 직관적인 인상이 스쳤나?
요즘 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한 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됐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점점 음악으로 먹고살 만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찾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뮤지션으로서 더 큰 성과를 내고 싶은 갈증이 생기기 마련인데, 정작 주변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색소폰으로, 그것도 경음악으로 그 정도 했으면 성공했지’ 하고 선을 그어버리더라. 그럴 때마다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고 회의감도 밀려온다. 그런 타이밍에 이 문장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래, 한 번 더 해보자. 그런 마음이 들었다. 마치 누가 등을 한 번 툭 쳐주는 것 같은 문장이었다.

다양한 기하학적 도상이 돋보이는 박민하의 ‘Nostos, Weather Turning’(2026).
앨범 작업 과정은 어땠나?
아, 쉽지 않았다(웃음). 전시 참여 작가만 8명이다 보니, 각 작품이 주는 이미지를 하나씩 떠올려야 했다. 어떤 작품은 좀 귀엽고, 어떤 건 강하고, 또 어떤 건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어떻게 통일성을 주느냐였다. 고민 끝에 색소폰 대신 앰비언트 사운드로 그 여백을 채우기로 했다. 추상적인 소리들이 한곳에서 뭉쳐서 들리는 게 아니라, 주변을 감싸듯 들리게 만들고 싶었다. 몽골에 가본 적은 없지만, 밤의 사막에 혼자 앉아 있는데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공간감과 감각을 음악으로 만들고 싶었다.
박민하, 안현정 등 이번 전시에는 기하 추상을 펼치는 작가들이 다수 참여한다. 점, 선, 면이 직관적으로 주는 리듬감 때문에 평소보다 앰비언트 사운드에 더 집중하게 된 건가?
정확하다. 사실 예전부터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었다. 색소폰이은 성격이 워낙 강해서, 한 번 부는 순간 곡의 무드나 색깔이 특정 이미지로 확 고정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엔 색소폰을 최대한 절제해보려고 했다. 예컨대 어떤 곡은 중심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는데, 그 뒤를 받치는 주변음은 끊임없이 바뀐다. 그러면 듣는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런 부분을 많이 연구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 있었나?
김주영 작가의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비행기 부품 등을 가져와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작품에 담긴 심오한 뜻까지는 다 몰라도, 비행기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특유의 설렘이 확 와닿았다. 이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 이번 앨범의 가장 핵심적인 트랙이기도 한데, 작업할 때도 제일 재밌었고 기분 좋게 완성했다.
국가무형문화재 동해안별신굿 이수자 손정진이 참여한 트랙도 눈에 띈다. 무속과 재즈의 만남이라니 꽤 의외다.
2020년 광주에서 열린 ‘ACC 월드뮤직페스티벌’에서 손정진 선생님과 우연히 합동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주최 측에서 남도씻김굿과 동해안별신굿 중 하나를 고르라 했는데, 왠지 동해안별신굿이 당겼다. 이상하게 그걸 들으면 신이 나고 춤추고 싶어진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같이 무대에 올랐는데, 내가 무속 음악을 워낙 모르니까 너무 어렵더라. 심지어 공연하는 와중에 속으로 ‘이거 그냥 막 치는 거 아닌가? 사짜 아닌가?’ 싶었을 정도다(웃음). 그러다 점차 선생님들과 함께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 매력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재미있는 건 내가 느끼기에 동해안별신굿은 즉흥성이 강하고 구조가 복잡해서 재즈와 닮은 구석이 많다. 반대로 선생님들은 내 소프라노 색소폰 소리를 듣고 태평소 느낌과 비슷하다고 하시더라. 색소폰은 소리가 유연하게 휘어지지 않나. 내가 보기에 색소폰은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다. 서양 악기임에도 국악 악기와 찰떡처럼 어우러지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현상에서 작업을 출발시키는 박정혜의 ‘성에’(2026).
이 밖에 야마가타 트윅스터, 배우 옥자연, 래퍼 EJO 등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만약 시대와 국적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번 앨범에 꼭 함께하고 싶었던 인물이 또 있었나?
최근 세상을 떠난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 선생님. 정말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평생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가식이 없었다. 보통 거장이 되면 젊은 뮤지션을 경계하거나 질투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소니 롤린스는 신인이 등장하면 ‘와, 잘한다. 나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활동을 중단하고 택시 운전도 하고, 빌딩 경비 일도 하면서 다시 연습한 뒤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성장시킨 사람이다. 나는 이 분이야말로 진짜 재즈의 구원자라고 생각한다. 아, 만약 진짜로 소니 롤린스를 모셔와서 이번 앨범을 같이 만들었다? 그럼 그래미 어워즈는 그냥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아쉽다(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 김오키가 ‘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구하고 싶은 것이라….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늘 무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주변 사람들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살다 보니 이상한 책임감이 생긴 것 같다. 사실은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괜히 짊어지고 있는, 조금은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것.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그 마음을 조금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장 구하고 싶은 건 그런 책임감으로부터의 자유인지도 모르겠다.
- 사진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