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예술은 결국 누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의 문제다.
카메라 앵글 안팎에서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중 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들의 서사는 충분히 다채로운가? 재능과 목소리는 마땅하게 조명받고 있는가?
칸영화제 공식 파트너인 케어링 그룹의 ‘우먼 인 모션’은 행동과 실천으로 영감을 주는 문화예술계 여성을 장려하고자 태어난 프로그램이다. 11년 동안 지속하며 크게 확장된 그 진취적 프로그램의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밤. 근사한 면면만큼이나 멋진 생각과 유쾌한 웃음이 넘실거렸다. 올해 ‘우먼 인 모션 상’ 수상자인 배우 줄리앤 무어와 제79회 칸영화제의 태도를 상징하는 심사위원장 박찬욱을 비롯해, 칸의 영화로운 나날 속에서도 유독 빛난 얼굴과 마음의 정수가 여기 있다.


5월 12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제79회 칸영화제는 작년의 경우와 여러모로 달랐다. 적어도 한국인에겐 그렇다. 박찬욱 감독이 한국인 최초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다는 뉴스가 발표된 건 지난 2월. 매해 칸영화제는 가장 먼저 ‘올해의 심사위원장’을 세상에 알리는 것으로 시동을 건다. 메일함에서 ‘Park Chan-wook President of the Jury’라는 제목을 목격했을 때, 영화로 치면 관객으로서 결정적 장면을 마주한 듯한 감흥이 일었다. 영화제 측이 전 세계 기자들에게 보내는 그 공식 메일의 내용은 꽤 길다. 그렇게 온갖 수사와 애정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선정의 변’이 또 있을까? 영단어 5,000여 자에 달한 그 내용을 지극히 사실에 기반하여 자의적으로 축약하자면 이렇다. ‘본능적이고, 전복적이며, 바로크적인 박찬욱의 영화는 각본과 스타일, 도덕성에 이르기까지 전부 대담해. 박찬욱의 모든 것은 칸에서 <올드보이>와 함께 시작되었지. 그 영화가 2004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잖아? <박쥐>는 심사위원상, <아가씨>는 경쟁 부문 초청, <헤어질 결심>은 감독상… 그가 이번에 심사위원장을 맡은 건 칸영화제가 한국 영화에 일찍부터 품어온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고. 한국은 해마다 보석이 발굴되는 위대한 영화 제작 국가야. 뉴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자마자 임권택의 <취화선>이 감독상을 받았고, 또 홍상수, 이창동, 연상호… 아, 전도연은 여우주연상….’ 잠시 잊고 살았다. 박찬욱의 별명은 베니스 박도, 베를린 박도 아니고, ‘깐느 박’이다. 거장 박찬욱 탄생의 시작점이었던 칸영화제는 그간 연이 있었던 주요 한국 작품을 읊으면서 깨알 같은 정보들까지 도처에 심어놓았다. 정성스럽고 감동적인 공식 메일링이었다.
경쟁 부문 진출작이 발표된 4월에는 또 다른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칸영화제와 영화제의 공식 파트너인 케어링(Kering) 그룹이 ‘2026년 우먼 인 모션 상’ 수상자로 배우 줄리앤 무어를 선정했다는 소식이다. 케어링은 문화계 전반에서 여성의 역할 제고에 기여한 여성 아티스트들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이 상을 만들었다. 부쉐론, 보테가 베네타, 생 로랑, 구찌, 발렌시아가, 맥퀸 등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럭셔리 그룹이 ‘우먼 인 모션’이라는 선도적 프로그램의 출범을 알린 곳, 바로 11년 전 칸영화제였다. 문화예술은 성평등과 포용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불균형의 지대인가? 카메라 앵글 안팎으로 영화계에서 작업하는 여성들의 재능과 공로를 조명하겠다는 케어링의 비전은 사진(아를국제사진전에서 열리는 시상식)을 포함해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확장됐다. 줄리앤 무어는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에미상 등 배우에게 수여하는 주요 상을 대부분 받은 자다. 영화 산업 내 여성의 목소리와 다양성 확대를 적극 지지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또 하나, 그녀는 미국 내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비영리 크리에이티브 위원회의 창립 의장으로도 활동한다. 이 원고를 마감하는 중에도 줄리앤 무어는 인스타그램에 총기 규제에 관한 메시지를 띄웠다. 케어링 의장인 프랑수아 앙리 피노(François-Henri Pinault)는 줄리앤 무어를 두고 “우먼 인 모션이 추구하는 가치와 완벽히 맞닿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칸영화제의 얼굴이자 오랜 집행위원장인 티에리 프레모(Thierry Frémaux)도 케어링 그룹을 통해 찬사를 전했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여성의 강인함과 모순, 자유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그녀의 연기는 영화사에 지워지지 않을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올해 칸영화제의 특징 중 하나는 출품작 목록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의 대형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칸영화제가 워낙 예술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놀랍게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탑건: 매버릭> 같은 영화가 비경쟁 부문 및 특별 상영으로 초청받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성격의 출품작들은 레드카펫의 스타 밀도나 영화제 바이럴에 도움이 된다. ‘좋은 영화의 유무를 떠나 올해 경쟁작들의 레드카펫 분위기만큼은 대체로 작가주의 공기가 어려 있었다.’ 이렇게 정리하면, 크루아제트 거리에 늘어선 5성급 호텔들 앞에서 셀럽을 목격하고자 종일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운할까?
적어도 개인적 체감으로는, 일주일 동안 칸에서 주요 인사들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장소가 ‘우먼 인 모션’ 디너 현장이다. 동시대 영화의 지형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을 축하하고, 그들의 성취를 기념하는 자리. 디너의 하이라이트인 ‘우먼 인 모션 상’ 시상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5월 17일 밤, 칸의 라 카스트르 광장(Place de la Castre)에는 그즈음 칸에 머물고 있던 별 중의 별이 모여들었다. 구시가지의 중세풍 골목들을 지나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이 광장에서는 소도시인 칸의 전경을 와이드 샷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 영화제의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는 팔레 드 페스티벌부터 라 크루아제트의 여러 해변들, 줄지어 정박한 요트와 레저 보트, 저 멀리 듬성듬성 떠 있는 대형 크루즈선, 빨간 벽돌지붕 집들까지.

“아까 <호프> 레드카펫 세리머니에 잠시 갔다가 바로 여기로 왔어요. <호프>는 내일 보려고 해요.” 디너장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났을 때, 사실 좀 놀랐다. 그가 아주 늦거나 어쩌면 사전에 예정해둔 것과 달리 디너에 참석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단은 당연하게도 경쟁 부문에 진출한 작품을 모두 봐야 한다. 그리고 팔레 드 페스티벌에 위치한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영화가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자리는 영화제의 중요한 순간이다. 17일 밤은 한국 영화 <호프>의 프리미어 상영 타이밍이었다. 전날 자정이 넘은 시각, <군체>의 레드카펫 세리머니에도 등장해 한국 영화를 응원해준 박찬욱 감독은 <호프> 상영 직전 레드카펫 현장에 함께한 후 부지런히 ‘우먼 인 모션’ 디너장으로 이동했다. “영화제와 관련한 중요한 행사에는 시간을 내 참석하고 있어요.” 심사위원장은 그해 영화제의 얼굴이다. 하나하나 독보적 아티스트인 심사위원단을 아우르며 토론 혹은 논쟁을 이끄는 일 외에도 할 일이 있는 것. 그를 만나기 전에는 충혈된 안구와 피곤한 기색을 상상했지만, 생 로랑의 커스텀 슈트를 차려입은 박찬욱 감독은 비교적 활기를 띤 모습이었다.
이날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주인공, 줄리앤 무어는 발끝까지 순백으로 단장했다. <한니발>, <디 아워스>, <파 프롬 헤븐>, <세비지 그레이스>, <클로이>…. 줄리앤 무어의 출연작을 편집한 영상이 디너장의 스크린에 흐르는 동안, 감도 높은 단편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이 올해의 수상자를 호명하자, 줄리앤 무어는 설레는 표정으로 스피치를 시작했다. “이 자리는 물론 대단히 화려합니다. 모두가 너무나 근사하고, 우리를 둘러싼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기 쉽죠. 하지만 저는 그 아름다움조차 하나의 초대라고 느낍니다. 우리 시선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초대,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여성을 목격하게 만드는 초대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행사에 올 때마다 기대를 품어요. 오늘은 누구를 보게 될까? 그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될까?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 저는 여배우를 미치도록 사랑합니다(I Fucking Love Actresses). 볼 영화를 선택할 때도 약 2시간 동안 누구를 바라보게 될지를 기준으로 삼곤 하죠. 이자벨 위페르, 지금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웃음).”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스물두 편 중 여성 감독의 영화는 다섯 편이었다. 이 정도 성비면 현실적으로 훌륭한 구성일까? 그중 세 편의 감독이 영화제 주최국인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우먼 인 모션 상’에 이은 또 다른 시상, ‘떠오르는 신예상’은 여성 창작자의 장편영화 연출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케어링은 영화 산업의 성비상 소수에 해당하는 여성 감독이 마주하는 여러 장벽 가운데, 제작을 위한 자금 마련이 주요 과제라고 여긴다. 신인 감독에게 트로피보다 값진 건 두말할 것 없이 ‘차기작 제작을 위한 5만 유로 상당의 지원금’일 것이다. ‘우먼 인 모션’ 프로그램의 일환인 ‘떠오르는 신예상’은 올해 이탈리아 출신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인 마르게리타 스팜피나토(Margherita Spampinato)에게 갔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스윗, 스윗하트>는 작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여러 영화제에서 스무 개 이상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포착하는 동시에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것들과 감춰진 역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라고 한다. 줄리앤 무어의 표현처럼 근사하고 화려한 만찬 자리에서, 얼굴을 맞댄 영화인들은 사적이거나 공적인 대화를 나눌 것이다. 사소하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정겨움도 의미 있다. 어쩌면 이 자리의 대화를 씨앗 삼아 한 편의 영화 프로젝트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만남의 장이란 새로운 화두를 공유하는 기회이므로. ‘마르게리타 스팜피나토’라는, 한국에서 낯선 이 여성 영화인의 존재는 디너장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화두가 되었다.

디너에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와 영화제 회장인 이리스 크노블로흐, 그리고 심사위원장 박찬욱 이하 영화감독 클로이 자오, 배우 데미 무어와 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 등 심사위원단 여덟 명 전원이 참석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데미 무어가 나타난 순간, 그건 무슨 조화였을까? 포토월에 드리운 유독 커다란 그림자에서 이런 대사가 들리는 듯했다. ‘봐, 내가 이 구역의 여왕이야.’ 이달 커버를 장식한 배우 한소희와 샤를로트 르봉의 하얀 생기, 배우 콜먼 도밍고의 귀를 밤새도록 탐닉하고 싶게 만든 부쉐론의 유니크한 이어커프 등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남아 있는 이미지다. 이날 줄리앤 무어는 5분간 스피치를 이어갔다. 말 많은 세상에서 말은 종종 부질없다고 느끼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말의 힘과 존재의 힘을 상기시켰다. “미국에는 이런 문화적 전제가 있어요. 여성의 이야기는 덜 흥미롭다거나 이야기의 사이즈가 작고 사소할 거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려면 강하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인물이어야 한다…. 과연 그래야 할까요? 그럼 여성 관객은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요? 이분법적으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성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짚고 싶은 거예요. 그것은 스토리텔링에서 결정적 문제입니다. 관점이 뭔가, 얼마나 구체적인가. 때때로 우리는 ‘보이지 않음’에 관한 서사를 접하곤 하죠.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혹은 살아가는 문화 안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느낀다고 글을 쓰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늘 그 서사가 궁금합니다. 왜, 어디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혹시 특정한 시선만을 가치 있게 여기도록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여성으로서 무엇을 보는가. 이 업계에는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영화인을 중심으로 패션과 음악 등 예술계 인물 160여 명이 묵직하게 반짝인 이 자리에, <더블유 코리아>는 3년째 함께했다. 축제의 관객이자 중요한 순간의 목격자로서, 또 한 번 영화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Women in Motion Talk With Julianne Moore
미국 배우 최초로 베니스(<파 프롬 헤븐>), 베를린(<디 아워스>), 칸(<맵 투 더 스타>)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줄리앤 무어도 한때 이런 생각을 했다. ‘칸영화제에는 대체 어떻게 가는 거지? 내가 거기 가는 건 불가능할 텐데.’ 최근 줄리앤 무어는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출하고 A24가 제작하는 뮤지컬 코미디물을 작업했다. 칸은 영화제 출품 때문이 아닌, ‘우먼 인 모션 상’ 수상자 자격으로 찾았다. 홍보 담당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팀과 일하는 배우. 그 점에 대해 줄리앤 무어는 ‘취향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매해 칸영화제 기간 동안 케어링 그룹은 ‘우먼 인 모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수상자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인의 값진 경험담을 듣는 토크 세션을 진행한다. 초대받은 소수의 청중만 허락되는 자리다. 아쉬운 마음에 줄리앤 무어의 대담 일부를 <더블유> 지면에도 공유한다. <버라이어티>의 앤젤리크 잭슨이 사회자였던 이 대담은 5월 16일, 칼튼 칸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배우 인생에서 받은 모든 상을 돌아봤을 때, 올해 ‘우먼 인 모션 상’이 갖는 의미는 뭘까요?
Julianne Moore 여성이라는 성별을 좋아해요. 칸에서, 이런 방식으로도 축하를 받으니 정말 짜릿한 경험입니다. 저는 이 직업을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의 일부라고 말하곤 해요. 배우는 하나의 일에서 다음 일로, 또 그다음 일로 계속 옮겨 다니니까요.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게 돼요.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와, 이건 내가 평생 쌓아온 성과구나’라고 깨닫죠. 그래서 이런 기회는 저를 되돌아보기에 좋은 순간이기도 해요.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니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있었나요?
최근에 돈 치들과 딱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우리는 38년 지기 친구예요. 우리 둘의 공통된 경험에서 나온 온갖 일을 떠올려봤는데, 그는 제가 완전히 잊고 있던 일들을 기억하더라고요. 제 기억에 남은 건 그저 ‘즐거움’이에요. 그 즐거움이 저를 계속 나아가게 했죠. 작업에 몰두할 때면 내가 정확히 무엇에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딘가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에요.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한 상태, 그 감각이 좋아요. 다른 인물을 온전히 살아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무수한 감정을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술에서 바라는 바이기도 하죠. 예술을 통해 우리는 결국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니까요.
언제 그런 감정을 처음 느껴봤나요? 연기를 배울 때? 촬영장에서 경험했을까요?
글쎄요. 최초의 경험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글 읽는 법을 배웠을 때였어요. 독서하면서 그 장면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렇게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어요. ‘어떻게 자신을 이 정도로 드러낼 수 있지?’, ‘이 사람은 어떻게 나에 대해 이런 것까지 아는 것처럼 쓰지?’ 하면서요. 나중에는 그게 결국 인간 경험의 보편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독서 때 느끼는 감정을, 연극 동아리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저는 운동 신경이 없어서 치어리딩 팀 같은 데는 들어갈 수 없었거든요.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취미인 독서를 성인이 된 후의 삶으로도 끌고 올 방법을 찾은 셈이에요. 게다가 영화에는 놀라운 점이 있어요. 작업이 끝나면 실제로 하나의 결과물이 남는다는 거예요. 어쩌면 세상에 영원히 남을 수도 있죠.
2003년, 업계에서 당신이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과 함께 주목받은 때가 있잖아요. 영화 <디 아워스>를 떠올리면 어떤가요?
음, 우선 그 원작 책을 제가 정말 좋아해요. 정교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에요. 어느 해 생일에 선물로 받았는데 그게 영화로 만들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는 믿기지 않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우리가 그 영화 현장에서 촬영을 같이 한 적은 없어요. 그들과의 작업이 어땠는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제가 예술이나 타인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감동을 받는지 말할 일이 있을 때면, 그 영화 속에서 서사와 역사로 연결된 세 여성에 대해 언급하곤 해요.
특히 메릴 스트립은 모두에게 큰 영감을 주는 존재죠.
제 생각에 그녀는 최고의 기준인 것 같아요. 메릴이 제 세대와 그 이후 여러 세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떠올리면, 그녀가 바로 어떤 ‘최초’였다는 거죠. 저는 TV와 영화를 보며 자랐어요. 미디어로 접한 최초의 여성이자 깊은 인상을 남긴 여성이 메릴이에요. 제가 10대였던 1970년대부터 그녀는 <타임> 커버를 장식했죠. 친근하면서도 화려하고 용감한 느낌이었어요. 매우 인간적인 면모와 매우 현대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녀서, 손에 닿을 듯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존재 같았달까. 메릴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일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불을 지펴준 것 같아요.
작년에 ‘우먼 인 모션 상’을 받은 니콜 키드먼도 수상 소감에서 메릴 스트립을 언급했죠. 니콜 키드먼은 작품을 할 때 몇 번에 한 번은 꼭 여성 감독과 일하겠다고 공표했어요. 당신도 ‘우먼 인 모션’의 사명을 이어받아 행동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제가 그렇게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본받고 싶은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아주 흥미로운 건 나이 들수록 제가 선택에 대해 더 큰 주도권과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이야기에서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봐요. 하도 말하고 다니는 거라 제 친구들은 지루하게 들을 수도 있는데요, 캐릭터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길 원해요. 물론 제가 중심인물이 아닌 이야기도 있죠. 그때도 제가 그 이야기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주인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감독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경우라면 그 이야기가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전개되는지, 내용이 정확하게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알고 싶어요. 사람들이 종종 그 단계를 건너뛰더라고요. 이런 식이에요. ‘이 캐릭터는 왜 이런 행동을 하지?’, ‘글쎄, 그녀가 원하니까. 악당이니까.’ ‘왜 그녀가 악당인 거야?’ ‘뭐, 이야기에는 악당이 필요하니까.’ 저는 ‘아무도 악당이 아니야. 다들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대로 행동할 뿐이야’라고 말해준 적도 있어요. 아, 어젯밤에 경쟁 부문 작품인 <젠틀 몬스터>를 봤거든요. 그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네요. 정말 탁월한 여성 감독과 정말 탁월한 여배우들이 만든 작품이에요. 여성의 시점을 확고하게 담아냈고, 주류가 아닌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보여줬어요. 마음 깊이 남아요.
특정 방식으로 일하겠다고 결심하고서 점점 자기만의 기준과 가치관을 정립하면, 그때부터 원하는 것이 저절로 모여들기 시작한다던데요. 정말 그런가요?
음.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끔은 정말 그렇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또 가끔은 ‘아니, 아니야’ 하면서 내 관점을 다시 정리하는 시기가 오죠. 저는 커리어 내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며 살아왔어요. ‘이럴 수가, 난 절대 재밌는 작품은 못 찾을 거야’ 싶다가도 ‘와, 이거 정말 재밌네’라고 느끼는 때가 있고. 모를 일이죠. 상당 부분은 창작자가 제시해주는 것에 달려 있으니.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안목은 점점 길러지는 것 같아요. 여기에는 물론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이 읽고, 보고, 파고들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바로 이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요즘 당신이 작품을 고르는 경향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뭔가요?
비극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고 있어요.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힘든 시기에는 이야기 속 감정의 깊이와 강도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거든요. 그럼 몰입이 어려워요. 저는 뻔한 긴장감을 좋아하지 않아요. 누가 살해당하는 것도 싫고, 폭발이 일어나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것도 별로예요. 과장된 연기도 싫어요. 그런 건 그냥 소음 같아요. 왜 이 정도로 싫은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몇 년 전만 해도 흥미로워 보인 것들이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재밌는 현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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