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여전히

전여울

밀라노는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한다.

지난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앞두고, AI의 힘을 빌려 수십 개의 프리뷰 일정을 바탕으로 최적의 동선을 짜 촘촘한 스케줄을 완성했다. 그런데 개막날인 월요일 아침, ‘예술계의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게릴라 퍼포먼스 소식이 SNS를 통해 번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알코바가 기획한 디자이너 컬렉티브 ‘뷰로 파르소’의 전시 전경.

카텔란이 깨운 밀라노의 아침 

월요일 아침 7시, 밀라노의 가장 상징적 장소인 두오모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물물교환 아침 식사(breakfast-barter)’라는 이름의 진귀한 퍼포먼스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커피 회사 라바짜의 후원으로 미술 평론가 니콜라스 발라리오(Nicolas Ballario)와 함께 고대 물물교환 관습에 착안해 기획한 행사로, 대중에게 ‘이상하든, 못생겼든, 아름답든, 독창적이든, 평범하든, 손에 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개인 소지품을 가져오도록 초대했다. 참가자들이 교환 구역에 입장할 때 목과 손에 ‘백인 하층민(White Trash)’이라는 글자를 찍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운이 가장 좋은 참여자는 카텔란과 직접 물건을 교환해 부러움을 샀다. 

이 행사는 기발한 퍼포먼스를 넘어 밀라노 디자인 위크와 우리 시대 디자인 산업의 현주소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 역할을 했다. 그간 디자인 위크는 방문객이 브랜드 토트백과 장신구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공짜 기념품 증정 행사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카텔란의 물물교환 시스템은 물건의 가격표를 제거해 참가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과 원하는 것의 상징적, 감정적 가치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화려하고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기업 행사에서 벗어나 진정성을 되찾는 움직임을 보여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새벽녘 공공 광장에서 행사를 개최해, 초대받은 소수의 폐쇄적인 파티보다는 광범위한 접근성과 인간적인 교류를 강조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AI가 완성해준 스케줄표를 훑다 카텔란이 왜 이러한 행사를 기획했는지 십분 이해가 됐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패션 하우스 전시가 많아졌음을 실감했다. 그런 연유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행사의 본질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분출했다. 패션 하우스와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디자인 위크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순수 디자인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분야가 융합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과연 나는 어떤 입장에 서게 될 것인가? 다소 비장한 시선을 품은 채 알코바 밀라노로 시작해 금요일 로피에라의 가구박람회 살로네 델 모빌레 방문으로 마무리된 한 주간 동안의 소회를 기록해보았다.

오스발도 보르사니의 건축과 인테르니 베노스타 전시의 완벽한 조화.

밀라노는 여전히, 디자인의 매혹 

언제나 디자인 위크의 출발선을 끊는 알코바는 다시 예전 군 병원 부지로 돌아왔다. 폐허 같은 군 병원 건물과 성당에까지 빼곡히 들어찬 신진 디자이너와 독립 스튜디오들의 전시 중 야심만만한 젊은 디자이너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에인트호번 디자인 스쿨 출신으로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중국 등 다국적의 젊은 디자이너로 구성된 콜렉티브 ‘뷰로 파르소(Bureau Parso)’는 다이닝과 리빙의 기능이 결합된 하나의 가정적인 환경으로 전시를 펼쳤다. 이들은 지난해 디자인 마이애미에 첫발을 내디딘 알코바와 함께 전시를 진행한 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는 처음으로 참가했다고 한다. 디자인 위크의 시작을 신선한 기운과 함께하니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옛 군 병원 부지에서 펼쳐진 알코바의 전시 풍경.

한편 밀라노를 대표하는 듀오 디자이너 디모레스튜디오(Dimorestudio)가 어느 팀보다 먼저 프리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올해 누구보다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매년 디자인 중심가인 브레라의 갤러리에서 하나의 ‘의식’처럼 행해온 전시를 없앤 것이다. 늘 열리는 전시를 보기 위해 브레라 솔페리노 주소지로 관람객들이 찾아와 서둘러 안내판을 설치했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처음에는 아쉬움이 앞섰지만, 이들이 새로 만든 현장을 둘러 보니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디모레스튜디오가 자신의 영향력을 새롭게 재정의하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인테르니 베노스타(Interni Venosta) 전시였다. 인테르니 베노스타는 2년 전 디모레스튜디오가 자신들의 이름을 감추고 론칭한 가구 및 소품 브랜드다. 이들은 밀라노 중심부의 팔라초 올리바치 안, 그동안 일반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건축가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디자인한 프라이빗한 아파트에서 새로운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1947~48년 보르사니가 직접 설계한 공간에는 조각적인 룸 디바이더와 벽난로, 빌트인 가구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디모레스튜디오는 그 위에 황동과 스틸, 벌 우드, 래커 마감의 새로운 컬렉션을 절묘하게 배치했다. 공간의 역사성을 압도하지도, 지나치게 감추지도 않는 균형감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올해도 가장 긴 줄은 결국 디모레스튜디오 앞에 만들어졌다. 한때 영화 세트처럼 극적인 연출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디모레스튜디오는 이제 더 깊고, 더 사적인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고 있었다. 이들의 빈티지 컬렉션인 디모레갤러리는 아예 헤드쿼터를 옮겨 쇼룸을 공개했다. 올해 디모레스튜디오의 변화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화려한 이벤트가 넘쳐나는 밀라노 한가운데서 여전히 ‘진짜 공간 경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답처럼 느껴졌다.

켈리 웨어스틀러와 협업한 H&M 홈. 작품의 조각적 실루엣, 절제된 컬러 팔레트가 돋보인다.

브랜드는 어떻게 존재감을 증명하는가? 

푸오리살로네가 화려한 이벤트와 협업으로 도시 전체를 달궜다면, 디자인 위크의 중심을 지탱하는 것은 여전히 가구 브랜드였다. 올해는 유독 과시보다는 브랜드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미학과 기술력, 그리고 공간을 해석하는 태도가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모로소(Moroso)는 스웨덴의 듀오 여성 디자이너 프론트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 ‘Geometriæ’를 공개했다. 구와 원기둥 등의 미술의 기초 기하학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모로소 특유의 조형적인 소파와 텍스타일 위로 회화적인 감각이 더해지며, 가구와 예술의 경계를 다시 한 번 허물었다. 

한스 웨그너의 대표적 클래식 작품을 선보인 칼 한센 앤 선.

H&M 홈은 미국 디자이너 켈리 웨어스틀러(Kelly Wearstler)와의 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웨어스틀러 특유의 조각적인 실루엣과 절제된 컬러 팔레트가 브랜드의 언어와 만나, 상업적 협업 이상의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덴마크 장인 정신의 상징인 칼 한센 앤 선(Carl Hansen & Søn)은 브레라의 실제 생활 공간인 아파트먼트에서 전설적 건축가 한스 웨그너(Hans J. Wegner)의 대표 클래식 작품과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새로 출시한 ‘CH280’ 과 ‘CH086’을 큐레이션했다. 그의 유산을 기리는 동시에, 그의 흔적을 함께 배치해 전통적 쇼룸이 아닌 ‘집’이라는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함으로써, 화려한 연출 대신 시간이 축적된 나무와 구조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오래 봐야 비로소 진가가 드러나는 디자인 작품들 앞에서, 북유럽 디자인이 왜 여전히 강력한 기준점으로 남아 있는지 새삼 실감했다. 

기하학에 대한 연구를 가구로 발전시킨 모로소.

조명 브랜드 플로스(Flos)는 독일 산업디자이너 콘스탄틴 그르치치(Konstantin Grcic)의 ‘녹턴 (Nocturne)’과 프랑스 디자이너 에르완 부훌렉 (Erwan Bouroullec)의 ‘마압(Maap)’ 두 가지 새로운 조명 컬렉션을 선보였다. 특히 플로스 프로페셔널 스페이스 전시 공간은 콘스탄틴 그르치치가 디자인한 새로운 모듈형 조명 녹턴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는 기술적 완성도 위에 감성적 서사를 더하며 조명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설계하는 도구임을 다시 증명했다. 빛의 밀도와 그림자의 리듬까지 계산한 설치는 올해 가장 완성도 높은 전시 중 하나로 꼽힐 만했다. 그리고 카시나(Cassina)는 역시 카시나였다. 브랜드의 아카이브와 현대적 해석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전시는 ‘클래식은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우아한 답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아이콘조차 매년 새로운 시선으로 재탄생시키는 힘, 그것이 카시나의 저력이다.

아웃도어 컬렉션을 하나의 건축적 경험처럼 풀어낸 폴리폼.

아웃도어의 성찬

밀라노의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뜨거운 디자인 열기는 아웃도어 가구 전시에서도 엿볼 수 있었 다. 집의 경계가 확장되면서 테라스, 발코니, 정원은 또 하나의 거실로 여겨지는 가운데 럭셔리 레지던스나 호텔에서 수영장, 루프톱, 프라이빗 가든 등에 쓰일,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아웃도어 가구에 대한 수요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방수 패브릭, 내구성 높은 우드·메탈, UV 저항 소재 등이 발전하면서 실내 가구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디테일과 편안함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중 폴리폼(Poliform)은 올해 아웃도어 컬렉션을 하나의 건축적 경험처럼 풀어내 시선을 모았다. 도시 중심부의 역사적 공간에서 진행한 전시는 단순히 야외 가구를 나열하는 대신, 프라이빗 레지던스의 정원과 풀사이드, 루프 톱 라운지를 연상시키는 시퀀스로 관람객을 이끌었다. 낮은 실루엣의 소파와 묵직한 스톤 소재, 자연스럽게 바랜 듯한 패브릭 톤이 어우러지며 ‘밖에 놓인 가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완성된 거실처럼 느껴졌다. 특히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거의 지워버릴 만큼 정교하게 계산된 소재의 연결감이 인상적이었다. 아웃도어가 더 이상 계절성 제품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의 핵심 영역이 되었음을 보여준 전시였다. 한편 플렉스폼(Flexform)은 산탄젤로 수도원의 고요한 회랑을 배경으로 가장 플렉스폼다운 전시를 선보였다. 햇빛이 오래된 석조 벽면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 공간에 브랜드의 대표적인 아웃도어 컬렉션을 절제된 간격으로 배치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명상적인 풍경처럼 다가왔다. 화려한 설치나 과장된 메시지 없이, 리넨과 우드, 브론즈 톤의 메탈이 만들어내는 촉감과 비례만으로 관람객을 설득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강력했다. 밀라노 곳곳이 시각적 자극으로 넘쳐나는 와중에도, 가장 오래 머물게 만든 공간 중 하나였다.

팔라초 세르벨로니에서 열린 루이 비통의 오브제 노마드 전시.
루이 비통의 피에르 르그랑 오마주 컬렉션.
에스투디오 캄파나가 디자인한 코쿤 다이크로익.

패션 하우스는 죄가 없다

앞서 말했듯 전시 목록을 보면 마치 패션위크 같다고 할 정도로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는 글로벌 패션 하우스의 전시가 유독 많았다. 그런데 요란하고 과시적인 전시로 디자인의 기능적 혁신보다 소셜미디어 ‘순간’을 우 선시한다는 비판이 무색할 만큼 디자인적 발상이 돋보이거나 지적인 면모와 절제된 모습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표적인 예가 루이 비통이다. 전통적으로 팔라초 세르벨로니에서 펼쳐지는 루이 비통의 라이프스타일 컬렉션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전시의 올해 키워드는 ‘아르데코’였다.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 및 현대 산업 미술 박람회’ 1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랑스의 장식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제본가, 가구 제작자인 피에르 르그랭 (Pierre Legrain)의 세계를 새롭게 조명했다. 아르데코의 정수를 현대적 감각으로 부활시킨 이번 전시는, 패션 하우스가 단순한 가구를 넘어 디자인사의 위대한 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재해석하는지, 그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증명해 보였다. 디올은 프랑스의 디자이너 노에 뒤쇼 푸르-로랑스(Noé Duchaufour-Lawrance)와 손을 잡았다. 크리스찬 디올의 1947년 뉴 룩 ‘코 롤(Corolle)’을 재해석한 램프는 일본의 대나무 공예로 완성된 전시 연출과 어우러져 기술적 정교함과 예술적 감수성이 완벽하게 결합된 올해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전통 태피스트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구찌.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에 펼쳐진 구찌 플로라 정원.
구찌가 맞춤 제작한 대형 벤딩 머신.

그런가 하면 구찌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의 지휘 아래 하우스의 황금기를 소환했다. 유서 깊은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의 중정에서 펼쳐진 전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뎀나의 데뷔 패션쇼인 ‘프리마베라’에 이르기까지의 장면들을 전통적인 태피스트리 스타일의 설치로 재현해냈다. 자신들의 역사가 곧 이탈리아의 패션 역사라는 패기 가득한 연출로 브랜드의 정체성이 인테리어 사물 속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리한 서사였다. 

1947년 뉴 룩 ‘코롤’을 재해석한 디올의 전시 전경.
1947년 뉴 룩 ‘코롤’을 재해석한 디올의 전시 전경.

패션 하우스들의 이러한 라이프스타일 접근 방식 덕분에 밀라노는 건축, 예술, 패션이 교차하는 문화적 바로미터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과도한 상업성과 자본의 위세를 비난하고 배제하는 목소리가 잠시 눈길을 끌지언정 힘을 얻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위크가 단순한 가구 박람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다방면을 아우르는, 창의성의 글로벌 정상 회담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일주일 동안 수십 개의 전시장을 오가며 깨달은 것은, 결국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본질은 생각보다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밀라노는 여전히 가장 시끄럽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상업적인 디자인 축제다. 기술은 영리하게 길을 안내하고, 자본은 풍요로운 무대를 깔아주며, 예술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발바닥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부르텄지만, 마음은 이미 내년의 밀라노를 상상하며 들뜨고 있었다.

강보라(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COURTESY OF ALCOVA, INTERNI VENOSTA, H&M, CARL HANSEN & SØN, MOROSO, POLIFORM, LOUIS VUITTON, GUCCI, D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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