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감독, 아티스트라는 이름 사이를 유영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완성해온 샤를로트 르봉(Charlotte Le Bon).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방식이었고, 칸에서 만난 부쉐론은 그 세계를 더욱 또렷하게 비춘다.




지금쯤 누군가는 이 여성의 얼굴을 어느 장면에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법하다. 영화 <이브 생 로랑>(가스르파 울리엘이 이브 생 로랑을 연기한 <생 로랑>이 아닌)에서 디자이너의 뮤즈 ‘빅투아르’, <무드 인디고>에서 주인공 커플의 사랑을 지켜보는 ‘아이시스’,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 주인공을 지지하는 동반자 ‘애니’, <베를린, 아이 러브 유>(2019)에서 실연당한 미국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로즈’. 샤를로트 르봉은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작업하는 배우다. 종종 프랑스의 여자로 여겨지지만, 그녀는 지난해 <화이트 로투스> 시즌 3에 합류해 ‘클로이’라는 캐릭터로 이런 대사를 옮겼다. “난 프랑스인이 아냐. 난 퀘백에서 왔고, 그건 엄연히 다른 거야”. 르봉은 어느 순간 ‘주인공의 친구’나 비슷비슷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작업에 지쳐 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며 전시도 하고, 어릴 적 살았던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 오두막을 제2의 집으로 삼으며, 내키는 영상 작업에 몰두하는 삶. 웹사이트 lebonlebon.com에 접속하면 시각예술에 재능과 애정을 가진 그녀의 감각과 재치를 엿볼 수 있다. 단편 작업을 하던 르봉이 장편영화 감독으로 처음 선보인 <팔콘 레이크>는 2022년 칸영화제의 부름을 받았다. 그녀의 작가적 역량을 알 수 있는 이력이다. 럭셔리 하우스의 휘황함 너머에 존재하는 일하는 여성들을 가늠할 줄 알고, 꼿꼿한 가치관을 가졌으며, 요즘 자전적 스토리를 다룬 두 번째 영화 편집으로 골머리를 앓는 자. 샤를로트 르봉이 올해 칸영화제에 참석한 배우이자 하이 주얼리의 앰배서더로서 <더블유 코리아>와 만났다. 시각예술가이기도 한 르봉을 말할 때는 그녀가 그린 그림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 화보와 어우러지는 연작 두 점도 함께 선보인다. 한여름과 한겨울, 비슷한 장소로 보이는 숲길에 동동 떠 있는 선명한 덩어리는 무엇을 표현할 걸까? ‘내 머릿속 목소리’라는 작품 제목이 곧 내용이다.

<W Korea> 혹시 당신을 아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상상하시나요?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당신 얼굴이 낯익을 거예요.
Charlotte Le Bon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저를 알아볼 수도 있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편이에요.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저 자신을 배우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한국인들이 나를 알아볼까?’ 같은 개념은 떠올려보질 못했네요. 그래도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제가 한국 영화에 정말 자주 감탄한다는 점이에요. 정서적 깊이와 감독들이 보여주는 시각적 대담함 때문이죠.
당신에 대해 조사해보니,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럭셔리 하우스의 앰배서더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승낙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의의를 생각하는 듯 했어요. 작년 가을부터 부쉐론의 앰배서더로 활동을 시작하셨죠. 부쉐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부쉐론에 마음이 끌린 건 그 이름 뒤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부쉐론은 정말로 여성들이 이끄는 하우스거든요. CEO 엘렌 풀리뒤켄(Hélène Poulit-Duquesne)과 비범한 재능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레어 슈완(Claire Choisne)은 10년 이상 함께해온 사이입니다. 그런 오랜 헌신은 그들이 함께 일궈온 환경이 어떤지를 말해주죠. 물론 작업 자체도 빼놓을 수 없어요. 부쉐론이 창조해내는 독보적인 아름다움, 성별의 경계를 두지 않는 감각이 무척 매력적이거든요. 눈부신 창의성과 단단한 중심이 공존하는 하우스인데, 그건 정말 드문 일이에요.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이 주얼리’라고 하면 저는 ‘아름다움이 빛바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아트 피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다. 당신에겐 당신 안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나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요.


지난 5월 17일, 칸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으로 영화 이 공개되었어요. 지금껏 여러 차례 칸영화제를 방문하셨죠? 하지만 칸에서 그 늦은 밤에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를 관람한 건 처음이었을 텐데요. 어떤 경험이었어요?
완전히 다른 에너지였어요. 짜릿하고, 거의 난장판에 가까웠죠. 사람들이 살짝 취한 채로 극장에 와서는 여느 상영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에 빠져들더라고요. 다행히 캉탱 뒤피외 감독님의 영화는 러닝타임이 길지 않아서, 너무 늦지 않게 끝났어요. 그게 참 고마웠죠. 저는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걸 못 견디거든요. 그러면 진짜 우울해져요.
<Full Phil>이라는 작품에 대해 소개해주시겠어요? 고급 호텔 객실을 주 공간으로 우디 해럴슨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2인극을 벌이는 느낌인데, 당신이 등장해 공기를 바꾸죠. <버라이어티> 매거진은 당신 캐릭터를 두고 ‘Woke Scold(깨어 있는 척 훈계하는 사람)’라는 표현을 썼더라고요. 기사의 맥락상 살짝 꼬집는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 알 듯 말 듯했어요.
제가 연기한 ‘루시’는 호텔 직원인데, 흔치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 안의 균열을 감지하고, 폭력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먼저 느끼죠.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예요. 여성들이 여태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그런 경계심은 피해망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지혜라고 보거든요. ‘워크 스콜드’라니, 흥미로운 딱지네요. 저라면 다르게 부르겠어요. ‘자애로운 시선’이라고요. 루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위험에 처한 한 여자를 지켜봐요. 영화 속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맡은 인물이죠. 루시의 그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해요.


과거 칸영화제에서 선보인 출연작을 조금씩 짚어볼까요? 2024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은 <니키>는 조각가 니키 드 생팔에 대한 전기영화예요. 그녀는 여성성, 폭력, 자기 치유 등을 대표하는 강렬하고 아이코닉한 존재잖아요. 당신과 그녀의 접점이 있다고 느꼈나요?
니키를 만난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그 힘, 그 거침없음을 제 몸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이었죠. 촬영장에서 니키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가 저에게 거친 에너지를 줬어요. 그리고 니키의 사랑과 열정이 그랬듯이, 저도 셀린 살레트 감독님을 향한 사랑으로 산이라도 옮길 준비가 돼 있었죠. 말 그대로요. 니키는 어린 시절부터 삶 자체가 참 고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배역을 연기하면 배우에게 흔적이 남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니키>를 만들면서는 제가 워낙 큰 사랑을 받아서, 작업이 끝날 무렵엔 바로 속편에 들어가도 될 정도였어요!
2022년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Falcon Lake(팔콘 레이크)>는 당신의 첫 장편 연출작이죠. 한국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볼 수 없어 너무 안타깝네요. 한적한 호숫가를 배경으로 바캉스 기간에 얽히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합니다. 첫 연출작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은 뭔가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슨하다는 거예요.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자연 풍경이 서정적이고 평화로워서 유튜브로 예고편만 여러 번 봤어요. 당신이 어릴 적 살았던 캐나다의 동네와 가까운 곳에서 찍은 거로 알아요. 사춘기 시절을 산악 지대에서 보냈다면서요?
몬트리올에서 자랐는데, 10대에 막 접어들 무렵 부모님이 숲속으로 이사했어요. 처음엔 정말 싫었어요. 저는 도시 생활을 꿈꿨고, 밤이 되면 그 숲이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숲 없이는 못살아요. 돌이켜보면 저를 겁나게 했던 건 숲이 아니라 제 사춘기 자체였던 것 같아요. 숲은 아무 잘못이 없었죠.


얼마 전까지 두 번째 연출작을 촬영했다고 들었어요. 수월하게 마쳤나요? 심정이 어때요?
요즘 편집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저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거든요. 편집은 고되고 외로운 작업이에요. 어떤 날은 이 영화가 너무 좋다가도, 또 어떤 날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들죠. 그래도 이제는 그게 다 과정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아직 그 작품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요. 정보를 달라고 조르기엔 이른 시점이겠죠. 친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나 어떤 욕구가 작업으로 이어졌을까 짐작할 뿐인데… ‘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바람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나요?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우주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뿐이에요. 몬트리올에서 겨울과 봄 사이에 35mm 필름으로 찍었어요. 정말 멋진 팀과 함께할 기회를 얻었죠. 촬영감독 사라 미샤라,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렉스 에르퀼 데자르댕, 주연을 맡은 가브리엘 르미르와 아가트 르두까지요. 지금도 모두가 그리워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면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알고 느끼게 되는 점이 있잖아요.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자신에 대해 어떤 발견을 했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님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건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는 성공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건 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채워진다.”
어릴 적 샤를로트 르봉을 영화의 세계로 이끈 작품은 뭔가요?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기도 하니, 꼭 영화가 아니라 ‘예술’로 범위를 넓혀도 좋겠네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두 분 다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것도 아주 잘 그리셨죠. 배우인 어머니 역시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저를 키워주신 새아버지도 배우이자 작가예요. 아버지는 글 쓰고 스케치하는 걸 좋아하셨고요. 그냥 제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아요. 인생에서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던 때조차, 제 작업이 저를 찾아와줬으니까요.

당신의 웹사이트 lebonlebon.com 말이에요. 대문 이미지가 흥미롭더군요. 챗지피티는 그 이미지를 쿠르베의 ‘화가의 작업실’이라고 당당하게 알려주던데, 아니잖아요. 자세히 보면 쿠르베의 그림 속 화가를 여성으로 바꿔놓은 버전이에요. AI로 변형한 결과물인가요?
그건 몇 년 전, AI가 보편화되기 한참 전에 만든 거예요. 쿠르베의 그림을 가지고 만든 포토샵 몽타주죠. 제 작업 중 하나인 ‘Breathe’를 거장의 캔버스 위에 옮겨 넣고, 뮤즈와 화가의 머리를 서로 바꿔놓았어요. 미술사를 통틀어 여성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지거나, 작가가 아닌 뮤즈의 자리로 밀려나 있었잖아요. 그렇게 여성을 다시 창작의 중심에 데려다 놓고 싶었어요.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뭔가요? 그리고 대체로 뭘 그리나요?
유화 물감, 오일 파스텔, 색연필을 써요. 딱히 더 좋아하는 매체는 없어요. 그림 소재로 말하자면, 제가 달라지는 만큼 그것들도 같은 리듬으로 함께 달라져요.
영화를 쓰고 찍고, 그림을 그리고, 부쉐론 같은 하우스의 앰배서더로 활동하고, 하지만 의식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그런 삶 속에서 진정 큰 행복감을 느끼는 때는 뭘 하고 어떤 시간을 보낼 때인가요?
친구들과 함께 웃을 때, 남자친구와 나란히 누워 있을 때, 부모님과 인생 이야기를 나눌 때, 아니면 제 프로듀서 실뱅 코르베유와 영화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럴 때 제일 행복합니다.
한창 영화를 편집하는 시기지만 여름철 바캉스는 사수하겠죠. 곧 다가올 바캉스 때 계획은 뭔가요?
캐나다에 있는 호숫가에서 남자친구랑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요! 완벽한 여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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