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새로운 시대

명수진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막한 샤넬의 새로운 시대.

12개의 행성이 떠 있는 태양계에서 샤넬이 쌓아 올린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했다. 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의 세계관은 하우스의 코드를 재해석한 동시에 자유롭게 확장되고 있었다.

지난 2024년 12월, 샤넬이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를 선임했다고 발표하자 빅뱅이 시작됐다. 이는 패션계의 아티스틱 디렉터 교체 러시의 정점을 찍었다. 샤넬에는 115년의 역사 동안 단 4명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있었다. 창립자인 가브리엘 샤넬(활동 1910~1939, 1954~1971) 이후 칼 라거펠트(1983~2019)가 36년간 자리를 지켰고, 칼 라거펠트의 오른팔이었던 버지니 비아르(2019~2024)를 거쳐 메종 역사상 네 번째 디자이너로 마티유 블라지가 임명된 것이다.

그러니까 샤넬로서는 칼 라거펠트 이후 처음으로 외부에서 수석 디자이너를 영입한 것으로, 이는 샤넬이라는 거대한 하우스가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에 나선다는 신호탄이었다. 샤넬의 인하우스 크리에이션 스튜디오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덕분에 마티유 블라지에게는 10개월 동안 차분히 데뷔 쇼를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

샤넬의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인비테이션에는 어떤 힌트도 없이, 하우스를 상징하는 작은 집 모양의 은색 펜던트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미니어처 하우스의 유리창 너머로 쇼의 시간과 주소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가는 가운데, 샤넬은 컬렉션을 바로 하루 앞두고 소셜미디어에 사진가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가 촬영한 흑백 티저 이미지를 공개했다.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깃털 귀걸이를 한 여성의 뒷모습, 커버를 씌운 셔츠, 남성적 브로그 슈즈와 함께 옷이 걸쳐진 의자가 있었다.

10월 6일 월요일 저녁 8시, 파리 그랑팔레에는 약 2,400명의 게스트가 모였다. 잘 알려졌듯 그랑팔레는 샤넬이 2005년부터 쇼를 열어온 상징적 장소로, 몇 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2025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샤넬은 그랑팔레 복원 프로젝트에 2,500만 유로를 기부했고, 정문 석재에 ‘CHANEL’을 새길 만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장소다.

제니
그레이시&앙젤
릴리 로즈 뎁

샤넬은 이런 상징적인 공간을 거대한 태양계로 꾸몄다. 지름 15m에 달하는 태양을 포함해 12개 행성이 런웨이 위로 펼쳐졌고, 광택 있는 검은 레진 바닥이 색을 반사하며 은하수 같은 착시를 연출했다. “첫 샤넬 쇼에서 시간 너머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싶었고, 샤넬 하우스의 소중한 주제인 ‘별’에 매혹됐다”는 마티유 블라지의 설명처럼, 이 아이디어는 시공간을 초월해 샤넬의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데려갈 참이었다. 블랙핑크 제니, 마고 로비를 비롯해 샤넬 No.5 향수의 모델인 니콜 키드먼까지, 샤넬을 대표하는 빛나는 셀럽들이 태양계의 프런트로에 앉았다. 그리고 쇼가 열리기 바로 전날 새로운 앰배서더로 발표된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아요 에데비리도 이들과 함께 프런트로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순간을 지켜봤다.

마고 로비
니콜 키드먼
틸다 스윈튼, 페드로 파스칼
아요 아데버리

2026 S/S 시즌 샤넬 컬렉션은 세 가지 주제로 전개됐다. 오랜 세월 여성에게는 착용이 금기시된 팬츠를 즐겨 입은 마드모아젤 코코의 전복적 옷장에서 출발한 ‘역설(Un Paradoxe)’, 샤넬의 일상적 우아함과 클래식 코드에 대한 찬사를 담은 ‘하루(Le Jour)’, 그리고 샤넬의 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편적 가치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보편성(L’Universel)’. 마티유 블라지는 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통해 샤넬의 가치를 재해석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오프닝은 ‘역설(Un Paradoxe)’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매니시한 회색 플란넬 팬츠 슈트의 등장은 일반적인 예상을 깬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매니시 슈트의 전형도 아닌, 클래식 테일러링에 대한 아름다운 반항의 상징처럼 보였다. 마티유 블라지가 실제로 자신의 블레이저를 잘라 단추를 바꿔 가며 제작했다는 후문도 흥미롭다. 보이 카펠의 옷을 빌려 입던 가브리엘 샤넬의 이야기를 동시대로 이입해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시작이었다. “여성들에게 샤넬을 어떻게 입을지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마티유 블라지의 말처럼, 남성적 뉘앙스를 더한 룩은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다.

카디건과 랩스커트의 조합은 화려하면서도 일상적인 편안함이 인상적이고, 허벅지까지 깊게 트인 로라이즈 미디스커트는 가브리엘 샤넬이 즐겨 입던 저지 드레스의 분방함을 느끼게 했다. 1920년대풍 실크 스커트에 힘을 툭 뺀 듯 티셔츠 혹은 폴로셔츠를 믹스 매치한 룩, 금색 비즈를 장식한 시스루 톱과 란제리, 실크 미디스커트에 남성적 옥스퍼드 슈즈를 더한 ‘역설’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새롭게 선보인 셔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샤넬은 이번 시즌, 파리 방돔 광장의 유서 깊은 셔츠 메이커 ‘샤르베(Charvet)’와 협업했다. 보이 카펠은 샤르베 셔츠만 입었고, 가브리엘 샤넬은 자연스럽게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이 서사에 매료된 마티유 블라지는 메종을 설득해 협업을 성사시켰다. 쇼에서는 전통적 남성복 비율을 따른 턱시도 셔츠, 드레스 셔츠, 크롭트 셔츠 등을 선보였고, 셔츠의 허리 부분에 1920년대 가브리엘 샤넬이 사용한 서체로 ‘Chanel’ 자수를 넣었다. 또한 셔츠 밑단에 샤넬의 시그너처 메탈 링크 체인을 더해 라인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이브닝 웨어로서의 가능성도 부각했다.

관객들이 새로운 셔츠의 등장에 시선을 빼앗길 즈음, 1992년 독일의 유로댄스 그룹 스냅!이 발표한 ‘리듬 이즈 어 댄서(Rhythm Is a Dancer)’가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흐르며 런웨이에 활력을 더했고, 배우이자 샤넬의 앰배서더인 마리옹 코티야르가 내레이션을 통해 가브리엘 샤넬과 블라지가 나누는 상상의 대화를 들려줬다. ‘자유’를 주제로 한 대화 속에는 ‘샤넬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로맨틱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샤넬이 오랫동안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에 투자해 구축한 공방 네트워크는 마티유 블라지의 창작 세계에 또 다른 토대가 됐다. 그는 아틀리에와 함께 새로운 소재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투피스 스커트 슈트는 어느 때보다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샤넬의 상징인 까멜리아, 바로크 진주, 밀단 모티프는 조각처럼 정교하게 거듭났다. 특히, 까멜리아는 스커트와 재킷에 예상치 못할 정도로 거대한 아플리케로 피어나거나, 단출하게 니트 슈트에 장식되기도 했다. 화성처럼 이글거리는 레드 컬러 니트 셋업, 감각적인 깃털 장식 볼륨 스커트, 골드 부클레가 반짝이는 니트 슈트 등은 생생하고 야성적인 질감이 돋보였다. 가브리엘 샤넬이 ‘발명’했다고 잘 알려진 리틀 블랙 드레스조차 금색 밀 이삭 장식이나 주름 등을 넣어 세련되게 변주됐다.

샤넬의 아이코닉한 트위드 슈트에 대한 재해석은 쇼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트위드 슈트는 손뜨개 니트, 비즈 장식, 시스루 등 실험적인 직조 방식을 통해 모던하게 변주됐다. 비즈를 하나하나 촘촘히 넣은 체크 패턴의 트위드 슈트는 멀리서 보면 일반 트위드처럼 보이는 트롱프뢰유 효과로 마티유 블라지 특유의 위트를 드러냈다. 트위드 슈트 안쪽에 다른 프린트의 실크 안감을 덧대어 드라마틱한 대비를 준 것도 트위드 슈트에 신선한 리듬을 부여했다.

액세서리는 실재와 환상을 동시에 품으며 하우스의 전형적 코드를 영리하게 비틀었다. 클래식 투톤 펌프스는 대비되는 컬러의 토캡을 더하거나 발끝을 스퀘어 형태로 변형해 신선함을 안겼다. 태양계 세트와 호응하는 천체 모티프의 미노디에르(Minaudière)와 샤넬 박스를 연상시키는 블랙 앤 화이트 미노디에르는 SNS에 바이럴되기 딱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화제가 된 ‘크러시드 2.55’는 플랩에 와이어를 넣어 반쯤 열린 상태와 구김이 의도적으로 유지되도록 설계했다. 이는 오래 사랑받은 물건의 시간성을 시각화하려는 의도로 마티유 블라지는 쇼 노트를 통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그 시간의 층위에 관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즌 가방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실용적인 면이 돋보였다. 1990년대의 상징적 아이템인 슈퍼모델 토트백은 퀼팅을 걷어내고 레더 스트랩으로 업데이트됐고, 풀플랩에 CC 로고를 전면 배치한 메신저백은 프런트로의 켄들 제너가 이미 착용하여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빈티지 무드를 더한 슬라우치 호보백, 시그너처 체인 숄더 스트랩을 더블 가죽 스트랩으로 교체하고 퀼팅을 대담하게 삭제해버린 플랩 백, 스웨이드 소재의 오버사이즈 더플백, 길쭉한 톱핸들을 장착한 토트백 등 성별 구분 없이 들기 좋은 담백한 취향의 가방이 많았다.

총 77벌의 의상이 지나간 피날레에서, 모델 아와르 오디앙(Awar Odhiang)은 흥겨운 몸짓과 박수로 무대를 채웠다. 샤넬 디자인팀에서 작업하는 동안 ‘피냐 콜라다’라는 애칭으로 부른 실크와 깃털 플라워 카니발 스커트를 입고 그녀가 마티유 블라지와 진한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이번 패션위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쇼가 끝난 직후 SNS에는 쇼를 마친 모델들이 백스테이지에서 함께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마티유 블라지는 “이번이 마지막 컬렉션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무한한 가능성의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정규 시즌 외에도 공방 컬렉션과 오트 쿠튀르로 확장될 샤넬의 새로운 유니버스가 이제 막 열린 것이다. 마티유 블라지는 연간 약 10개에 달하는 샤넬 컬렉션을 어떤 모습으로 변주할까? 이미 12월, 다음 쇼의 무대로 뉴욕이 예고되어 있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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