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에디터 9인의 패션위크 리뷰 – 파리

김현지

격전지 못지않은 치열함으로 패션위크 현장을 생생히 담은 <더블유> 에디터 9인의 사대 도시 기록

PARIS

2024.02.26 ~ 03.05

쇼장 속 스크린을 채운 콘텐츠

이번 파리 컬렉션 무대장치 중 꽤 인상적인 트렌드는 거대하고 웅장한 무대장치보다는 LED 스크린을 활용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영상으로 펼쳐 보여줬다는 것. 발렌시아가는 인플루언서의 ‘Get Ready with Me’ 동영상, 몽환적인 일몰, 틱톡의 끝없는 스크롤로 가득 찬 밝은 조명을 빠른 화면으로 보여주었는데, 이는 우리가 하루에 엄청난 분량의 이미지를 소화하는 소셜미디어 중심의 세계에서 사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움직이는 화면의 빠른 속도감, 켜켜이 쌓인 직물의 겹으로 콘텐츠 과부하와 물질적 과잉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그 밖에 샤넬은 사진가 듀오 이네즈&비누드가 배우 브래드 피트, 페넬로페 크루즈와 함께 찍은 클래식한 영상을 무대장치로 활용했으며, 벨기에계 미국인 예술가 세실 B. 에반스(Cécile B. Evans)가 제작한 비디오 설치 작품을 전시한 미우미우의 쇼장에서는 주인공을 맡은 구슬라지 말란다(Guslagie Malanda)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런웨이 위에 선 셀럽

축하해요 잉크

A부터 Z까지. 레터링 프로젝트로 컬렉션을 전개한 이혜미 디자이너의 잉크(Eenk) 컬렉션이 이번 시즌 마지막 알파벳인 Z를 ‘Z for Zero to One’이라는 주제로 팔레드도쿄에서 펼쳐졌다. 26번의 컬렉션을 통해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고 다양한 라인으로 컬렉션을 확장하며 국내 여성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드높인 그녀는 다시 A로 시작하는 아카이브 컬렉션 준비를 앞두고 있다.

맥퀸, 끌로에 데뷔 쇼

알렉산더 맥퀸

ALEXANDER MCQUEEN

알렉산더 맥퀸의 션 맥기르는 명확하고 정밀하면서도 늘 창의적인 맥퀸의 슈트를 거친 매력을 한껏 담은 컬렉션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구조적이고 건축적인 옷을 짓는 테일러로서의 알렉산더 맥퀸, 그 견고한 아이덴티티 안에서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시대에 맞게, 그리고 조금은 거칠게 표현했다. 알렉산더 맥퀸의 1995년 여름 쇼, ‘the Bird’를 찾아보면 션 맥기르가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이야기, 그의 비전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끌로에

CHLOE

끌로에 여성의 본질을 되찾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자유로움, 진정성을 강조하는 체메나 카말리의 데뷔 쇼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한동안 정체성을 잃고 개인의 취향만 반영된 쇼에서 벗어나,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파리지엔 시크를 다시금 부활시켰다. 이제 동시대적 감각을 추가해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며 한발 더 나아간 모습이 두 번째 숙제가 될 듯.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빡빡한 쇼 일정 속, 쉴 기회를 만들어준 마린 세르. 파리 12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그라운드 컨트롤’에 쇼장을 세운 마린 세르는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컬렉션을 준비했다. 카페, 레스토랑, 플라워 숍 등이 자리한 공간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표현한 것. 시그너처인 반달 패턴이 돋보이는 다양한 룩을 입은 채 아기와 함께 외출하고, 피자를 사고, 장을 보기도 하는 등 유쾌한 패션 신을 완성했다.

패션위크 속 꽃꽂이

패션위크를 다니다 보면 브랜드 특유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꽃꽂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패션위크 일정 속 오아시스 같은 꽃꽂이 컬렉션.

컬렉션과 공연 사이

예술적인 안무팀, ‘Sons of Sissy for Vivienne Westwood’의 퍼포먼스로 쇼를 시작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발소리, 채찍, 도끼, 손발 터치로 만드는 비트와 사운드는 사뭇 생소했지만 곧 모델의 워킹이 이어졌고 새로운 리듬감이 만들어졌다. 샘 스미스의 깜짝 등장, 피날레로 갈수록 고조되는 사운드는 마치 유럽의 한풀이 장단처럼 느껴져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생로랑 X 유르겐 텔러 북 사인회

파리 그랑팔레 에페메르에서 열리는 사진가 유르겐 텔러의 전시를 생로랑이 후원하며, 한정판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파리 컬렉션 기간에 생로랑 바빌론에서 판매되었는데, 출간을 기념해 북 사인회도 진행했다. 쇼와 쇼 사이에 틈을 내 찾아간 생 로랑 바빌론에서 유르겐 텔러와 그의 아내를 만났다. 그의 아내가 우리에게 건넨 첫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유르겐이 한국에서 유명합니까?” 한쪽에 마련된 유르겐 텔러의 북 컬렉션에서 레어한 책을 ‘겟’하는 재미까지 있었던 즐거운 경험.

런웨이는 미술관

로에베의 JW 앤더슨은 유명 인사들이 수집한 미국의 화가 앨버트 요크(Albert York)의 그림을 배경으로 계급에 대한 탐구를 반영한 쇼로 시선을 모았다. 명도가 다른 세 가지 초록색으로 꾸민 미로 같은 공간은 흡사 갤러리를 연상시켰고,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꽃 정물화 18점을 전시했다. 두 시즌 연속 자신의 아파트에서 쇼를 선보이는 릭 오웬스. 아파트에는 그의 그로테스크한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과 여백으로 가득하다.

쉬는 시간

쉬더라도 자극을 줄 수 있는 공간에서! 파리 몽테뉴 30번지 메종 디올 스토어 1층에 있는 디올 카페에서 숨 고르기 시간을 가졌다. 디올의 카나주 패턴이 음각된 글라스에 콤부차를 마시고 충전 완료!

그 노래

컬렉션의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요소, 음악이 주는 효과는 쇼가 전달하려는 감동을 결정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번 시즌 가장 인상 깊었던 사운드트랙은? AIR의 음악이 런웨이 전반을 지배한 샤넬(‘섹시 보이’가 등장했을 때의 희열은!),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를 믹싱한 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한 미우미우, 프로듀서 Ozmusiqe가 도파민 폭발 사운드트랙을 들려준 베트멍 등이다. 컬렉션만큼이나 음악을 기대하게 하는 드리스 반 노튼은 샤데이의 ‘하운트 미’로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을 들려주었다.

기발한 초대장

패션위크의 첫 시작은 단연 초대장이다. 브랜드의 인비테이션을 보면 쇼의 키워드나 주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번 시즌 시선을 사로잡은 기발하고 신선한 초대장을 공개한다. 핫소스를 모티프로 한 이자벨 마랑과 이베이에서 도착한 택배에서 영감 받은 발렌시아가, 통통 튀는 탁구공을 보내온 언리얼에이지 등 저마다 남다른 개성을 표현했다.

무대 위 승부사

불이 켜지자 커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실루엣. 이어 역동적으로 워킹하는 모델들이 등장한다. 이번 시즌 뮈글러 컬렉션은 거대한 세트, 조명 등과 함께 휘황찬란한 무대장치로 시선을 압도했다. 뮈글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담함과 관능 그리고 섹시함이 쇼의 퍼포먼스와 함께 어우러져 절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과일이 주인공

평범한 과일이 런웨이에서 목격됐다. 보르도의 포도밭 풍경을 티저로 선공개한 발망은 역시나 포도를 모티프로 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가방과 이어링 등으로 변신한 포도송이는 그 자체로 탐스러웠다. 쇼장 한가운데를 크게 차지한 사과에 영감 받은 세실리에 반센도 있다. 욕망을 묘사한 사과를 꼭 쥐고 워킹하거나 한 입 베어 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과일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파리 패션쇼 나들이

큰 함성과 플래시 세례를 따라가보면 그곳엔 늘 한국 셀러브리티들이 있다. 디올의 지수와 민규부터 생 로랑의 로제, 꾸레쥬의 있지, 로에베의 승민과 지젤, 알렉산더 맥퀸의 아이엔, 샤넬의 제니, 미우미우의 장원영과 민니, 모모, 루이 비통의 필릭스와 배두나, 나연, 혜인 그리고 리사 등등. 패션위크 시즌마다 역대급 참석률을 보이고 있는 한국 셀럽을 직접 마주하니 가히 감격적이었다.

도라에몽이 왜 여기서 나와

도라에몽의 대나무 헬리콥터를 쓰고 쇼를 본다? 초현실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언리얼에이지 컬렉션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라에몽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이번 시즌은 사람들을 잠시 동심의 세계로 인도했다. 모델이 입은 의상과 똑같이 화려한 그래픽과 색감을 입은 다양한 오브제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패션 그 이상의 기발한 세계를 완성한 그들의 파격적이고 매혹적인 상상력에 박수를!

리씨로 보이는 것들

쇼가 끝나고 컬렉션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리씨(Re-See) 이벤트. 내 마음속 일등 아이템은 로에베의 오버사이즈 카고 팬츠와 꽃무늬 라이딩 부츠, 디올의 구슬 장식 반지, 에르메스의 스터드 장식 드레스, 지방시의 테일러드 코트와 미니 보우 부아유 백, 그리고 델보의 에어레스 백.

마크 로스코의 시간

외관만으로도 압도적 존재감을 자랑하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시간을 내는 게 아깝지 않은 장소다. 작년 10월부터 열리고 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회고전은 기회만 되면 보려고 벼르던 전시라 패션위크를 앞두고 제일 먼저 올렸던 계획. 인기 작가인 만큼 사람은 많았지만 그의 초기작부터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두루 전시해 문화적 감성을 한껏 충전했다.

에디터 | 김신, 이예진, 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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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이예진, 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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