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유통기한’이 있다. 2022년, 개봉 타이밍을 엿보는 한국 영화는 100여 편이다. 점점 잊히고 있는 극장과 스타 감독들이 만든 영화는 병목 현상을 피해 관객에게 원활히 가닿을 수 있을까?
질문 하나. 2022년에 극장 문을 두드릴 한국 영화 편수는 얼마나 될까? 지난해 극장에서 개봉한 대형 배급사의 한국 영화 숫자는 20~30편(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이다. 오미크론까지 극성을 부리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적거나 비슷한 수준이 아니겠냐고? 그렇지 않다. 놀라지 마시라. 올해는 적게는 80~90편, 많게는 100여 편에 이르는 한국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그중 제작비 규모가 80억원 이상인 영화만 해도 무려 70여 편이다. 이들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극장 시장이 침체된 산업 상황에서 새로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개봉이 연기된 영화와 지난해 촬영을 막 끝낸 영화를 합친 숫자다.
영화감독을 포함해 많은 영화인이 이미 OTT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준비가 된 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영화는 역시 박찬욱, 최동훈, 류승완, 김태용, 윤제균 등 스타 감독들의 신작이다. 우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지난 연말 색보정(D.I.) 작업을 끝으로 후반 작업을 마무리했다. 전작 <아가씨> 이후 5년 만의 한국 영화이자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다.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난 뒤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정도로만 알려졌다.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등 박찬욱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가 <헤어질 결심>에도 박 감독과 함께 각본을 맡았다.
“극장가를 살릴 유일한 구세주가 있다면 그건 <외계+인>이 될 것이다.” 감독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표현이지만, 이런 말이 나올 만큼 한국 영화계가 ‘흥행 불패’ 최동훈 감독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전작인 ‘천만 영화’ <암살> 이후 내놓는 그의 신작 <외계+인>은 <신과 함께> 시리즈처럼 1, 2부가 동시에 제작됐다.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과 외계인이 출몰하는 2021년 현재 사이에 시간의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다. 지난해 4월, 13개월간의 긴 촬영이 끝났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 <그녀의 연기> 이후 9년 만에 장편 영화로 돌아왔다. 그의 신작인 SF 영화 <원더랜드>는 세상을 떠난 가족, 연인과 영상 통화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박보검, 배수지, 정유미, 최우식 그리고 탕웨이가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촬영 전부터 화제가 된 바 있다. 지난해 <모가디슈>로 361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극장가에 숨통을 불어넣은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도 올해 개봉할 예정이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밀수 범죄에 휘말리는 해녀들의 이야기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등 여러 배우가 출연하는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 지난 10년 동안 꾸준하게 많은 열성 팬들로부터 사랑받은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 김한민 감독이 <명량> 이후 내놓는 이순신 장군 연작 <한산 : 용의 출현>과 <노량 : 죽음의 바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시민 5명을 주인공으로 한 슈퍼히어로물인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첩보액션영화인 이해영 감독의 <유령> 등도 개봉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한국 영화인 <브로커>도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브로커>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람이 익명으로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베이비 박스’를 둘러싸고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아이유)이 출연하고, <기생충> <버닝>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을 찍은 홍경표 촬영감독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감독의 국적 때문에 일본 영화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 영화는 <검은 사제들> <마스터> <가장 보통의 연애> <#살아있다> 등 많은 영화를 만든 영화사 집이 제작하고, CJ ENM이 투자&배급하는 한국 영화다.
스타 감독의 신작만 이 정도다. 눈을 좀 더 돌려보면 개봉을 앞둔 영화는 더 많다. 실화나 실존 인물을 영화로 재구성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2007년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활동을 하러 간 한국인 23명이 아프간 무장단체 탈레반에 피랍된 실제 사건을 영화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김형주 감독의 <승부>는 조훈현(이병헌) 9단과 그의 제자 이창호(유아인) 9단의 대결을 통해 인생과 사람 이야기를 그려낸다. 흥행하거나 관객에 좋은 인상을 남긴 영화의 속편도 많다. 이상용 감독의 <범죄도시 2>는 마석도 형사(마동석)의 활약을 그린 <범죄도시>의 속편이다. 이석훈 감독의 <공조 2 : 인터내셔날>은 남북 형사들의 공조를 그렸던 <공조>의 속편이고, 장유정 감독의 <정직한 후보 2>는 여성 정치인(라미란)을 주인공으로 한 정치 풍자 코미디물 <정직한 후보>의 속편이다. 돈을 벌기 위해 남미의 콜롬비아까지 날아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김성제 감독의 <보고타>, 국내 최초의 주크박스 뮤지컬영화인 최국희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수학 공부를 포기한 고등학생(김동휘)과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는 탈북한 천재 수학자(최민식)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드라마인 박동훈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복수를 도모하는 노인(이성민)과 그를 돕는 20대 청년(남주혁)이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이일형 감독의 <리멤버>, 외롭게 세상을 떠난 엄마(김해숙)와 무심히 엄마를 보낸 딸(신민아)이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드라마인 육상효 감독의 <휴가> 등 개봉을 앞둔 한국 영화는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만큼 많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영화 산업이 코로나19로 치른 대가는 크다. 특히 시간과 돈에 엄격한 촬영 현장은 계획대로 진행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 회차가 늘어나면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국내보다 변수가 많은 해외 로케이션 촬영은 더더욱 그렇다. 애초 계획된 촬영 일정을 변경하거나, 현지에서 촬영을 중단했다가 진열을 재정비해 완성한 영화가 적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김성제 감독의 <보고타>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프로젝트다. 2020년 1월, 제작진과 출연진은 서울에서 최소 20시간 거리에 위치한 콜롬비아에서 촬영하다가 갑자기 벌어진 팬데믹 상황 때문에 촬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귀국했고, 이후 프로덕션을 재정비해 한국에서 촬영을 마무리했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원래는 요르단에서 먼저 촬영한 뒤 국내에서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역시 팬데믹 상황 때문에 국내외 촬영 순서를 바꿔야 했다. 이상용 감독의 <범죄도시 2>는 베트남을 무려 다섯 차례나 오가며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다 준비했지만, 촬영일을 사흘 앞두고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 입국을 막으면서 무산됐다. 결국 국내 촬영을 먼저 진행한 뒤 감독을 포함한 소수의 스태프만이 베트남에 들어가 CG 합성에 필요한 소스 촬영을 진행했다.
“전세기를 동원해야 할지도 몰라요.” 지난 연말,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리즈, <터널> 등을 연출한 김성훈 감독과 그의 신작인 <피랍> 진행에 대해 얘기 나누다가 들은 말이다. <피랍>은 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외교관이 납치된 실화를 재구성한 이야기로 하정우, 주지훈이 캐스팅됐다. 원래는 2년 전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됐다가 재개된 프로젝트다. 모로코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해야 했으나 모로코가 셧다운된 탓에 제작진과 배우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해 입국할 길이 없었고, 항공 운항이 중단된 상황에서 <피랍> 팀은 결국 전세기를 동원했다. 모로코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한국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했던 제작진 수송 작전을 벌인 <피랍>은 현재 모로코에서 한창 촬영 진행 중이다.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3사는 2년째 개봉하지 못한 화제작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면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지난여름 시장에서 멀티플렉스 3사가 <모가디슈>와 <싱크홀> 등 대작 영화에 한해 제작비의 절반을 보전하는 결단을 내린 것도 기대작들의 개봉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물론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음에도 관객을 예년의 4분의 1 수준밖에 불러 모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바람대로 코로나 19와 오미크론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만 한다면 극장 산업은 전례 없는 호황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극장가의 기대와 달리 배급사 입장에선 진짜 ‘오징어 게임’에 뛰어드는 형국이다. 현실적으로는 1년 52주 기준으로 외화가 강세인 10주(5월, 여름, 추석, 겨울 시장)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영화가 40주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올해 개봉하는 한국 영화를 80여 편으로 잡아도 매주 최소한 두 편의 한국 영화 간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설, 여름, 추석, 겨울 시장 같은 성수기에는 제작비 규모가 큰 영화들 간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치열해질 것이다. 그로 인해 예전 같으면 성수기에 배치될 영화들이 준성수기로 밀려나면서 제작비가 중간 규모인 영화들 간의 배급 경쟁이 또 치열해질 것이다. 영화마다 2주 정도의 간격을 두고 개봉해야 한다는 협의가 배급사 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제작 중심의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 거라는 우려도 벌써부터 나온다. 어쨌든 그로 인해 중소형 영화가 설 자리를 잃는 양극화 현상은 더 심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1월의 <소울>(204만 명, 배급 디즈니), 3월의 <고질라 VS. 콩>(70만 명, 배급 워너브러더스), 5월의 <분노의 질주 : 얼티메이트>(229만 명, 배급 유니버설픽쳐스), 7월의 <블랙위도우>(296만 명, 배급 디즈니), 9월의 <007 노 타임 투 다이>(122만 명, 배급 유니버설픽쳐스)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지난해부터 각사의 라인업을 차례로 내놓으며 상생하는 배급 전략을 펼치고 있다. 북미 시장의 극장 상당수가 셧다운된 상황에서 좀 더 많은 상영 기회와 상영 기간을 확보해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스튜디오들이 내린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급 전략은 롤아웃 방식이 자리 잡은 북미 시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롤아웃’은 첫 주에 적은 숫자의 개봉관에서 시작해 관객 반응에 따라 스크린 수를 차차 늘려가는 방식을 말한다. 작은 시장에서 개봉 편수가 많아 경쟁이 불가피하고, 첫 주에 최대한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 배급이 자리를 잡은 데다가 코로나19 이후 기대작이 극장 개봉에 몸을 사리는 최근의 한국 극장 산업 환경에서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더군다나 개봉을 더는 연기할 수 없는 투자배급사 입장에선 서로 눈치 보며 어쩔 수 없이 개봉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한다. 예년처럼 관객이 극장을 많이 찾지 않음으로써 좌석 점유율의 한계와 배급사 간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고, 이는 다시 수익률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익률 저하는 소극적인 영화 투자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코로나19 이전보다 파이가 훨씬 작아진 시장에서 한국 영화끼리 제 살 깎아 먹기로 개봉하게 되면 제작비 규모가 작은 중소 영화들은 생존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의 스크린 독과점 현상도 우려된다. 지난 3년 동안 적자 경영을 하고 있는 극장으로선 흥행이 될 영화에 더 많은 스크린을 편성할 가능성이 높다. 작은 영화들은 최소한의 상영 기회도 보장받지 못한 채 극장에서 내려갈지도 모른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현재 투자배급사들이 가지고 있는 라인업 모두가 2022년에 개봉할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현재 라인업의 60~70%만 올해 개봉하고 나머지는 2023년으로 넘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동시에 정책적으로 스크린 독과점 규제나 영화사에 대한 피해 보상 방안,지속 가능한 지원 정책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아무리 기대작이 많아도 극장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관객을 다시 불러 모으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강하다. 일단 너무 큰 손실이 이미 발생했고, 이 손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난2년 동안 관객의 콘텐츠 관람 패턴이 극장에서 안방으로 이동한 건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더 이상 극장 매출에만 기댈 수 없는 산업 환경에서 투자배급사들의 전통적인 배급 방식에도 변화가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도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극장 개봉으로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할 것인지, 아니면 넷플릭스로 간 설경구, 박해수 주연의 영화 <야차>처럼 OTT 공개로 방향을 선회할 것인지 투자배급사들의 고민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올해가 한국 극장 산업에서 중요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글
- 김성훈( 기자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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