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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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90년대 거리를 수놓은 ‘컴뱃 부츠’가 모던함을 장착한 채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탈착 가능한 V 로고 스트랩을 더한 캠프사이트 컴뱃 부츠는 발렌티노 가라바니 제품. 1백79만원.

지난 15년 동안 전개된 트렌디한 슈즈의 변화를 살펴보자면 ‘버라이어티하고도 스텍터클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발목이 온전할까 싶게 높은 킬힐이 거리를 누비더니 어느새 발의 잔혹사에 저항하는 편안하기 그지없는 노힐, 즉 스니커즈가 거리를 평정했다. 그사이 어느 시즌엔 발목 길이의 부티가 대거 등장했고, 또 다른 시즌에는 허벅지를 덮는 길이의 사이하이 부츠가 거리를 수놓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스트리트 패션의 열풍과 함께 하이톱 스니커즈, 블로퍼, 클리퍼, 삭스 슈즈, 어글리 슈즈 등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주니어 에디터 시절, 해외 패션위크 출장이면 꼭 힐을 챙기던 나 역시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힐에서 내려온 지 오래다. 스타일의 방점은 슈즈라느니, 아름다운 슈즈가 날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패션 칼럼에서 늘어놓던 10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시대. 그 편안함에 빠져 있다 보니 스타일의 마무리가 밋밋해 늘 아쉬웠다. 놈코어를 거쳐 스트리트 패션의 진화와 노바운더리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발을 옥죄는 하이패션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뭔가’는 필요했다.

VALENTINO

VALENTINO

GUCCI

DIOR

DIOR

DOLCE &GABBANA

이때 눈에 띈 것이 다름 아닌 워커나 밀리터리 부츠 등으로 불리는 ‘컴뱃 부츠(Combat Boots)’. 이번 시즌, 우선 눈에 띈 건 발렌티노의 시그너처 V 심벌을 장착한 컴뱃 부츠로 특유의 투박한 실루엣을 좀 더 슬림하게 다듬었다. 마치 꽃을 위한 화병 마냥, 발목을 살포시 잡아줄 매끈한 실루엣의 뉴노멀 시대 컴뱃 부츠는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지난 발렌티노 F/W 컬렉션에서 피에르파올로 피촐리가 선사한 룩이 떠올랐다. 나풀거리는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모델들에게 ‘강인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매치한 컴뱃 부츠의 조합은 얼마나 근사한지! 얼마 전, 모델 아이린과 함께한 진주를 메인으로 한 주얼리 화보에서 나 역시 블랙 드레스에 컴뱃 부츠를 매칭한 스타일링을 시도했다. 피에르파올로의 메시지를 상기하며, 그대가 우아함을 지향하더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부드럽고 여린 모습일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한편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역시 현대 여성의 강인함과 개방성, 다양성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디올의 이전 디자이너인 마크 보한이 선보인 1970년대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는 F/W 컬렉션을 설명하며 “그녀들은 스스로를 정의하고 표현하기 위해 패션을 선택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2020년을 살아가는 모던 우먼을 위한 룩에 블랙 컴뱃 부츠를 선택했다.

GUCCI

TOD’S

VALENTINO GARAVANI

ALEXANDER McQUEEN

MIU MIU

ALEXANDER McQUEEN

ROGER VIVIER

이번 시즌, 컴뱃 부츠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당신을 위한 선택지는 많다. 다시 말하자면 90년대를 연상시키는 닥터마틴 컴뱃 부츠의 투박함을 넘어 2020 F/W 시즌 컴뱃 부츠의 변신은 그야말로 다채롭기 그지없다. 알렉산더 맥퀸의 가을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눈에 띈 트레드 부츠는 아웃도어 슈즈나 스트리트를 누비는 스니커즈에 사용되는 러버 소재의 두툼한 아웃솔을 접목했다. 사라 버튼이 늘 테일러드 코트와 정교한 자수 드레스에 매치하는 단단하고 묵직한 부츠를 보다 경쾌하게 변형한 스타일이랄까. 이러한 ‘하이브리드 워커 부츠’는 루이 비통, 미우미우, 프라다, 디올, 발렌티노 등 여러 브랜드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12월호 더블유 유방암 캠페인 화보를 위해 아이즈원의 장원영이 착용한 미우미우의 롱 레이스업 워커 부츠는 더없이 경쾌하고, 프라다가 선보인 미래적인 디자인의 러버 솔에 포켓 장식을 자랑하는 하이브리드 워커 부츠는 특유의 스포티함을 발산한다. 한편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인 성난 고슴도치처럼 스터드 장식을 바짝 세운 로힐 부티는 모던 펑크 스타일을 연출하기에 제격이다. 나아가 루이 비통이 선보인 메트로폴리스 플랫 레인저 부츠는 남는 스트링으로 발목 부분을 칭칭 동여매며 도심의 여행자를 위한 쿨한 스타일을 제안한다.

지난 11월 13일, 유니크폼 부츠를 선보이며 디지털 디제잉 퍼포먼스를 통한 뮤직 나이트를 펼쳐 시선을 집중시킨 발렌티노. 이 유니크폼 부츠는 뒷면에 V로고를 더한 두툼한 굽이 돋보이는 플랫폼 앵클부츠 스타일로, 편안한 엘라스틱 밴드를 더한 채 쿨한 스트리트 무드를 풍겼다. 나아가 연말의 홀리데이 아이템을 눈여겨본다면 로저 비비에 특유의 화려한 브로쉬 버클이 돋보이는 비브 레인저스 스트라스 버클 앵클 부츠는 어떨지. 또 토즈는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다양한 가죽뿐 아니라 울 소재 플래드 패턴이 눈에 띄는 하이킹 부츠 형태의 컴뱃 부츠를 출시했다. 그러니 이번 시즌, 그 투박한 아름다움을 당신의 룩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또각또각’보다 더 매혹적인 ‘저벅 저벅’ 혹은 ‘뚜벅뚜벅’의 파워 워킹으로 말이다.

패션 에디터
박연경
포토그래퍼
박종원
사진
JAMES COCHRANE, COURTESY OF MIU MIU, VALENTINO, ALEXANDER McQUEEN, TOD’S, ROGER VIVIER, GUCCI, DIOR, DOLCE&GABB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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