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휴가’는 평소 감히 시도하기 힘든 시리즈물을 독파할 기회다. 권하는 책들의 첫 문장으로 소개를 시작한다.
앨리스 먼로 컬렉션(웅진지식하우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런어웨이>, <행복한 그림자의 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 <행복한 그림자의 춤> 중 ‘작업실’
글 읽는 속도가 더뎌 쉽게 소설을 시작하지 못하는 자에게 앨리스 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선택이다. 단편소설에 대한 세상의 온갖 수사 중에서 으뜸에 해당하는 표현은 대개 앨리스 먼로 차지다. 단편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그는 2012년 <디어 라이프>를 낸 이후 절필을 선언했지만, 더 많은 여성 서사를 원하는 최근 독자들의 바람에 따라 앨리스 먼로 컬렉션이 출간됐다. 1968년에 나온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2001년 <타임>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한국에는 2006 년 처음 소개된 <떠남>을 다시 번역하고, 당시 빠졌던 세 편을 추가한 <런어웨이> 총 세 권이다. 소설 속 여성들은 일정한 삶의 궤도 안에서 잔잔하게 살다가 문득 슬픔을 느끼거나 사랑을 만나고, 절망하다가도 기쁨을 찾는다. 이 3권을 다 읽는다면 소설 서른두 편을 감상한 셈이다.
앙투안 볼로딘 선집(워크룸 프레스)
<메블리도의 꿈>, <미미한 천사들>
“메블리도는 재차 벽돌을 치켜들었고, 베르베로이앙은 부하에게 머리를 맞는 게 싫어 서둘러 자아비판을 재개했다.” – <메블리도의 꿈>
앙투안 볼로딘은 2018년 <미미한 천사들>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프랑스 소설가다. 그 작품은 4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쓴 작가가 평생 다룬 주제를 압축하고 있어서 그를 만나는 입문서로 적합한데, 소설이 나왔을 때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추천사는 이랬다. ‘우리를 홀리고, 생의 마지막 나날을 경험케 하며, 무호흡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마법 같은 책.’ 프랑스에서는 13년 전 출간된 장편소설 <메블리도의 꿈>이 국내에 막 상륙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인류 종말의 어느 시점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와중, 시공간이 뒤흔들리는 세계에서 주인공 메블리도가 겪는 여정은 오래전 사별한 배우자와 재회하길 앞두고 겪는 악몽과 같다. 작가가 집필을 마무리 지으며 마침표를 찍던 순간 집 발코니 창문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충돌했다고 한 다. 소설 곳곳에 그런 마술적 징조와 이상함이 산재한다. 이왕 악몽이라면, 피로와 두려움이 쌓여가는 우리의 요즘 현실보다 기묘한 서사가 펼쳐지는 소설 속 악몽의 세계로 스며드는 게 낫다.
황석영 중단편전집(문학동네)
<객지>, <한씨연대기>, <탑>, <삼포 가는 길>, <만각 스님>
“그해 여름에 나는 글을 쓸 거처를 찾고 있었다.” – <만각 스님>
20년 전 처음 출간된 황석영의 중단편전집은 할아버지 댁의 서재에 꽂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그것들의 체재와 표기 등을 다듬고, 장정을 산뜻하게 한 전집이 새롭게 태어났다. 황석영의 가장 최근작인 <만각 스님>까지 포함하니 그의 완전한 중단편전집이다. <만각 스님>은 1983년 소설가인 ‘나’가 잠시 머문 암자에서 만난 스님의 사연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황석영은 28 년 만에 발표한 단편에서도, 그러니까 화자가 잠깐의 인연을 회상하는 길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에서도 여전히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녹인다. ‘개인과 문학과 공동체, 한 사람이 세 층위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다 보니 남한과 북한과 세계를 다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이 말은 작가 황석영에 대한 핵심적인 풀이일 것이다. 중단편전집이야말로 황석영이 왜 한국 문학사의 상징적 이름이 되었는지를, 제각각의 재미를 통해 알기 좋은 통로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문학과지성사)
사뮈엘 베케트의 <첫사랑>,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모자>,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제라르 드 네르발의 <실비/오렐리아>
“나는, 옳건 그르건 간에, 시간의 차원에서, 내 결혼과 아버지의 죽음을 연결시킨다.” – <첫사랑> 중 ‘첫사랑’
‘문지 스펙트럼’은 문학과지성사에서 1996년 황순원의 <별>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101권의 책을 펴낸 시리즈다.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이 앞으로도 조명 받을 가치가 있는 5권을 개정 작업 끝에 동시에 선보였다. 이 중 가장 친숙한 이름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뮈엘 베케트다. 그가 시, 시나리오, 평론 등 다양한 글을 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1946년에 나온 단편 모음집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이 반갑다. <꿈의 노벨레>는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이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끈적한 눈빛 대신 “우리는 아마 10초 동안 입을 반쯤 벌린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어.” 같은 문장을 연이어 읽는 건 분명 새로운 기분이다. 5권 모두 만만하게 읽기는 힘든 작가들의 작품이지만, 대가의 세계를 알기 위한 ‘샘플러’ 역할을 해준다. 무엇보다 얇고 가볍다.
니콜 크라우스 장편소설 3종(문학동네)
<어두운 숲>, <사랑의 역사>, <위대한 집>
“내 부고가 쓰일 때. 내일. 혹은 그 다음날. 거기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레오 거스키는 허섭스레기로 가득 찬 아파트를 남기고 죽었다. ” – <사랑의 역사>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견고한 위상을 세운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가 7년 만에 신작 <어두운 숲>을 냈다. 오랜만의 작품 발표라 주목도가 높은 만큼 그의 예전 소설도 새 단장을 하고 동시에 출간됐다. ‘책을 펼치면 갑자기 삶의 모든 소음, 잡담, 사소한 것들,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이 문득 다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게 중요한 세계에 속하게 된다.’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 말은 우리가 좋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큰 이유일 것이다. 신작 <어두운 숲>은 남다른 성취욕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말년에 이르자 삶에 큰 회의를 느끼는 변호사, 그리고 위태로운 결혼 생활 속에서 글쓰기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년의 작가가 삶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이야기다. 서정적인 미스터리 기법으로 사랑에 대해 풀어낸 <사랑의 역사> 는 15년 전 출간 당시 미국에서 화제였고,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로 뻗어나갔다. 동시대 많은 작가들이 이 세 권 모두 ‘역작’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전집(펭귄클래식)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중 ‘스완 댁 쪽으로’
누구나 들어봤지만, 누구도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 하는 그 이름. 완독한 존재가 도시전설처럼 회자되는 ‘독서의 끝’. 번역 문구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더 익숙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이 전집으로 나왔다.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 작품의 완역본 세트다. 펭귄클래식은 2012년부터 이 시리즈를 한 해에 한두 권씩 냈고, 마지막 12권을 낸 후 기념으로 별책부록을 더한 세트 박스를 제작했다. ‘부르주아로 화려하게 살던 주인공 마르셀이 마들렌을 먹다가 무의식중에 어떤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때부터 현재의 시간으로 범람해오는 과거의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 문장으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다. 프루스트는 이것을 미로 같은 구조와 다채로운 묘사가 흐르는 진기한 대작으로 만들었고, 죽기 직전 까지 다듬었다고 한다. 프루스트 전공자, 이형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곁들인 풍부한 주석이 함께한다. 긴 휴가를 이용해 이 전집을 독파하는 용감한 자는 어딘가에 꼭 후기를 올려야 마땅하다.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장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