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위크 다이어리 in Milan
어김없이 돌아온 패션위크. 활기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했던 뉴 제네레이션의 탄생부터, 갑작스레 전해진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의 죽음까지. 더블유 에디터들이 직접 보고 느낀, 환희와 슬픔, 감격과 애도가 공존한 뉴욕, 런던, 밀란, 파리의 생생한 순간들.
R.I.P. 칼 라거펠트
밀란에서 있을 펜디 컬렉션을 약 이틀 앞둔 2월 19일, 한국 시각으로는 오후 8시에서 9시로 넘어갈 즈음 있었던 일이다. 나는 밀란 컬렉션 취재를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고, 무심코 내리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칼 라거펠트의 부고 소식을 발견했다. 지금 가는 이 출장길이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펜디 컬렉션을 보러 가는 길이라니! 54년을 함께한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펜디 쇼는 그의 시그너처인 코냑색 가죽과 모피가 푹신한 크림색 카펫 위에서 펼쳐졌다. 좌석에는 그를 기리는 카드가 놓여 있었고, 쇼 말미에는 칼 라거펠트가 펜디의 룩을 스케치하는 짧은 영상이 공개됐으며, 피날레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가 울려 퍼졌다.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하나의 대명사가 된 그의 유작을 목도할 수 있다는 것에 벅차기도, 가슴 먹먹하기도 한 순간이었다. 잘 가요, 우리의 영웅.
프라다의 시선
2월 20일, 밀란을 대표하는 쇼핑 아케이드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라 2세 갤러리아몰에 위치한 프라다 재단의 갤러리 ‘오세바토리오’에서는 폰다치오네 프라다가 주최하는 전시 <Surrogate. A Love Ideal>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가족의 개념, 로맨틱하고 섹슈얼한 사랑’을 주제로 미국 출신의 작가 제이미 다이아몬드, 엘레나 도프맨의 사진 42점이 걸렸다. 진짜 사람과 가짜 모형을 합성한 독특한 표현 방식은 전시를 찾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동시에 현대인의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10개의 방 탐험
어느덧 세 번째 시즌을 맞은 몽클레르 지니어스 프로젝트는 1017 ALYX 9SM의 매튜 윌리엄스, 영국의 신예 리처드 퀸 등 젊은 디자이너들의 합류로 더욱 동시대적이면서 풍성해졌다. 밀란 중심부에서 살짝 떨어진 한 터널 옆에서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에는 10개의 방이 세워졌고, 그 속에서 각 디자이너의 특성을 살린 프레젠테이션과 쇼가 진행되었다. 매튜 윌리엄스는 정글짐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을 배경으로 몽클레르와 함께한 첫 컬렉션을 선보였고, 리처드 퀸은 특유의 장기인 플라워 프린트로 몽환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한편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쿠튀르적 터치가 돋보이는 옷들로 승부수를 던졌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컬렉션을 위해 각 나라에 파견된 에디터들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패션쇼 티켓 정리. 밀란팀 역시 체크인 후 각자의 이름으로 온 인비테이션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수류탄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거대한 크기의 나무 박스가 ‘구찌’ 쇼 초대장이라는 것이다. 나무 박스 안에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페르소나, 석고 가면이 들어 있었다. 쇼장 앞에는 가면을 들고 줄을 서 있는 ‘패피’들이 모인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런웨이에는 다양한 모양과 컬러의 가면을 쓴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가면 초대장은 바로 쇼의 힌트였던 것.
클래식과 위트
밀란 쇼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이탤리언 특유의 절제된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약간의 재치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번 토즈 쇼가 딱 그랬다. 가죽 소재의 담백한 룩들에 다양한 크기의 가방을 레이어드한 센스가 돋보였다. 프런트로에는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반가운 얼굴 정은채가 자리했다.
떠나요, 스위스로!
밀란 패션위크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레젠테이션을 꼽으라면 바로 발리! ‘스위스로의 여행’을 주제로 하이킹 룩이 주를 이룬 컬렉션을 보여주기 위해 발리는 프레젠테이션장에 커다란 기차역을 세웠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기차칸에는 한층 젊어진 발리의 옷을 입은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공간이 주는 힘과 룩의 무드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순간!
힙 & 쿨 마마
런웨이 쇼가 아닌 프레젠테이션 형식이었음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MM6’ 컬렉션. 그 이유는 사심 외에 여러 가지가 있다. 새하얗게 꾸민 실험실 같은 공간, 그리고 각기 다른 소재의 하얀색이 만나 완성된 순백색 옷들. 일등 공신은 실제 밀란에 거주하는 여성들로 구성된 시니어 모델들이었다. 자유롭게 춤추고 이야기하며 이 백색 공간을 유쾌하게 만든 그녀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힙스터가 아닐까.
뉴 아젠다
이번 시즌 밀란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보테가 베네타’ 쇼가 아닐까?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니얼 리’ 부임 후 처음 선보인 런웨이 쇼이기 때문이다. 인트레치아노 기법에서 진화한 격자무늬를 활용한 룩, 해체적인 니트 드레스, 견고한 가죽 바이커 점프슈트, 그리고 뉴 백까지. 일단은 합격점인 듯하다. 동시대 여자들의 마음을 간파해 지금 당장 입고 싶은 옷을 완성했으니 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이 유난히도 견고한 도시 밀란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완전히 새로워진 대니얼 리의 보테가 베네타,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바다.
언니의 여유
간단한 멘트지만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에게 인사 멘트를 부탁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워낙 바쁜 상황이기도 하고, 디지털 촬영 자체가 불가한 경우도 있어 거절당하기 일쑤이기 때문. 그래서 페라가모 백스테이지에서 1990년대를 휩쓴 톱모델 모델 알렉 웩을 만났을 때도 반가운 마음과 함께 말을 걸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웬걸! 알렉은 에디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고, 장난기 넘치는 인사를 남겨줬다. 피날레 직후 포토그래퍼들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해 백스테이지를 마치 화보 촬영장처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역시’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쉬었다 가실게요
정신없이 바쁜 컬렉션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구찌 쇼가 끝나고 패션 피플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로 유명한 패션 아티스트 임수와를 만났다. 쇼장 앞의 모델을 빠른 속도로 그리는 그녀의 종이를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찰나였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suwa_’라는 계정으로 활동하니 더 많은 작품이 궁금하다면 방문해보시길.
- 디지털 에디터
- 진정아
- 패션 에디터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