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새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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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드시 기억해야 할리우드의 라이징 여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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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린 뉴튼(Kathryn Newton)
아역 배우 출신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섞여 있다. 연기력에 대한 칭찬으로도 쓰이지만 때로 그 말은 어린 시절의 이미지에 묶여 성장하지 못한 배우의 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겨우 4세 때 TV 시리즈에 얼굴을 비추며 데뷔한 캐스린 뉴튼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민한 소녀는 자신의 나이와 상황에 맞는 역할을 적당한 정도로만 맡으며 성장했고, 지난해부터 차근차근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캐스린 뉴튼이 자신의 매력을 뚜렷하게 보여줄 시간을 부여받은 것은 TV 시리즈로, BBC <작은아씨들>에서 에이미 마치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시리즈의 주인공을 금발의 막내 아가씨로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리즈 위더스푼의 반항적인 큰딸로 등장하는 <빅 리틀 라이즈>는 캐스린 뉴튼이 누구의 다음 세대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가 내어주는 역할 대신 스스로 자기가 연기할 역할을 찾기로 결심한 여성 배우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니, 이제 갓 성인이 된 배우로서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지만 이 행운 역시 자신의 보폭으로 착실히 성장하면서 스스로 설 땅을 다져온 캐스린 뉴튼이기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역 배우의 좋은 예로 삼아도 될 만큼 바람직한 성장이다.

플로렌스 퓨 (Florence Pugh)
‘괴물 신인’이라는 표현은 주로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남자 신인 배우에게만 허용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에서 플로렌스 퓨의 연기를 보면, 이 표현은 퓨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여자 버전으로 그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여성을 억압하던 19세기를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간 여인 캐서린은 플로렌스 퓨의 연기에 힘입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영화 촬영 당시 열일곱 살에 불과했던 플로렌스 퓨는 순진한 소녀에게 광기와 욕망, 원한과 살기가 깃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냈고,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던 작품은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때부터 플로렌스 퓨에게 ‘괴물 신인’이라는 칭호가 따라온 것은 물론이다. <레이디 맥베스>를 본 박찬욱 감독은 “여배우를 보는 눈만은 나를 믿어달라”는 말과 함께 그해 최고의 신인 배우로 플로렌스 퓨를 꼽은 것은 물론, 곧바로 자신의 다음 프로젝트인 BBC 드라마 <더 리틀 드러머 걸>에 캐스팅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마이클 섀넌 등 베테랑 배우들 사이에서 제목 속 소녀가 될 플로렌스 퓨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까. 또한 플로렌스 퓨는 그레타 거윅의 신작 <작은 아씨들>에서 무려 메릴 스트립, 엠마 스톤, 시얼샤 로넌과 만날 예정이다. 발견되지 않을 수 없는 괴물 같은 재능이 더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날 일만 남았다.

헤일리 루 리처드슨 (Haley Lu Richardson)
<콜럼버스>는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본 적 없던 소녀의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다. 대책 없는 하이틴 로맨스나 또래와의 갈등, 폭력, 마약, 섹스의 혼돈 없이도 조용히 아파하다 스스로 서는 방법을 배워 이윽고 어른이 되는 소녀의 얼굴. 이 성장에 헤일리 루 리처드슨보다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 <지랄발광 17세>에서도, 리처드슨은 또래보다 성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이 모난 영혼으로 세상을 찔러가며 요란하게 사춘기를 지날 때, 리처드슨이 연기한 크리스타는 자기 자신만의 숙제를 풀어가며 혼돈의 시간을 지나간다. 평생을 살아온 도시에 도착한 낯선 남자와의 만남이라는 <콜럼버스>의 설정이 위태롭거나 위험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지 않는 까닭은 존조라는 배우의 젠틀한 매력 덕분이지만, 절대 자신을 섣불리 내던지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리처드슨의 단단함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녀는 반짝여요.” 진(존조)이 케이시(리처드슨)에 대해 말할 때의 반짝임은 부서지는 햇살의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어떤 아픔이나 상처를 딛고서야 갖게 되는 진주의 빛과 같은 것이고, 리처드슨이 꾸준히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반짝임이다. 배우가 되기 전까지 댄서였던 그가 어떤 꾸밈도 없이 자동차 헤드라이트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들이닥치는 삶의 슬픔을 조심스레 건너간 뒤, 다른 세상을 보는 눈을 뜬 소녀의 춤으로.

에일리 하르보에 (Eili Harboe)
접근성의 문제로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7년 가장 특별한 드라마 시리즈 중 하나는 노르웨이에서 나왔다. 노르웨이의 <스킨스>로 불리던 <스캄> 덕분에, 전 세계가 노르웨이의 10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영화 <델마>가 있다. <라우더 댄 밤즈>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고 할리우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의 성공적 데뷔를 마친 뒤, 노르웨이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색깔을 더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모국어로 작품을 만들기를 원했고, 그 작품이 바로 <델마>다. 이 영화에 또 하나의 재능, 에일리 하르보에가 등장한다. <델마>는 동성의 친구에게 욕망의 감정을 품으면서 갑자기 염력을 갖게 된 소녀의 어둠을 그린, 델마 역할의 배우로 완성되는 작품이다. 사실 <델마>의 타이틀롤이자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 에일리 하르보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열 손가락을 채 채우지 못하는 필모그래피, 노르웨이어로만 연기해왔다는 것, 하지만 영어 연기도 가능하다는 것 정도다. 이 사소한 정보와 <델마>에서 보여준 충격적인 연기를 종합해보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아마도 곧 할리우드에서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것. 스웨덴의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레베카 퍼거슨처럼, 노르웨이를 생각할 때 에일리 하르보에의 얼굴을 떠올릴 날이 머지않았다.

릴리로즈 뎁(Lilyrose Depp)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의 딸, 엄마의 뒤를 이은 샤넬의 뮤즈. 릴리로즈 뎁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붙어 다닌 꼬리표다. 거기에 200만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10대 셀레브리티라는 설명도 이어진다. 탄생부터 화제였던 소녀의 10대 시절에는 내내 축복과 찬사, 그 이상의 질시와 악플이 따라다녔다. 릴리로즈 뎁에게 유명하고 아름답다는 것 이상의 특별한 것이 있을까? 뎁은 별로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라고 원하는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며,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더 댄서>를 통해서는 칸에 다녀왔고, <플래니테리엄>에서는 나탈리 포트먼과 자매 역할로 연기하는 경험을 했다. 흥미롭게도 뎁은 ‘배우가 되었으니 다른 꼬리표는 이제 그만’이라든가 ‘나도 평범한 사람’과 같은, 셀레브리티 2세의 통과의례와 같은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성장해왔다. 뎁은 패션과 뷰티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일도, 10대들의 ‘잇 걸’이 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후 온갖 억측이 따라올 것을 알면서도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인정한 캠페인에 참여하고, 거식증에 걸렸던 과거를 고백하며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 재고를 요청하는 등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한다. 차기작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내년에 공개될 <더 킹>이다. 이 대작 사극에 왕자 할(티모시 샬라메)과 결혼할 프랑스 공주로 등장할 예정이니, 공주가 되고 싶었다는 어린 시절 꿈을 현실에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루어낸 셈이다. ‘You Know Me and You Don’t’라는 밀레니얼을 위한 샤넬의 새 캐치프레이즈는 마치 릴리로즈 뎁을 위한 것만 같다. 세상 모두가 지켜본다 해도 ‘당신이 모르는 내가 있다’는 당당함으로 뎁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윤이나(칼럼니스트)
아트워크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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