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소매에 숨어있는 마법의 주문

이예지

소매에 숨어 있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마법의 주문에 대하여

여성 프랑켄슈타인을 그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을 보았다면, 괴이하면서도 매혹적인 캐릭터 ‘벨라 백스터’로 변신한 엠마 스톤에게 한 번쯤 넋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의 깊고 파란 눈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동작도, 거침없는 언사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지만 사실 진정한 신스틸러는 그녀의 어깨 위로 솟아오른 풍성한 소매다. 란티모스 감독은 영화 <레이디 맥베스>와 드라마 <더 그레이트>에 참여했던 의상 디자이너 홀리 워딩턴(Holly Waddington)에게 거듭 강조했다. “소매에 모든 걸 걸어야 해요.” 그 결과, 아주 정교하면서도 풍성하게 부풀린 소매가 탄생했다.

영화 <가여운 것들>에 등장한 의상은 빙산의 일각일 뿐, 패션계는 이미 소매에 중점을 둔 디자인을 내세우며 새롭고 뜨거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의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도 크게 주목 받지 못한 소매에 힘을 준 스타일이 최근 런웨이와 레드카펫, 영화는 물론, 길거리까지 점령했으니 말이다. 특히 풍성한 소매는 작년 F/W 런웨이 무대를 시작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는 동그랗게 부푼 디자인을 선보인 톰 브라운과 손등을 넘어 바닥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을 제시한 발렌시아가의 런웨이를 꼽을 수 있다. 2023년 5월에 열린 메트 갈라(Met Gala)와 아카데미 시상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전자에서는 마크 제이콥스의 보디슈트를 입은 켄들 제너가 시퀸이 장식된 매력적인 블랙 롱 슬리브로 플로어를 휩쓸었고, 후자에서는 플로렌스 퓨가 볼륨감 넘치는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켄들 제너 못지않은 과감함으로 시선을 모았다. 화제의 스타일링을 공개한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슬리브가 아웃핏 그 자체였다는 것.

봄을 맞아 소매 트렌드는 한층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진화하는 추세다. 릭 오웬스는 고유의 맹렬한 분위기를 담은 소매를, 스텔라 매카트니는 바람에 흩날릴 듯 하늘하늘한 소매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발렌시아가는 완벽한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을 제시했고, 루이 비통과 카이트는 레트로 감각을 살린 화려한 룩에 집중했다. 아방가르드한 실루엣을 소화해낸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도 눈에 띈다. 특히 커리어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소매 스타일을 제시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을 보면 모던함이 깃든 패션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FIT(뉴욕 패션기술대학교) 뮤지엄의 코스튬 및 액세서리 큐레이터인 콜린 힐(Colleen Hill)은 다채로운 소매 디자인을 보며 “디자이너들이 본인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흐름은 뮤지엄이 2024년 전시 프로그램 ‘스테이트먼트 슬리브(Statement Sleeve)’를 기획한 시기와도 부합한다. 해당 전시에서는 소매가 어떻게 “지위, 취향, 그리고 성격을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약 80점의 소장 전시품을 공개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압도적으로 화려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만큼 기능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겠죠. 하지만 자신을 한껏 돋보이게 해줘요. 심플한 칵테일 드레스에 이런 풍성한 소매가 더해진다면, 단연 그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힐의 설명이다. 줌 모임이 활성화되고 스마트폰 기반의 소비문화가 도래한 시대에 화려한 슬리브는 작은 화면 속에서도 개성을 강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자리한다. 또한 힐은 옷이 옷장에 걸려 있을 때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하는 디테일이 소매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소매는 옷 전체를 대변하는 요소이며,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소매를 바탕으로 옷을 식별한다.

소매에 힘을 주는 트렌드는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회 준비를 위해 연구를 시작한 힐은 런던 페트리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Petrie Museum of Egyptian Archaeology)의 컬렉션에서 장식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어깨 부분에 주름을 잡은 리넨 드레스 한 벌을 발견했다. FIT의 컬렉션은 수천 년에 걸친 역사를 모두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리본으로 보디스에 고정되어 있던 1770년대의 탈착식 소매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특정 시대나 장소에 묶이지 않도록 연출한 <가여운 것들>의 의상을 닮은 1830년대 레그 오브 머튼 소매까지 살펴볼 수 있다.

“다채롭고 매력적인 소매 디자인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힐이 설명한다. “내 몸에 꼭 맞는 단 하나의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 소매는 어깨나 팔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어떤 스타일을 시도하든, 소매는 착용자를 돋보이게 할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거예요.”

EMILIA PETRAR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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