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천 국제영화제에서는 전도연 특별전이 열렸다. 20년 필모그래피를 망라하는 이 특별전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영화를 너무나 하고 싶은데 작품이 없어 속상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칸의 여왕, 천하의 전도연이 말이다. 가장 최근 영화인 2015년 작 <남과 여> 때, 더블유와의 인터뷰에서 전도연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드는 데 대한 갑갑함을 토로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매일 출근하듯이 영화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향후 2년은 출연작이 정해져 있는 남자 배우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성별을 떠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 실력을 인정받고 일가를 이룬 배우가, 이처럼 성별로 인해 일할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것이 한국 영화계의 현실이다.
실력 있고 나이 든 여배우들의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건 할리우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미국 흥행 영화를 분석한 <할리우드 리포트>에 따르면 2016년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영화 100편 가운데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29%였다. 영화 속에서 젠더에 대한 고정 관념도 굳건했다.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와 비교해 일하는 모습, 리더로 묘사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연령대에 있어서도 남성보다 더 어리다. 55%의 여성 인물들이 20대 또는 30대인 데 비해 61%의 남성 캐릭터는 30대와 40대였다. 카메라는 나이 든, 일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여자를 비추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를 불러주는 영화가 없다면? 내가 영화를 만들면 돼.’ 없던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배우도 있다. 탄탄한 커리어의 여성 배우들이 작은 역의 오디션에 몰려드는 데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리즈 위더스푼은 스스로 제작사를 차렸고, 자신이 감동을 받은 여성 작가들의 원작을 하나씩 영화화하고 있다. 그렇게 위더스푼이 세운 회사 ‘퍼시픽 스탠더드’에서는 <나를 찾아줘> <와일드>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니콜 키드먼의 제작사 ‘블로섬 필름’과 손잡은 두 배우 주연의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에 이어 제니퍼 애니스톤과는 공동 제작, 출연하는 뉴욕 방송계 소재의 코미디 시리즈를 논의하는 중이라고. 여성의 영향력은 이렇게 카메라 앞과 뒤에서 서로 힘을 불어넣는 관계다. 여자들이 야망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위더스푼은 지난해 말 TV 프로그램과 팟캐스트, 소셜미디어 콘텐츠의 포맷까지 아우르며 여성 중심의 이야기를 전하는 디지털 미디어 회사 ‘헬로 선샤인’을 설립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갈 길은 너무 멀어 보인다. <택시운전사> <청년경찰> <군함도> 등 지금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영화들도 대부분 남성 배우들이 주인공이고, 남성 중심의 이야기다. 판에 박히지 않은, 다양하게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를, 남자의 연애 상대나 성적으로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물로서 여자의 삶을 영화 속에서 더 볼 수는 없을까? 단지 캐스팅 단계에서가 아니라 장르와 시나리오부터 달라져야 가능한 이야기다. 배우 문소리는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을 다니며 연출 공부를 하고서 <여배우> <최고의 감독> <여배우는 오늘도> 등 세 편의 단편을 연출했다. 이런 사람들이 영화계에 신선한 호흡을 조금씩 불어넣어준다면 고마운 일일 것이다.
8월 24일 개봉하는 영화 <더 테이블>은 하나의 카페, 테이블 하나에서 하룻동안 벌어지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에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네 배우가 출연했다. “짧은 프러덕션과 아주 작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러한 드라마가 더는 만들어지지 않는 시기에 이런 조합과 다양성의 시도가 흥미를 받을 수 있다면, 나 또는 누군가가 내용에 더 자유롭고 배우들의 앙상블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의 말이다. 단지 관객이 더 드니까, 이런 시나리오가 많이 쓰여지니까, 남자 배우들이 인기가 많으니까… 이런 이유로 엇비슷한 남성 영화만 계속 만들어진다면 불균형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더 테이블> 같은 영화가 많은 상영관을 잡기는 어렵겠지만 깊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네 배우의, 더 많은 여성 배우의 연기를 스크린에서 더 자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아직은 많다.
-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