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의 주인공이 공개됐다. 해외 바이어들 사이에서 먼저 인기를 얻어 이름을 알린 고엔제이의 정고운은 아틀리에에서 진중하게 작업하는 고독한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한편 렉토의 정지연에게는 비범한 감각과 심미안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 꿈틀거린다. 자신만의 색으로 한국 패션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각자의 영역을 구축한 정고운과 정지연, 빛나는 두 신성을 만났다.
GOEN.J by 정고운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에서 만들었던 옷을 기억하나? 당시와 달라진 점, 반대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점을 꼽는다면?
당시엔 패턴부터 입체 드레이핑까지 전부 다 직접 했다. 지금은 디자인하고 콘셉트를 잡는 데 더 집중한다는 점, 그리고 좀 더 상업적인 방식으로 컬렉션을 풀어 나간다는 게 다른 점일 수 있겠다. 예전에는 여성스러운 특징이 두드러졌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원래 좋아하던 여성적 요소에 상반된 것을 함께 섞어 디자인하게 됐다. 레이스와 스포티하고 남성성이 부각된 유니폼을 섞는다거나, 하늘하늘하게만 보일 수 있는 러플 디테일을 단단한 소재에 접목하거나 하는 식이다. 상반된 것의 역설적 아름다움과 중성적 느낌에서 재미를 느낀다.
최근 란제리 룩과 함께 레이스가 트렌드다. 처음부터 레이스가 특기였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내 외모와 어울리지 않지만 란제리 전공이다. 란제리가 워낙 작은 아이템이다 보니 그 안에 콘셉트를 담아내고 기능적인 요소까지 갖추는 게 쉽지 않다. 당시의 경험은 레이스 소재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줬고, 다양한 소재와 레이스를 믹스매치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예전보다 상업적이라고 하지만 많은 국내 디자이너들이 택한 상업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새 시즌 컬렉션을 만들 때면 전체 비율 중 쇼피스와 상업적인 옷, 쉽고 기본적인 옷의 비율을 고르게 조절한다. 너무 상업적으로 비치길 원치 않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강점으로 봐주는 부분이다. 주제를 정해서 여러 가지 스타일을 고엔제이 방식으로 만든다. 국내 브랜드의 상업성에 관해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유행이 빠르고, 그것을 습득하는 능력이 좋다는 게 서울 패션의 장점이지만,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패션을 공부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해도 티셔츠나 맨투맨같이 쉬운 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소비자 역시 자신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은 옷을 제대로 입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가 입은 걸 따라 하는 방향으로 가기 쉽다. 그러니 연예인을 통해 쉽게 따라 입을 수 있는 마케팅이 우세하고, 어느 브랜드의 뮤즈가 됐다가 곧 다른 브랜드의 뮤즈가 되고, 오리지낼리티를 갖춘 디자이너도 세일즈가 좋지 않으면 전혀 다른 색깔의 세컨드 라인을 만들게 된다.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다. 단기적인 이익이 목표가 아니라면 브랜드를 유지하고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그렇게 꾸준히 보여준다면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진정성을 믿는다. 나의 경우엔 해외 바이어들이었다.
SFDF 수상자 선배 중 정욱준, 최유돈 등 해외 컬렉션을 꾸준히 하는 디자이너가 있다. 언젠가 파리에서 런웨이 쇼를 볼 수 있을까?
어설프게 할 거면 아예 하지 말자는 주의다. 소위 ‘핫’하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인정받아 재정적으로나 실력에서 탄탄해지면 꼭 하고 싶다.
새로운 사옥 오픈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
외국 디자이너 숍에 가보면 그 브랜드의 콘셉트와 옷이 공존하는 재미있는 곳이 많지 않나. 스토어를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 이광호 작가와 가구, 인테리어를 함께 완성한 쇼룸을 오픈한다. 셀린느나 아크네 매장을 보면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작업한 화분이나 가구를 배치하곤 하는데, 그처럼 이광호 작가와 발전시킨 아이디어를 통해 고엔제이 만의 색다른 매장을 만들고자 했다.
브랜드의 키워드로 꼽은 ‘자유로운 애티튜드’라는 추상적 개념은 어떻게 현실화되나?
고엔제이 옷은 딱딱하고 평면적인 선의 디자인이 아니라, 움직이거나 걸을 때 더 예쁘다. 소재가 떨어지는 느낌, 걸을 때 러플이 날리는 입체적인 느낌, 실크를 단단하게 표현하는 것 등 사소하고 작은 디테 일까지 놓치지 않는다.
공동 수상자인 렉토의 정지연 디자이너에 대한 생각?
말투와 애티튜드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차분함이 브랜드에 담긴 것 같다. 옷과 디자이너가 정말 닮았다. 그리고 인기가 정말 많지 않나.
그렇다면 고엔제이는 정고운을 닮은 옷인가?
그런 말은 잘 못 듣는다. 나는 이상형을 생각하며 디자인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서 옷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와 가장 닮은 브랜드가 나온다고 믿는다.
디자인 말고 또 하고 싶은 것?
건축에도 관심이 많고, 헬무트 랭처럼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작품을 내놓고 싶기도 하다. 가구 디자이너도 될 수 있겠고. 오브제를 만들어 나만의 것을 표현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이다.
RECTO. by 정지연
해외 활동이 두드러진 디자이너가 선발되던 SFDF에서 이번 렉토의 수상은 파격적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부족한 면도 있지만 국내 많은 여성들이 좋아해준다는 점을 가장 높게 봐준 것 아닐까. 현재 독점 계약을 맺고 있는 편집숍 비이커를 통해 많은 해외 바이어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는데, 해외 진출에 관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정해준 것 같다. 최근 하비 니콜스, 레인 크로퍼드, 센스 등과 이야기가 오갔다. 아직 최종 컨펌 단계는 아니지만 미팅을 통해 해외 시장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중이다.
렉토에 대한 해외 바이어들의 의견이 궁금하다.
서울 디자이너 중 특색이 있어 눈여겨봤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해외 진출에 관한 실질적인 조언도 얻었다. 제품과 가격의 범위를 넓히면서 서서히 글로벌 브랜드로 조정해나갈 생각이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는 데 편집숍 대표로서 바잉을 한 경험이 도움이 되겠다. 디자이너 입장이 되어보니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만 이야기가 풀리는 데에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진지하게 렉토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조율하려고 한다.
배우 유아인이 SFDF 수상식에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됐고, 배우 정유미 역시 친한 친구로, 렉토의 옷을 입고 등장했다.
친구들이 브랜드 홍보에 든든한 조력자가 돼줬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렉토 옷과 참 잘 어울려서 좋다. 홍보 목적이 아니더라도, 직접 옷을 찾아 구매하는 셀레브리티도 많다. 최근엔 배우 고현정 씨도 구입했고, 공효진 씨도 우리 옷을 좋아한다는 말을 전하며 렉토를 찾아줬다.
패션에 있어 여성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데 특별히 능한 이유가 있다면?
‘동시대적’이라는 단어는 렉토를 수식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트렌드에 치우쳐 디자인하지 않고, 그것을 흡수하되 내 색깔대로 솔직하게 풀어내서이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감도가 현재 패션과 잘 맞았던 것 같다.
렉토의 키워드 세 가지를 꼽는다면?
정제된, 중성적, 유연함.
컬렉션 아이템의 종류나 스타일 역시 진화하고 있다. <W Korea>에서 처음 공개한 2017 S/S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요즘 아트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디자인할 때 옷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종이 접기처럼 스커트에 리본을 붙이기도 하고, 블라우스도 톱을 레이어드한 것처럼 디자인해 입체적이지만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재미를 주었다.
소량이지만 가방과 구두 등 액세서리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액세서리 라인도 시도할 계획인가?
액세서리 라인을 론칭해야겠다기보다는, 완성된 전체 룩을 보다 명확하게 잡아주기 위해 액세서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영감이란 계속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쌓여 어느 순간 그것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옷을 보여주는 방식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한다. 거창한 캣워크를 펼치는 쇼에는 크게 욕심이 없고, 음악, 설치 미술, 가구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과 결합해 좀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컬렉션을 풀어내는 데 흥미를 느낀다. 개인 쇼룸을 여는 걸 고려 중이다. 렉토의 공간에서 렉토만의 향과 무드가 옷과 어우러졌을 때 완벽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당대의 문화적 트렌드를 대변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작품은?
미니멀리스트적 감성에 명확한 색을 활용해 추상적이고 조각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현대미술을 좋아한다. 네모난 캔버스나 공간 등 정형화된 물리적 틀에 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과 창의력을 동경한다.
디자인 외에 해보고 싶은 것은?
패션은 지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라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아주 먼 미래이긴 하지만 교육과 관련된 비영리 재단 등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은 포부가 있다.
SFDF 공동 당선자인 정고운 디자이너에 대한 생각은?
강한 느낌을 레이스의 반전을 곁들여 표현하며, 완전한 자신의 색을 찾은 멋진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 에디터
- 백지연
- 포토그래퍼
- EOM SAM CHEOL
- 모델
- 황기쁨, 김설희
- 헤어
- 조영재
- 메이크업
- 오가영
- 어시스턴트
- 홍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