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잘 나온 드라마 하나에 일상의 희로애락이 좌우된다. 여기, 믿고 보는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 일곱 명이 있다. 펜 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선생님 사랑, 선생님 찬가.
1_그래, 40년간 한결같았어| <그래, 그런 거야>,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청춘의 덫>의 김수현
좀 과장을 보태자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김수현의 드라마를 봤고 좋아했다. 엄마 덕분이기도 하다. 엄마는 내가 동화 아닌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여학생>이라는 잡지를 정기 구독해 내게 들이밀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김수현이 그 잡지에서 일했고, 학생 소설을 연재했기 때문 이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다른 사람이야. 여자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계속 얘기해. 남자들은 그게 재수 없다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거든.” 지금도 그때처럼 김수현의 드라마를 좋아하고, 꼭 본다. 올 초부터 주말을 기다린 이유 중 하나도 주변에 보는 사람 별로 없는 SBS <그래, 그런 거야>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이 드라마는 특별한 재미도 없고, 지금까지 그의 가족 드라마와 다를 바 없으며, 언제나처럼 대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강요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극복될 것처럼 말한다. 혹자는 그래서 또 재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가족 판타지가 다른 가족 드라마와 다른 점은 판타지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꿈도 못 꿔? 그리고 가족 판타지물 직전엔 언제나 인생의 쓴맛에 대한 드라마가 있었다. <그래, 그런 거야> 바로 전 그녀의 드라마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생각해보라. 김수현은 늘 판타지와 현실을 번갈아 쓴다. 희망을 부수려는 건지 절망에서 끌어올리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묘한 균형감이 계속 김수현 드라마를 보게끔 하는 이유다. 게다가 그 어느 작가도 드라마에서 여성의 독립과 주체적 삶을 말하지 않았던 70~80년대에, 그는 했다. 심은하(<청춘의 덫>)와 김희애(<내 남자의 여자>) 이전에 정애리(<안녕하세요><사랑과 진실>)라는 당당하고 멋진 여자 캐릭터이자 그의 뮤즈가 있었다. 적어도 엄마로 하여금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으니, 내 딸은 (극 중) 정애리처럼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를, 그 몇십 년 전 한국에서 김수현이 만들었다. 아주 작은 사고임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된 숱한 여배우들을 작가의 힘으로 화려하게 복귀시킨 의리파 작가이기도 하다. 다 됐고, 40년 넘게 한결같이 드라마를 써온 사람은 그밖에 없다. 만일 김수현의 드라마가 거북하다면 그냥 그만큼 그에게 익숙해질 만한, 혹은 세뇌당할 세월이 없었기 때문은 아닌가? 나는 그의 드라마로 인해 즐거웠던 긴 시간이 있었기에 앞으로 그가 세상 재미없는 글을 쓴다 해도 좋아할 것 이다. 그것을 당신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글 | 이현수(<media2.0> 편집장)
2_밑바닥이 아닌, 땅바닥에서 | <유나의 거리>, <파랑새는 있다>, <서울의 달>의 김운경
어린 시절부터 10여 년에 걸쳐 즐겨본 드라마들이 모두 한 작 가의 작품이라는 건 좀 커서야 알았다. 초등학생이 해학미나 세태 풍자가 뭔지는 알 리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모두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거기엔 어린 내 눈으로 보기에도 뭔가 아슬아슬한 재미와 쫄깃한 면이 있었다. 얽히고설킨 이웃들의 에피소드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곤 했던 MBC <한지붕 세가족>에서도 가끔은 주인집 임채무 윤미라 부부와 세 들어 사는 순돌이네의 ‘간극’을 확인하는 순간이 보였다. KBS <서울 뚝배기>에서 왕년에 좀 놀아봤다고 으스대던 설렁탕 집 직원 주현은 툭하면 사장인 오지명에게 깨지는 존재였다. 누군가의 생계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얽힐 때, 어 쩔 수 없이 비루해지는 생의 순간을 목격했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김운경의 드라마가 밑바닥 인생의 삶을 그린다고 말한다. 재작년 방영한 JTBC <유나의 거리>에는 조폭 출신의 콜라텍 사장이 있었고, 과거 KBS <파랑새는 있다>에도 밤무대 인물들과 사기꾼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땅바닥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밑바닥이 탈출해야 할 곳이라면, 땅바닥은 그런 의미와 다르게 인물이 발딛고 사는 현실의 토대다. 김운경 드라마 속 인물들은 예를 들면 후미진 동네의 카바레가 주무대이더라도 나름 그가 처한 프로의 세계와 질감을 보여준다. 작가의 시선은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에게까지 구석구석 미쳐, 위트와 디테일을 재료로 한 생활상이 드러난다. 만약 김운경이 뜬금없이 아이돌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만들면, 거기엔 매니저와 안무가와 홍보담당자 같은 주변부 인물의 구체적 애환이 구구절절 살아 있을 것이다. 아이돌의 면면 역시 지방 출신과 청담동 출신의 지망생 등등이 얽혀 그에 따른 이야기가 파생되겠다. 이를테면 김운경은 재료 들을 쫙 펼쳐놓은 12첩 반상 같은 드라마를 쓴다. 그 12첩 반상 을 음미하기엔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 바라보고 있으면 격세지감 또한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글 | 윤성호(영화감독)
3_두번째 볼 때 더 놀라는 치밀함 | <풍문으로 들었소>, <아내의 자격>, <밀회>의 정성주
정성주 작가에 관해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바로 떠오른 대사는 어쩐 일인지 가장 드라마답지 않은 구절이었다. “미래의 쌀은 반도체가 아니라 스토리인데.” 한창 ‘스토리텔링’ 붐이 일던 무렵의 프레젠테이션 자료 같은 저 문구는 JTBC <아내의 자격>에서 친구 남편과 몰래 만나며 그의 아들을 낳아 키우던 은주(임성민)의 대사다. 아들의 상속권을 인정받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던 그녀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답답한 소리만 하는 변호사에게 공부만 했지 스토리텔링은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다. 당시 뱃가죽이 경련할 정도로 웃었던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미래의 쌀을 검색하곤 한다(최근엔 ‘빅데이터’가 미래의 쌀로 떠올랐다). 두말할 필요 없는 한국 드라마계의 거장을 두고 웃긴 대사에 집착해도 괜찮을까? 훌륭한 이가 내가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훌륭할 때, 어쩔 수 없이 그의 옷 무늬나 반짝이는 구두처럼 사소한 것을 아는 체하는 심리는 아닐까? 어쨌거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저 대사가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었음은 한참 후에 재방송으로 앞부분을 다시 보다가 알게 됐다. 거대 로펌 대표라는 할아버지가 왜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느냐 묻는 아들에게 은주는 ‘집안 전통을 거스르고 연애 결혼을 해서 부모의 눈 밖에 났지만, 할아버지는 분명 너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답한다. 재미있는 점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저 이야기를 아들 쪽에서 “팬픽 같다”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완고한 할아버지를 녹이는 <소공자>의 세드릭 역할을 기대하는 엄마의 바람이 십대 사이에 유통되는 팬픽의 설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먹혀든 셈.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의 힘이고, 대치동 사교육 네트워크를 통해 소문과 정보를 가공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드라마의 큰 줄기와도 이어진다. 알다시피 정성주 작가는 신문이나 뉴스로 접할 법한 상투적인 선전 구호나 개념어를 드라마 안으로 자주 끌어들인 다. JTBC <밀회>의 강준형(박혁권)은 아내 오혜원(김희애) 에게 서한그룹의 비리를 대신 뒤집어쓰라고 압박하는 자리에서 예술 정책 입안자들의 무지를 들먹였고,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인상(이준)과 서봄(고아성)의 결혼을 마지못해 승낙하는 입장의 한정호(유준상)가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선점하고 전선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많이 배운 이들이 자기 약점을 방어하고, 아름답지도 고결하지도 않은 내면을 포 장하기 위해 끌어다 쓰는 언어들은 지식인의 허위를 풍자하기도 하지만, 하나 하나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치밀한 전체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두 번째 볼 때 더 놀라는 드라마는 정말이지 흔치 않다. 글 | 유선주(칼럼니스트)
4_롤러코스터 혹은 모래 귀신 월드 | <내 딸 금사월>, <왔다! 장보리>,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K-드라마엔 훌륭한 작가가 여럿 있지만, 그 이름에 ‘월드’를 붙일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다. 이 표현에는 냉소도 포함돼 있겠다. 중요한 건 그만큼 드라마의 진행을 자기 뜻대로 끌고 가는 개성이 확실한 작가가 드물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순옥 킴 월드’가 있다. SBS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죽은 아내가 성형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점을 찍고 돌아온다거나, MBC <내 딸 금사월>에서처럼 가발을 쓰고 휠체어를 탔을 뿐인데 몇십 년 한 이불 덮고 잔 남편도 못 알아본다는 설정으로도 시청자를 붙들어놓을 수 있는 작가가 또 있겠는가? 허구 작품을 읽을 때 독자가 불신을 중지하듯이, ‘김순옥 샘’은 시청자들에게 ‘의심은 접어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다. 그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을 많은 이들은 자극적인 ‘막장’ 요소라고 하겠지만, 섭섭한 말씀. 일단 ‘막장’이라고 하는 출생의 비밀, 사돈의 팔촌이 실제로는 남매인 것과 같은 좁은 사회 관계망, 배신과 복수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 작품에도 들어 있는 것들이다. 핵심은 이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김순옥의 최대 장점은 박진감과 속도감이다. PC통신으로 하이텔 연결하고 ‘띠띠띠’ 하는 소리를 참을성 있게 듣던 90년대도 아니고, 현재의 시청자들은 스마트폰 화면이 느리게만 떠도 분통을 터뜨릴 만큼 인내심이 적다. 복수극은 항상 있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건을 역동적으로 진행한 작가는 많지 않았다. 보통 미니시리즈가 한 번의 거대한 하락을 향하는 후룸라이드처럼 천천히 올랐다 휙 떨어진다면, ‘순옥 킴 월드’는 롤러코스터. MBC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과 문지상처럼 복수를 캐치볼처럼 주고받고, <아내의 유혹>의 민소희나 <내 딸 금사월>의 오월이처럼 죽은 사람들이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내 딸 금사월>에선 초반 4회 만에 여주인공의 결혼식이 깨지고, 약혼자가 잡혀 가고,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며, 그 남편 가족 때문에 어머니는 화재로 아버지는 추락사로 죽고, 전 애인이 다시 나타났다가 다시 잡혀가고, 남편 몰래 아이를 낳아서 보육원에 맡기는데 아이가 뒤바뀐다. 읽기만 해도 숨차는 이 많은 사건 속에서 시청자들은 어느새 모래귀신 같은 ‘순옥 킴 월드’ 에 빠져들고 있다. 태생이 중요하다는 출생 결정론의 덫, 앞뒤 잊어버린 전개 등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는 이유다. 글 | 박현주(번역가)
5_서사보다 감정선 | <닥터스>,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하명희
“우리 사랑은 현실에 졌어. 우리 사랑은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후진 사람으로 만들어.”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에서 사랑하는 남자 정훈(성준)과의 결혼을 꿈꾸던 혜윤(정소민)은 정훈 부모님의 결혼 반대에 맞닥뜨린다. 당장은 어찌할 수 없는 그 벽 앞에서 망연자실한 그녀에게 거액의 돈 봉투 같은 건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전쟁의 다른 이름인 ‘결혼’의 A부터 Z까지 생생하게 담아낸 이 드라마는 제목 그대로 담담하게 결혼에 대한 물음과 각 처지의 답변을 보여줬다. 단단하게 구축된 캐릭터의 감정 선과 함께 생생하게 구현된 리얼리티로 무장한, 무엇보다 작가의 필력이 눈부셨던 작품. 이후 하명희는 이에 비하면 차분하고 어두운 어조로 결혼 후의 이야기인 SBS <따뜻한 말 한마디>를 썼다. 행복해 보이는 결혼 생활의 서슬 퍼런 이면을 보여준 드라마는 결혼이라는 약속의 시간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모든 장애와 상처를 보듬어가면서도 결혼의 울타리인 가정은 지속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고 아찔하게 담아내며,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이 주인공인 두 편의 드라마를 통해 하명희는 서사의 전개보다는 감정선의 떨림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속도감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주저하는 순간들의 미세한 각도 들을 집요하게 담아낸 그녀는 결국 극 중 인물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아닌,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끝내 전달하고야 말았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닥터스>에선 드디어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단순한 멜로 혹은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 만남과 성장과 변화라는 줄기가 깔려 있다. 시놉시스만으로는 큰 기대감이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이야기를 열어놓는 순간 문 안에 빼곡한 구조들로 보는 이를 탄복하게 만드는 하명희라면 로맨스에도 진부하지 않은 무엇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든다. 글 | 진명현(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6_농밀한 정서적 공동체 | <디어 마이 프렌즈>, <괜찮아, 사랑이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노희경
노희경이 처음 브라운관에 등장한 90년대는 트렌디 드라마 전성기였다. 첫 장편 MBC <내가 사는 이유>가 방영된 97 년에는 MBC <별은 내 가슴에>, 첫 미니시리즈 KBS <거짓말>이 방영된 98년에는 SBS <미스터 큐>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대부분 신세대의 경쾌한 라이프스타일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재현하는 트렌디 드라마에 열광할 때, 이 낯선 신인 작가는 주류 문법을 거스르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인물의 감정을 스펙터클화하는데 집중하는 트렌디 드라마와 달리, 노희경의 드라마는 인간의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조시켜간다. 이러한 서사 방식은 매우 더디지만 그만큼 신중하고 섬세한 감정의 구축을 통해 강렬한 정서적 환기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노희경의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종종 단순한 시청 행위를 넘어 극 중 인물들과의 정서적 공동체에 동참하는 것과도 같았다. 최근 종방한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작가의 이 같은 장점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었다. 그 안에는 작가가 20여 년간 일관되게 천착해온 인간 내면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농익은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전까지 최고작이었던 KBS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아픈 사연을 모두 품어 안았던 영자(고두심)의 ‘기구절창’한 이야기조차 여기서는 그저 삶의 한 페이지처럼 보였을 정도다. 극 중 시니어들은 때로 아이처럼 유치하고 청춘처럼 혈기방장하며 현자처럼 지혜롭기도 하다. 단지 나이만 먹은 늙은이가 아니라, 깊디깊은 내면에 러시안 인형, 마트료시카와도 같이 생의 다양한 풍경을 겹겹이 끌어안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어 마이 프렌즈>의 노인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생동’하며 여전히 성장하는 존재들이다. 햇빛 찬란한 오후, 망상성 치매 판정을 받고 옥상에 오른 희자(김혜자)가“ 죽기 딱 좋다”고 해맑게 속삭이듯이 삶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관조적 경지도 그 치열한 성장을 거친 후에 야 가능하다. 노희경 월드는 그렇게 인간 내면의 지난한 탐구를 지나 생의 가장 원숙한 풍경에 도달했다. 글 | 김선영(칼럼니스트)
7_제대로 뻔뻔한 클리셰 | <태양의 후예>, <상속자들>,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소리가 들린다. 김은숙의 이름을 꺼내면, 어디선가 야유를 퍼붓는 환청이 들린다. 그러나 중국을 중심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더 큰 함성이 그 환청을 덮어버릴 것이다. KBS <태양의 후예>는 30여 개국으로 팔려 나갔다. 뉴스에 따르면 미국에 유통된 한국 드라마 중 최고 수출액을 기록했다고 한다. 객관적 기록이 증명해주는 만큼, <태양의 후예>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시청자들은 스스로를 변명할 필요가 없다. 송중기와 송혜교가 얼굴을 마주 대고 “의사면 남친 없겠네요, 바빠서” “군인이면 여친 없겠네요, 빡세서”를 주고받을 때 심장이 반응했던 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의사인 여주인공이 보고 싶은 남자를 어떻게든 보고 싶어서 그의 갈비뼈가 선명한 엑스레이 사진이라도 들여다본다는 잠깐의 묘사는, 여느 멜로 드라마가 ‘캐치’하지 못한 쾌거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김은숙은 자신이 쓴 드라마가 클리셰 덩어리라는 것을 잘 안다. 다만 “새로운 소재가 아닐 때에는 반걸음 앞선,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드라마의 주 정서인 ‘오글거림’은 아마 여기서 기인 하지 싶다. 그녀는 기세가 남다르다. 거침없고 에두르는 법 없이 낯간지러운 대사와 상황을 흩뿌린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SBS <파리의 연인>에서 남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며 ‘사랑해도 될까요’를 3분여 동안 완창하게 만든 작가가 바로 김은숙이다. 뻔뻔할 거면 제대로 뻔뻔하게, 사랑할거면 확실히 표현하게 인물을 만드는 작가. 가기로 한 세계가 있으면 확신을 갖고 대차게 간다. 그런 김은숙식 장르에선 특히 구애하는 인물인 남자 가 더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상일 수밖에 없다. SBS <시크릿 가든>의 현빈, SBS <신사의 품격>의 장동건, SBS <상속자들>의 이민호,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는 원래 멋졌지만, 김은숙 드라마에서 최선을 다해 마음껏 멋진 남자들이 됐다. 드라마가 판타지라 면, 판타지를 작정하고 충족시켜주는 작가는 하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퍼 초 울트라 스펙터클 판타스틱 캡숑…’의 수식어가 가능한 <태양의 후예>도 그 경지에서 만 들어졌다. ‘섹시 사악 격정 하이틴 로맨스’ <상속자들> 역시 그랬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 빼고는 이미 다 빠져들었다. 올 하반기엔 공유와 이동욱이 출연하는 <도깨비>가 기다린다.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브로맨스라니, 이번엔 듣도 보도 못한 소재다. 벌써부터 야유와 함성의 환청이 들린다. 에디터 |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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