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오버사이즈 스타일이 눈에 띈 건 드리스 반 노튼 쇼에서였다.
처음 오버사이즈 스타일이 눈에 띈 건 드리스 반 노튼 쇼에서였다. 특유의 리듬감을 살려 다양한 대비를 실험한 디자이너는, 저지와 면 소재의 캐주얼한 아이템을 낙낙하게 겹치거나,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채 실크나 퍼 소재의 고급스러운 롱스커트, 허리에 다트를 넣은 보이프렌드 재킷 등과 자연스럽게 뒤섞었다. 언제나 완벽한 패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직구보다는 커브 볼에 가까운 스타일로 팬들을 즐겁게 하는, 반 노튼식 선택이었다. 그러나 프레야 베하가 스웨트 셔츠와 캐주얼한 팬츠를 입고, 라펠을 대충 펼친 회색 오버사이즈 코트를 툭 걸치고 무심히 걸어 나올 땐, 이번 컬렉션이 정확히 어떤 여자들을 겨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클래식했지만, 그건 50년대나 60년대와 같은 과거가 아닌,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 세계적인 불황을 지나는 동안, 여성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은 모두에게 지워진 짐 같았다. 파워우먼과 80년대는 거의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피해갈 수 없는 교차로처럼 시즌을 장악했다. 파워 숄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우스꽝스러울 만큼 치솟았으며, 런웨이에는 헐벗은 남자 모델을 앞세우고 채찍을 든 여자나 킬힐을 신고 금속처럼 단단한 옷을 입은 여자가 위용을 부렸(?)다. 레이디 가가의 전위적인 퍼포먼스가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특히나 패션에선 더더욱. 실용주의와 클래식이 대두된 2010 F/W 시즌을 맞아, 디자이너들은 좀 더진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불황의 그림자와 여전히 여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힘을 풀어내는 방식도 좀 더 여유롭고 신선해졌다. 바로 오버사이즈 스타일링으로 말이다.
자신의 사이즈보다 한 뼘쯤 크게 입는 오버사이즈스타일은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명제지만, 60년대의 마릴린 디트리히와 90년대의 마크 제이콥스가 동시에 연상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그건 아마도‘자유로움’이라는 공통된 DNA 때문이 아닐까? 이번 시즌 여자들이 큰 옷을 입는 방식은 너무도 쿨하고 솔직하다. 영화 <애니홀>의 다이앤 키튼이 매니시룩과 함께 보여준 유쾌한 분방함과 호기가 담겨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 쇼에선 그녀가 마치 날카롭게 재단된 남성용 수트 앞에 사무라이처럼 기다란검을 들고, 불필요한 부분을 거침없이 잘라낸 뒤 특유의 여성성을 채워넣은 듯한 룩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체의 곡선을 부각하는 대신, 각을 유념한 채 실루엣을 미니멀하게 매만지는 방식으로 오버사이즈 재킷과 코트를 완벽한 드레스로 변신시켰다. 마치 일하는 여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가져야 할 용기나 자신감에 대한 응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텔라 매카트니 자신을 비롯한 슈퍼 워킹 맘들이 스스로에게 그러하듯 말이다. 좀 더 로맨틱한 방식은 클로에의 한나 맥기본과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새로운 디자이너로 입성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네티가 맡았다. 70년대 러브 스토리 풍의 채도와 넓은 실루엣을 차용하여, 클래식한 캐멀색 롱코트를 케이프처럼 걸치게 하거나, 커다란 아노락을 마치 숄처럼 두르도록 했는데 그건 집시 스타일에서 벗어난 케이프가 이번 시즌 트렌드의 반열에 입성할 거라는 명백한 예고였다. 피비파일로의 셀린에서도 케이프는 주요 아이템으로 등장했는데, 그녀는 일명 ‘테디베어’라 불리는 양털로 몸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어릴 때 엄마의 실크 파자마나 아빠의 양복 재킷에 파묻혀, 커다란 소매 속에서 작은 팔을 휘저을 때 느끼던 그 자유로운 감촉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피비가 주창하는 특유의 ‘선’은 결코 아둔하게 뭉개지지 않았다. 목도리 도마뱀처럼 라펠을 활짝 펼쳐 상체를 강조한 캐시미 어 코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풀어오른 듯한 외관과는 달리, 등과 허리선을 타고 흐르는 핏만큼은 치밀하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오버사이즈를 즐기는 피비만의 세련된 ‘역설’의 방법이었다.
스타일링의 잔재미를 치밀하게 누린 건 러브 컬렉션의 리처드 채와 래그&본이었다. 그들은 뉴욕의 스트리트 그런지의 일부를 하이패션에 매우 적절하게 끌어들여 우아한 해답을 만들어냈다. 리처드 채는 변칙적인 사이즈를 하나의 룩 안에 녹여내는 시도를 통해, 큼직한 옷이 사람의 크기를 부풀려주지 않는다는걸 모르는 건 가여운 옛날 남자들과 칠면조들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헐렁한 오버사이즈 티셔츠 위에 타이트한 저지 셔츠를 덧입히고 조드퍼스 팬츠를 매치하여 독특한 프로포션을 만드는 식이었다. 래그&본의 두 디자이너는 캠핑과 하이킹을 할 때 마구 두르고 껴입으며 큼직한 옷들에 둘러싸이는 포근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영국의 첩보원에서 영감을 받은 에르메스 컬렉션에선 오버사이즈 코트를 두루마기처럼 ‘휘감아’ 입는 노하우를 전수했다. 라펠을 펼치고 넉넉한 코트의 앞섶을 몸에 맞게 휘감은 다음, 얇은 가죽 벨트로 콱 조이는 방식. 이 전법은 50년대의 우아하고 강인한 여자들을 표현한 아쿠아스큐텀 컬렉션에서도 여러 번 쓰였다.보이 프렌드 재킷을 유행시킨, 남자친구의 옷장에 눈독들이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참고하면 좋을 선택. 3.1필립 림이 커다란 담요를 패션 아이템 삼아 자기 마음대로 휘휘 두르고 다니는 런던의 쿨한 소녀들에게서 심플한 ‘마무리’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큰 옷을 일부러 가져다가 나에게 ‘맞춰’ 입는 오버사이즈 스타일이 트렌드로 떠올랐다는 건, 자기자신을 잘 알고, 세상에 기죽지 않으며 오히려 호기롭게 맞설 줄 아는 독립적인 21세기 여자들의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증거다. 뾰족한 어깨나 죽여주는 힐 없이도 충분히 강한 여자들의 시대가 코앞에서 모퉁이를 돌았다는 새뜻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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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최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