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 없이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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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가 옷을 벗었다. 올해는 새로운 옷을 입어보고자 한다.

커다란 양털 코트와 팬츠, 펜던트 목걸이는 셀린느 제품.

이렇게 벗고 화보 찍은 건 처음 아닌가?

그레이 이 정도는 처음이다. 몸 만들었으니까 한번 제대로 찍었으면 했는데, 예전에 <더블유>와 화보 함께하자고 약속한 게 있어서 지키고 싶기도 했고.

요즘 부쩍 운동에 재미를 붙인 건가? 2019년 7월부터 시작했다. ‘워터밤 서울’ 페스티벌 할 무렵인데, 물에 젖으면 몸 형태 다 드러나고 그러니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막상 해보니까 운동이 잘 맞았다. 트레이너 선생님도 좋은 분이고. 주 3회 하다 5회까지 늘렸다. 이렇게 평생 해야겠다는 맘이다.

누구를 보고 자극받았나? 일단 회사 사장님(웃음). 공연 마지막에 ‘몸매’ 부르면서 옷 벗는 게 항상 멋지다고 느꼈다. 저 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싶고. 다만 그게 내 영역은 아니라 생각했지. 그렇다고 내가 공연 때 옷을 벗겠다는 건 아니고, 한번 해보자는 맘으로 시작한 거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싱글 ‘TMI’의 그레이는 시무룩하다. “미세먼지 최악이야, 요즘 아예 잘 나가지 않아 밖에.” 2020년은 어땠나? 답답하지. 나뿐 아니라 다들 그랬을 거다. 2020년에 잡힌 모든 공연이 취소됐다. 스트리밍이나 언택트 공연은 있어도, 관객과 직접 호흡 맞추는 공연은 한 번도 못했다. 그게 가장 큰 변화다. 원래도 감사한 마음이긴 했지만, 그 에너지의 소중함을 새삼 알게 됐다. 지금은 어떤 무대라도 신날 것 같다.

엉망인 한 해였지만, 초심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할 시간이 진짜 많았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자기한테 투자할 시간이 늘어난 거지. 나는 운동이나 건강을 챙기는 쪽을 택한 거다. 누군가는 취미가 생겼을 수도 있고. 자신을 더 아끼고 되돌아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그래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초록색 가죽 재킷과 팬츠, 허리에 묶은 셔츠는 모두 벨루티, 벨트는 스투시 제품. 액세서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2020년 한 해 그레이의 활동을 보면, 12월 초 기준으로 저작권협회에 17곡이 등록돼 있다. 서른 몇 곡씩 쏟아내던 ’다작의 그레이’ 치고는 예년 대비 적은 편이다. 코로나 블루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재미난 일이 덜하니까 좀 처질 때도 있었다. 더 나올 노래가 있는데, 곡을 받은 아티스트가 발표를 미룬 경우도 많다. 작업은 끝났어도 활동 자체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의뢰가 없어도 스스로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해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생기는 의지 같은. 요즘 같은 상황에도 멋지게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을 볼 때. 이런 때일수록 좋은 음악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사명감 아닌 사명감도 있다. 물론 의뢰받아서 하는 것도 재밌다. 일종의 과제가 생기는 느낌인데, 그런 미션을 좋아하는 편이다. 2021년엔 더 자발적으로 해야지. 작업 열심히 하는 중이다.

한창 방송 중인 <쇼미더머니 9>은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하기에 좋은 플랫폼이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시즌 5 이후엔 간헐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쇼미더머니 5>로 얻은 게 많긴 하지만, 이번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2019년 AOMG 아티스트 공개 오디션인 <사인히어>를 하기도 했고. 섭외가 들어오긴 했다. 근데 뭔가 시작하면 편하게 하기보다 예민해지는 스타일이라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들더라. 우리 식구인 코드 쿤스트가 워낙 잘하고 있어서 든든하다.

맘에 드는 아티스트가 있으면 먼저 다가가나? 성격상 그걸 잘 못한다. 그나마 조금 다가간 게 2019년에 내가 프로듀싱하고 51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119’ 리믹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다. 섭외부터 직접 다 해봤는데 재미있었다. 먼저 다가갔을 때 생각보다 반응도 좋았고.

그레이의 제안을 싫어할 리가 있나? A형에 소심해서 그런지 ‘이 잘하는 친구들이 날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늘 있다. 작업하면서 여러 아티스트들과 친해지기도 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걸 왜 안 했지’ 싶었다. 그 곡을 계기로 맘의 문 혹은 음악적 교류의 문을 더 열었다.

슬리브리스는 드리스 반 노튼, 체인 네크리스는 디올 제품. 이어커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2020년엔 이른바 ‘클라이언트 잡’이 많았다. 웹드라마 OST, 웹툰이나 신용카드사와의 협업 등등. 그런 곡을 만들 때도 음악이 100퍼센트 내 거라고 생각하나? 어쨌든 음원 사이트에 그레이 이름으로 나가니까 완전히 내 노래라 생각한다. 좀 부딪치는 경우가 생겨도 최대한 접점을 찾으려 하고. 다행히 만족하는 음악을 낼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 잡은 당신 의지를 관철하기 어려운 경우도 잦지 않나? 왠지 그레이는 ‘No’를 잘 하는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내가 싫은 건 절대 세상에 못 나온다. 그렇기에 중간에서 회사 대표인 DJ 펌킨 형과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 덕분에 일석이조인 음원이 나올 수 있었다. 짭짤하기도 하고(웃음). 근데 요즘에는 내가 예술적으로 풀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빡’ 생겼다. 뮤직비디오부터 하나씩 생각해 가면서.

자기 이름으로 낼 노래는 꼭꼭 숨겨놓은 건가? 몇 년 전부터 염두에 둔 비트가 있기도 하고, 새 작업도 할 거다. 트렌드는 계속 바뀌니까. 누구랑 작업해야지, 정도의 그림은 대강 그려진다.

노래하듯 랩을 하고, 랩을 하듯 노래한다. 노래와 랩, 어느 쪽에 가까운 맘으로 녹음하나? 글쎄… 노래라고 생각하면 노래다. 랩 구성을 예로 들면, 일단 플로 짜면서 외계어로 막 적어둔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냥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노래하든 랩을 하든 목소리를 그 곡에 맞는 악기처럼 쓴다. 사운드적 즐거움이 중요하다.

오늘 당장 키보드 앞에 앉아 노래를 만든다면 어떤 곡이 나올까? 영상이 없으면 안 되는 시대니, 영상 만들었을 때 멋있을 만한 음악? 신날 수도 있고, 되게 예술적인 곡일 수도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섹시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은 항상 가져가고 싶다. 내 입으로 말하기 웃기지만, ‘그레이는 음악이 잘생겼다’는 식의 댓글이 달릴 때가 있다.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 듯도 하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레이의 음악은 미묘한 라인을 잘 지킨다는 인상이다. 너무 어렵지 않고, 반면 완전히 팝이라기엔 색이 확실하고. 솔직히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숫자를 고려하면서 만들었다. 대중적 반응을 잡는 동시에 ‘딥’한 것도 섞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차트 성적이나 반응에 대한 부담 없이 아예 예술성만 고민하고 싶은 마음이 좀 든다. 그래야 더 자주 음악을 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러 옷을 입어보고 싶다. 그간 실험적인 걸 하지 못 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시도해볼 거다. 오늘 화보도 나한테 도전이고 실험이다. 2021년에는 음악도 그렇게 해야지.

팬츠는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제품.

AOMG ‘1호 프로듀서’로서 아직도 책임감이 있나? 예전에 ‘회사 몸집이 커졌으면 한다’거나 ‘그걸 통해 인정받고 싶다’는 유의 말을 자주 했다. 그게 경력 초반의 나를 이끌었다. YG 하면 테디 형님이 있듯이, AOMG 하면 그레이라는 인식을 주는 것. 그래서 내가 멋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책임감이자 때로 부담이 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인정받은 뒤에는 벗어났지만.

코드 쿤스트나 구스범스 같은 프로듀서들이 새 식구가 되기도 했는데. 예전이면 경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증명한 것이 있다고 믿으니까, 오히려 맘이 편하다. 덕분에 나한테 더 포커스를 맞추게 됐다. 내가 잘하면 된다.

예전에 만든 노래를 다시 들으면 어떤 기분인가? 다 좋다(웃음). 목표가 10년, 20년 후에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음악을 만드는 거였는데, 다행이다. 듀스 노래 지금 들어도 엄청 좋지 않나.

당신의 초기작은 지금 들어봐도 좋은 의미로 많이 변하지 않았다. 음악 하는 걸 직업으로 삼길 잘했다, 그래도 잘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꿈이 뭐야’나 ‘하기나 해’ 같은 노래를 들으면 생소하다. 패기와 자신감으로 뭉친 그때의 나라서 쓸 수 있는 가사구나 싶다.

2013년에 발표한 ‘꿈이 뭐야’에서는 ‘자신감을 가져 넌 대체 꿈이 뭐야?’ ‘원하는 삶을 살어 웅크리지 말어’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그 곡과 ‘TMI’의 화자를 비교해보면 후자가 훨씬 느슨한 사람이다. ‘TMI’는 정말 가벼운 맘으로 작업한 곡이다. 후렴도 ‘TMI’ 한 단어로 가고, ‘이런 것까지 가사에 쓴다고?’ 싶은 이야기를 넣었다. 그런 게 일종의 내 개그 코드이기도 하다. ‘오이는 안 먹는데 피클은 먹어’, 처럼.

셔츠 재킷과 와이드 팬츠, 플랫폼 슈즈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제품. 장갑과 니트 발라클라바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제 꽤 선배다.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뭔가? 별 말 안 한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나는 그냥 조금 먼저 버텨온 사람? 다들 업다운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슬럼프가 오면 그냥 쉬고, 그러면 영감이 다시 생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다 잘하는 친구들이고, 오히려 배울 게 많다. 후배라기보다 같이 가는 동료다.

박재범은 근래 인터뷰에서 꾸준히 은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레이는 어떤가? 어떤 맘인지는 알겠다. 재범이는 나보다 데뷔도 훨씬 빠르고, 작업량도 미친 듯이 많다. 회사의 리더이기도 하고. 힘에 부칠 때가 있겠지, 나만 해도 그런데. 가끔은 음악 안 하고 편하게 살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 멋있는 노래 완성하면 ‘역시 이걸 해야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야’가 되는 거지.

2021년이면 데뷔 10년 차가 된다. 한 문장으로 소감을 말한다면? 앞으로도 부끄럼 없는 아티스트 그레이가 되겠다.

패션 에디터
이예진
포토그래퍼
박종하
유지성
스타일리스트
김협
헤어
이일중
메이크업
안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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