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어떻게 힙(Hip)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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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을 사로잡은 지금 가장 핫한 뮤지션들이 한글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랩을 한다. 그리고 서구 음악 힙스터들은 한국의 흘러간 가요를 디깅한다. 음악 속 힙 지수를 끌어올리는 한글의 면면을 찾아봤다.

1968427일. 광장에 구국의 아이콘이 나타났다. 긴 칼 옆에 찬 전설의 무신(武臣).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 이순신 장군상 제막식이 열렸다. 26일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은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 근처까지 무장공비가 침투한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 지 석 달 만이다. 그때 우리에겐, 누군가에겐 한국의 심장에 박아둘 무신의 동상이 필요했다.

2009109일, 광장에 문화의 아이콘이 출현했다. 책을 펼쳐 든 문자의 창시자.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왕상 제막식이 거행됐다. 2008년 세계적인 경제지 <포브스>는 한국 가요, 즉 케이팝을 세계를 휩쓸 20가지 트렌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20116SM타운 프랑스 파리 콘서트를 기점으로 케이팝은 만방에 퍼져갔다. 지난 6월, 방탄소년단은 영국 문화·체육의 심장인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2시간 30분 동안 한국어로 노래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6만 명이 따라 불렀다. 격세지감, 상전벽해다. 창시자가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 반포일과 창제 원리가 명확한 세계 유일의 문자를 바탕으로 한 한국어는 570년 넘게 바다 밖에 어디 명함 내밀 곳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한국어는 이제 전 세계 케이팝·한류 팬들의 영어요, 히브리어요, 라틴어다. ‘오빠(oppa)’ ‘애교(aegyo)’ 같은 말을 모르고 케이(K-) 팬을 자처할 수 없는 지경이다.

아이돌 케이팝뿐 아니다. 지난해 이맘때, 머나먼 핀란드 헬싱키 시내에서 한국어 제창을 들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노래와 함께 흔들리는 관객들의 손에서 시작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이른바 ‘푸른 눈의’ 음악 팬들. 플로(Flow) 페스티벌의 야외무대에 출연한 한국인 DJ 예지의 시간이었다. 그의 곡 ‘Drink Im Sippin On’(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 794만)에 들어간 한국어 반복 구절. 그보다 1시간 전에는 같은 무대에서 다른 한국어가 들렸다. 한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DJ 페기 구의 인기곡 ‘It Makes You Forget(Itgehane)’(유튜브 조회수 695만). ‘잊게 하네!’의 제창이 여기가 어디인가를 잊게 했다. 작년과 올해 직접 만나서 들은 예지와 페기 구의 이야기 속에서 한국어는 매우 특별한 언어다. “처음엔 그랬어요. ‘내 음악의 가사를 주변 사람이 알아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대학 때는 주위에 한국인 친구가 거의 없었거든요.” 예지는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음악에 추상적으로 집어넣고 싶었다. 서사는 숨기되 감정에는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서 한국어를 썼다. “그런데 만들다 보니까 한국말의 소리가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영어와 비교하면 각이 많이 져 있고, 딱딱 소리가 날 때마다 귀에 닿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특히 조용히 속삭이듯 부르면 더 그렇게 들려요. 질감이 예쁘고 느낌이 좋아서. 누군가는 제 음악을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과 비교하던데요.” 예지는 본인을 슈퍼스타로 만든 이 노래에 이어 지난해 신곡 ‘One More’를 냈고, 한국어로 부르는 ‘한 번만 더~’는 애플뮤직 광고에 삽입됐다.

페기 구는 199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영국으로 유학했다. “처음엔 영어도 써보고 다른 언어로도 (작사를) 해봤어요. 근데 있잖아요. 일본에 가서 레코드 디깅을 하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돼 있는 바이닐을 찾으면 그 바이닐이 뭔가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음악이 언어보다 더 음악적으로 다가오니까. 게다가 저는 ‘프라우드 코리언(Proud Korean)’이에요. 영어도 편하지만 모국어로 가사를 전달하는 게 가장 진심을 담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제가 시작할 때는 하우스 뮤직 쪽에 한국어 노래가 거의 없었어요.” 처음에는 도전이었다고 했다. ‘외계어처럼 들리진 않을까.’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염려되기도 했지만 꼭 한 번 해보고픈 도전이었다고. 페기 구의 한국어 가사는 상당 부분이 그가 ‘막툽 오빠’ 또는 ‘바다 오빠’라 부르는 막툽(Maktoop AKA 바다)의 솜씨다. 물론 페기가 노래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막툽이 시처럼 다듬어 완성해낸다. Itgehane’와 ‘Han Jan’에 ‘혼란스러운 세상사 잊게 하네’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 원샷’을 천연덕스레 녹여내던 페기는 올해 발표한 신곡에 또 ‘한국어 장난’을 쳤다. ‘Starry Night’에 ‘별이 빛나는 밤’을 넣고, 아예 ‘Han Jan’의 속편 ‘Han Pan’에는 또 한국어 넋두리를 넣었다. ‘세상사는 한 판 굿일 뿐이고’.

‘슈퍼오거니즘(Superorganism)’도 한국어로 재미를 봤다. 키덜트와 뉴트로를 복합한 환상적 시청각으로 요즘 세계 힙스터들을 홀린 8인조 다국적 밴드. 대표곡 ‘Something for your M.I.N.D.’(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 455만)의 영어 후렴구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혼란스러운 한국어 구절. ‘무엇인가 정신에 집어넣으세요’ ‘마음에 어떤 것 필요합니까?’ 한국인 부모를 둔 멤버 솔(Soul)이 녹음 때 즉흥적으로 떠올린 한국어 가사다. 올해 초 만난 솔은 “문법적으로는 좀 틀려도 더 시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재밌어하고요”라고 했다. 동료 멤버 루비와 해리도 “(미국 힙합 그룹) 미고스의 반복되는 가사처럼 중독성 있어요.” “언어란 쉼 없이 변하고 서로 섞이는데 이런 모든 현상 자체가 아주 아름답다고 봐요”고 거들었다. 솔은 슈퍼오거니즘 멤버들이 함께 쓰는 음원 서비스 재생 목록에 얼마 전 신중현을 추가했다.

지난해 서울에서 만난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맥 드마르코도 ‘요즘 신중현에 빠졌다’고 털어놨다. 한국을 찾는 음악가들을 만나보면 근 몇 년간 신중현과 김정미의 음악을 듣고 있다는 얘기를 밥 먹듯 한다. 텍사스 출신으로 태국 분위기의 음악을 하는 밴드 ‘크루앙빈’의 인기에서 보듯 아시아의 예스러운 음악을 찾아 듣고 열광하는 서구 힙스터 음악 팬들에게도 한국어는 점점 낯을 트고 있다. 미국 공영 방송 NPR의 인기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를 뜨겁게 달군 민요 록 밴드 ‘씽씽’, 몇 년째 전 세계를 순회하며 무대에 서는 ‘잠비나이’의 한국어 가사는 물론이다. ‘Baby’와 ‘In the House’를 섞는 한국 노래는 이제 되레 재미없다. 세계의 힙스터들은 진짜 한국어 가사를 더 원한다. ‘지니어스(Genius.com)’ 같은 가사 번역 사이트부터 케이팝 전문 번역 트위터 계정까지, 한국어 가사를 해석해줄 매체는 이제 얼마든 널려 있다. 하다못해 구글 번역기도 있지 않은가. 한국어가 인쇄된 티셔츠도 인기다.

몇 년 전, 볼리비아에 간 적 있다. 고산 도시 라파스에서 현지 슈퍼주니어 팬들의 ‘슈퍼주니어 서울 콘서트’ 감상회가 열렸다. 작은 예술 영화관을 통째로 대관했다. 취재하러 갔다. 팬클럽 회장이 내게 잠깐 단상에 올라 자기소개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쨌든 난 슈퍼주니어와 같은 말을 쓰는 본고장에서 온 신기한 사람이었으니까. 영어로 몇 마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던 내 귀에 객석의 스페인어 웅성거림이 들렸다. ‘뭐라도 좋으니 한국어를 좀 해달라’. 뭐라도 좋다고 했으니 딱 한 마디 했다. 이 말을 내뱉은 뒤 난 슈퍼주니어로, 아니 슈퍼스타, 월드스타로 사는 게 어떤 일인지 깨달았다. 극장이 무너질 듯 환호성이 터졌다. 아무도 아닌 나를 향해. 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싸랑해!

피처 에디터
김아름
임희윤(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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