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꿈꾸다

W

샤넬 2019/20 크루즈 쇼 리포트.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인 버지니 비아르의 이름을 건 첫 컬렉션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순간!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한 채,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든 샤넬 2019/20 크루즈 쇼가 펼쳐졌다.

지난 53일, 파리 그랑팔레. 칼 라거펠트의 곁에서 30여 년간 함께 샤넬 컬렉션을 이 끌어온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첫 쇼를 펼치는 날이었다. 그녀의 데뷔 쇼를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2019/20 크루즈 컬렉션을 통해 그녀는 전 세계에서 모인 프레스와 VIP, 그리고 샤넬의 앰배서더와 프렌즈들을 상상 속 여정으로 초대했다. 한국의 아이린을 비롯해 바네사 파라디와 릴리 로즈 뎁 모녀, 안나 무글라리스, 캐롤린 드 매그레, 가스파르 울리엘, 키라 나이틀리, 고마츠 나나, 리우웬 등이 새로운 쇼장에 설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뿐 아니라 샤넬 J12 워치의 캠페인 모델이기도 한 전설적인 영화배우 알리 맥그로와 수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도 자리해 눈길을 끌었다. 아침 9시, 그랑팔레 안으로 들어서니 이번 크루즈 쇼를 위해 특별 제작한 리비에라(Le Riviera) 카페가 손님들을 맞이했고, 관객들은 샤넬 익스프레스(Chanel Express)의 럭셔리한 레스토랑 겸 카페 공간에서 간단히 커피 한잔과 크루아상 등으로 프렌치 스타일 아침을 만끽했다.

키라 나이틀리.

안나 무글라리스.

바네사 파라디와 릴리 로즈 뎁 모녀.

클라우디아 시퍼.

알리 맥그로.

캐롤린 드 매그레.

그런 다음 마치 어디선가 기차 경적 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앤티크한 분위기의 파리 기차역으로 향했다. 사실 그건 그랑팔레의 드넓은 공간에 세워진 기차역이었는데, 어느새 당장이라도 기차가 들어설 것만 같은 플랫폼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매혹적인 여행의 선동자’라고 할 법한 버지니 비아르는 이곳에 상징적인 도시의 이정표를 더했다. 즉, 시간을 건너뛰어 마드무아젤 샤넬과 만나려는 듯 그녀가 연인 보이 카펠과 함께 자주 오간 도빌 기차역을 비롯해 이국적인 도시의 플랫폼을 선보였다. 그 공간을 메운 인파들은 샤넬이 선사한 특별한 여행의 정취를 만끽하며 다들 기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여기엔 얼마 전 타계한 칼 라거펠트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쇼노트에 적힌 ‘당신은 움직이고 여행을 떠나야 한다. 경이로움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은 젊음과 즐거움이 곧 에너지임을 일깨운다’라는 칼 라거펠트의 메시지 역시 여행을 첫 쇼의 주제로 삼은 버지니의 선택에 힘을 더했다.

버지니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여행 스토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샤넬 고유의 상징적인 패션 언어를 섬세하게 차용한 크루즈 쇼는 첫 번째 룩부터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더없이 모던하고 역동적인 실루엣의 룩은 ‘버지니가 새롭게 이끈 컬렉션’임을 고스란히 드러냈으니까.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편안함과 기능성이 담긴 룩. 여기에 명백한 우아함을 담아낸 컬렉션에는 체인, 리본, 카멜리아 장식 등 샤넬 고유의 심벌이 익숙한 듯 또 새롭게 담겨 있었다. 그 중 개버딘과 왁스 코팅 처리한 코튼 소재의 더블 버튼이 달린 팬츠 슈트는 오늘날의 모던한 여성들에게 매혹적으로 어필할 만했다. 캐주얼한 후디 장식의 트렌치코트와 허리 라인을 강조한 오버사이즈 코트처럼 동시대적으로 변형된 룩도 돋보였다. 무엇보다 와이드 팬츠는 샤넬의 앰배서더인 캐롤린 드 매그레가 지닌 당당하고 쿨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버킷리스트에 당장 넣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 크루즈 컬렉션에서 눈에 띈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아름답고 풍부한 컬러 팔레트였다. 아이코닉한 블랙&화이트 컬러와 함께 감미로운 파스텔 톤의 연보라와 하늘색을 비롯해 강렬하고 화려한 푸크시아 핑크와 코발트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향연은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특히 푸크시아 핑크 바탕에 파스텔 톤으로 프린팅 처리한 나뭇잎 무늬는 마치 빠르게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햄 라인을 감싸는 시퀸 장식과 실크 소재를 사용해 완성한 꽃무늬 자수 장식, 나아가 카멜리아 코르사주는 꽃이 만발한 봄날의 정원을 연상시켰다. 이처럼 감탄을 자아내는 장식미는 기능적이고도 간편해 보이는 옷차림에 쿠튀르 터치를 더하며 샤넬 장인들의 손맛을 드러냈다. 샤넬의 모든 컬렉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그너처 트위드 재킷은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는 여유로운 실루엣과 긴 기장으로 활 동성을 더했고,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재킷은 기능적인 우아함을 드러냈다. 특히 브랜드의 상징인 체인을 사용해 햄 라인을 라이닝 처리하거나 가죽을 엮어 만든 체인으로 벨트를 둘러 허리 부분을 강조하는 등 곳곳에 샤넬 하우스의 심벌을 담아낸 버지니의 사려 깊음이란! 더구나 주머니 크기에 따라 유동적으로 단추 크기를 달리하고, 재킷 안 쪽에 실크 소재를 넣어 우븐 트위드 패턴이 완벽히 이어지도록 하는 등 모든 디자인에는 섬세한 디테일과 노하우가 숨어 있었다.

한편 드레스들은 로맨틱한 동시에 명료한 실루엣으로 완성되었다. 드레스의 순수한 라인은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을 주면서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볼륨감을 선사했다. 우선 얇은 시스루 패널들은 기차에서 내릴 때 바람결에 두둥실 떠오를 듯 가벼워 보였고, 피날레 룩을 비롯한 이브닝드레스에도 햄라인에 체인이나 꽃자수 장식을 가미해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 비아르는 이러한 패션의 특별한 여정을 이어가며 금사가 수 놓아진 순백의 레이스 드레스와 낮게 파인 목선 사이로 커다란 검정 새틴 리본이 드러나는 미드나이트 블루 색상의 레이스 드레스 앙상블을 무대에 올렸다. 특히 그녀는 기차역에서 누구나 바라보게 되는 큼직한 시계를 떠올리며 우아한 기퓌르 레이스 장식의 롱 드레스에 수많은 시계 다이얼을 더하고, 기찻길 형태처럼 사다리 모양으로 레이스 장식을 달아 그 매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한편 또 다른 드레스에는 목 언저리에 독창적인 시곗바늘 모티프의 자수 장식을 넣기도 했다.

새로운 수장의 기운을 얻어 한층 모던하게 진화한 샤넬 컬렉션은 익숙한 아이템들을 탐날 만큼 신선하게 탈바꿈시켰다. 크루즈 컬렉션의 완성을 이루는 액세서리 컬렉션 중 11.12 백은 퀼팅 페이턴트 레더와 꽃 장식을 가미한 트위드 소재를 사용하고 핸들을 달기도 했다. 샤넬 19 백은 퀼팅 저지 소재를 활용한 한편, 샤넬 31 백은 색이 바랜 데님소재로 청량한 매력을 더했다. 여행에 최적화된,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맥시 더플백과 백팩뿐 아니라 컬러풀한 미니백과 벨트백을 함께 선보여 시선을 사로잡았고 말이다. 여기에 앞코가 뾰족한 펌프스나 흑백이 명쾌한 조화를 이룬 시그너처 투톤을 활용한 부티, 트위드 소재의 플랫 슈즈 등 샤넬의 전통적인 요소를 모던하게 차용한 슈즈로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런 한편 라인스톤이 세팅된 레진 소재를 이용해 철도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작업용 램프를 새긴 미노디에르 주얼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난 30여 년간 샤넬 하우스에서 칼 라거펠트의 오른팔로 책임감을 다했던 버지니 비아르. 그녀가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선보인 파리 그랑팔레의 크루즈 쇼 현장. 피날레 인사를 건네자 그녀의 담대한 새 여정을 응원하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 박수를 건네는 프런트로의 셀레브리티들.

이윽고 버지니가 피날레 인사를 하러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새로운 컬렉션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샤넬의 새로운 챕터를 축하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새로운 항해를 위해 닻을 올린 그녀의 담대한 용기와 변함없이 샤넬의 정수를 지킨 진중함을 향해서. 그랑팔레에서 펼쳐진 샤넬 크루즈 쇼가 막이 내리자 바로 SNS 세상에서 또 한 번의 버추얼 쇼가 펼쳐졌다. #CHANELCruise라는 해시태그를 단 수많은 샤넬 2019/20 크루즈 쇼 포스팅이 올라왔고, 특히 쇼장을 찾은 샤넬 앰배서더들의 계정에 올라온 이미지들은 눈부신 조회수를 얻었다. 무엇보다 버지니 비아르는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통해 그녀만의 신선하고 섬세한 비전을 전하며 샤넬의 스토리를 이어갔다. 가브리엘 샤넬로 시작해 칼 라거펠트가 구축한 모던한 샤넬의 바통을 이어받아 브랜드의 순수한 상징과 정교한 디테일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공을 쏘아 올린 것이다.

관객들은 가슴 한가득 벅찬 여운을 끌어안은 채 상기된 얼굴로 쇼장을 나섰다. 그들은 이번 쇼가 선사한 여행의 다채로운 꿈을 간직하며 새로운 시즌이 도래하기를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를 통해 이어진 하우스의 전통과 비전 가득한 미래, 그 사이에서 영원히 바래지 않을 오늘의 성역을 오랜 시간 지킨 강인한 여성인 버지니 비아르. 그녀는 이번 쇼를 통해 모던한 우아함과 실용적인 미학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렀다. 그리고 그녀의 의미심장한 첫 행보는 마드무아젤 샤넬이 이국적인 도시에서 얻은 영감을 매혹적으로 담아냈다. 다채로운 각 도시의 플랫폼이 상징하듯 풍성한 컬렉션에는 동서양이 교차하는 여러 지역의 특징들이 섬세하게 깃들어져 있었고, 그 모든 룩은 결국 샤넬의 여행 정신으로 귀결되었다. ‘인생은 여행처럼 흘러간다’는 걸 암시하듯 버지니 비아르가 새롭게 해석한 에너지, 즉 샤넬의 정신과 맞닿은 ‘여행’은 우리에게 일상을 환기하는 그 가치를 되새기게 해줄 것이다. 어찌 보면 여행의 시작점과 종착지는 같지 않은가.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나의 집일 테니까. 일상을 여행 처럼, 혹은 여행과 같은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여행지이자 집이 될 수도 있다. 샤넬의 새로운 크루즈 쇼이자 버지니 비아르의 첫 컬렉션이 여느 이 국적인 도시를 제치고 샤넬 하우스의 심장부인 파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듯이. 그리고 샤넬이 사랑한 도시가 지닌 다채로운 영감을 통해 결국 샤넬의 순수한 본질에 더욱 깊숙이 다가간 채, 기차 경적 소리처럼 설레고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패션 에디터
박연경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