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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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의 얼굴을 다각도로 들여다봤다. 선과 악, 기쁨과 분노, 어제와 오늘. 무엇을 상상하든 우리가 몰랐던 낯선 한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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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핀란드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tvN 예능 <서울메이트 2> 촬영을 위해 김준호 형과 함께 짧고 굵은 일정으로 다녀왔다. 우리가 게스트가 되어 외국인 집에 머무는 일종의 홈셰어링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심할 때 탈출해서 그런지 도착하자마자 숨이 단전까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조용하고 저녁마다 해가 금방 지 곤 했다. 머무는 동안 사우나를 정말 원 없이 했다.

요즘은 거의 생방송 스케줄로 드라마를 찍고 있지 않나? SBS 주말 드라마 <운명과 분노>가 장안의 화제다. 주상욱, 이민정, 소이현 등 주인공 배우끼리 욕망과 배신으로 얽혀 있더라. 단순히 누구 한 명의 복수가 성공한다고 해서 끝나는 구도가 아니다. 인물들의 욕망이 복잡하게 꼬여 있다. 현장에서 웃고 떠들면서 화기애애하다가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서로 으르렁거린다(웃음).

극 중에서 아픈 과거가 있는 싱글대디 진태오 역을 맡았다. 어떻게 보면 데뷔 이래 첫 아빠 역할 아닌가? 그 점이 가장 끌렸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여덟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역할이다. 주변에 아빠가 된 친구도 많다. 진태오의 가장 큰 욕망은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불치병에 걸린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딸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인물이다.

불꽃 튀는 연기를 펼치는 상대 배역 차수연으로 소이현 씨가 등장한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 같다. 데뷔한 시기가 비슷하다. 같은 헤어·메이크업 숍에 다닌 시절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분노와 욕망으로 얽혀 있는 사이지만 출연 배우 모두가 알고 보면 사적인 친분이 조금씩 있다. 소이현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약간 강아지 같은 귀여운 사람들이다. 촬영 시작하면 무섭게 돌변하지만 말이다. 촬영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다. 출연한 작품 가운데서도 이렇게 험악한 드라마는 오랜만인 것 같다. 앞으로 대사 수위도 점점 더 세질 거다.

이를테면? 진태오가 차수연에게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일단 ‘신장만 내놔’, 이런 대사가 있다. 장기까지 운운하는 무서운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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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 이기우는 욕망이란 단어와 참 안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인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 안에 뛰어들기보다는 멀찍이서 관망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욕심 있게 사는 편 은 아니다. 살면서 어디서든 욕망 강한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인데 나랑은 정말 안 맞는다. 나에게 욕망은 뭐랄까, 리스크가 되게 큰 파생 상품 같다. 자칫 잘못하면 한 번에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데뷔한 지 16년 정도 됐는데, 목적을 위해 맹렬하게 뭔 가 이루려고 하는 사람을 적지 않게 경험해왔다. 그래서 욕망이 커 보이는 사람은 일단 경계하고 보는 편이다.

실례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기우 배우가 마흔을 앞두고 있다 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오늘 촬영장에서도 야상 패딩을 입은 남자가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데, 학생 같아 보였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등장한 2003년 데뷔작 <클래식>이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그럴까. 그 영화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감사한 일이지만 나에겐 딜레마이기도 하다. 데뷔한 지 16년 차인데 대표작이 데뷔작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시나리오를 쥐어본 영화가 그 작품이었다. 너무 신기했고 그 감정으로부터 2년 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 개봉 후에 아주 많은 영화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는데 모두 고사하고 연기 수업만 받으러 다녔다. 당시엔 아무리 연기를 배우려고 해도 뭐가 진짜인지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부딪치려고 했다. <클래식> 이후로 출연했던 작품이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건 아닐까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콤플렉스는 내 위치에서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요즘처럼 퇴사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학교까지 등장하는 시대에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꾸준히 일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배우 일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공백기 없이 일은 계속해왔지만 심리적인 슬럼프가 찾아왔다. 한 4년 전쯤이었을까. 1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엔 힘들었지만 오히려 약이 됐던 시기다. 과거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좋다. 아직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비슷한 고민을 하는 후배에게는 어떤 식으로 조언하는 편인가? 그 시기에 나는 ‘버티다 보면 언젠가 된다’고 마인드 컨트롤했던 것 같다. 힘들겠지만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면 신호가 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그걸 잡고 잘 따라가거나 올라가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는 타이밍이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해준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회색 울 더블 재킷은 김서룡 옴므, 흰색 터틀넥 톱은 캘빈 클라인 진, 데님 팬츠는 발렌시아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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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년에 JTBC 역대 드라마 시청률 순위 1위를 기록 한 <품위있는 그녀>에서 김희선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변호사 역할이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밉상남 계보에 한 획을 그은 정상훈 배우의 진상 퍼레이드를 우월한 피지컬과 목소리로 제 압할 때 모두가 후련함을 느꼈다. 정상훈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살려주세요, 키다리 아저씨’라고 조아리는 장면은 특히 압권이 었다. 그 대사는 상훈이 형의 애드리브였다(웃음).

큰 키가 배우로서 장점이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솔직히 말하면 단점이 더 많다. 상대 배우와의 앙상블을 위해 발밑에 단을 깔아야 하는 경우도 많고, 내가 다리를 벌려서 눈높이를 맞춰줘야 할 때도 있다. 데뷔 당시에는 지붕이 카메라 앵글에 함께 잡힐 정도로 세트를 뛰어넘는다고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키 때문에 캐스팅에 떨어진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틈새시장을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가진 장점으로서 큰 키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만 생각하려고 한다(웃음). 다행히 세대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190cm인데 할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정 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가능한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우월한 유전자 덕분에 요즘도 가끔 서울패션위크 기간에 런웨이 위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창 시절엔 경영학과에 들어가서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 모델은 대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로 우연치 않게 시작한 일이다. 인생의 은사님을 떠올리면 세 분 정도 있는데, 그중 한 분이 디자이너 송지오 선생님이다. 나를 처음 모델로 발탁하고 무대 위에 세워준 분이다. 작품과 겹쳐서 계속 함께하지 못하다가 3년 전부터 매 시즌 쇼에 오르고 있다. 만날 때마다 영감을 주신다. 인간적으로도 너무 따뜻하고 예술가로서도 너무 멋진 분이다. 작업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내 키 보다 더 큰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장면을 몰래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검은색 가죽 혀 못 다녔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스키도 타고, 따뜻재킷은 김서룡 옴므, 데님 재킷은 캘빈 클라인 진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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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았을 때 그것을 다스리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 머리가 복잡하고 심기가 불편할 때는 서핑 영상을 틀어놓는다. 서핑할 때의 기분을 조금은 아니까, 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힐링이 된다.

서핑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서핑을 잘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파도를 만났을 때 그것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스릴감이 좋다고 하더라. 그런데 파도에 한 번 말리면 완전히 세탁기에 들어간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파도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보드 타고 바다 저 멀리 나가서 둥둥 떠 있는 채로 찰랑거리는 물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머리를 비우고 ‘멍’ 때리기에 정말 좋은 방법이다.

스타일리스트가 말하기를 평소에 파타고니아만 즐겨 입는다더라. 서핑, 캠핑 등 아웃도어 친화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취향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몸을 고생시키는 걸 좋아한다. 스케줄이 없을 때는 큰 배낭 짊어지고 백패킹을 즐겨 다닌다. 태백산맥이나 설악산에 헬기장이 뜨문뜨문 있다. 거기서 텐트 치고, 밥도 요리해 먹고, 친구랑 이야기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온다. 지난 1년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여행을 전혀 못 다녔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스키도 타고, 따뜻한 나라로 가서 묵은 때를 털고 와야 할 것 같다.

꼭 한번 맡아보고 싶은데 잘 안 들어오는 역할이 있나? 동네 형. 가끔 끄적거리는 노트가 있는데 이런 캐릭터를 혼자 그려본 적 있다. 하는 일 없이 동네 슈퍼마켓 평상에 매일 앉아서 맥주 마시면서 지나가는 주인공들에게 툭툭 말을 던지는데 그게 다 정답인 사람! 완전히 풀어진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 그동안 나는 항상 각 잡힌 슈트를 갖춰 입고 구두를 신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역할만 했다. 정우성 선배가 연기한 영화 <똥개>의 차철민만큼 완전히 나를 내려놓지는 못 하겠지만 그런 재미있고 유쾌한 캐릭터를 찾고있다. 친구인 배우 김지석이 요즘 하고 있 는 tvN 드라마 <톱스타 유백이>의 유백이도 너무 재미있게 보고있다. 언젠가 나도 그런 풀어진 연기를 할 수 있겠지.

피처 에디터
김아름
패션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박종하
스타일리스트
정혜진(유포리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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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리(포레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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