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번째 스토리텔러, 유르겐

W

유르겐 텔러에게 손을 내민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 그 두 사람이 만들어낸 강렬한 시각적 자극에 대하여.

알렉스 프래거, 낸 골딘, 스테판 쇼어, 샘 테일러 우드, 필립 로르카 디 코르시아, 아라키 노부요시. 패션 잡지보다는 사진집으로 만나는 것이, 패션 하우스 쇼윈도보다는 퐁피두 센터나 테이트 모던, 모마 같은 현대미술관에서 사진을 마주하는 것이 더 익숙한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2002 F/W 시즌부터 시작된 보테가 베네타 하우스의 ‘더아트 오브 컬래버레이션’ 작업에 참여한 사진작가라는 것. 이 프로젝트는 캠페인 촬영 작가를 ‘패션 사진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각 시즌 컬렉션에 가장 적합한 아티스트와 최상의 비주얼을 만든다는 취지하에 시작된 것으로, 이번 시즌 스물일곱 번째 주자로 유르겐 텔러가 낙점되었다.

유르겐 텔러를 검색창에 쳐보면, 거의 모든 기사에 등장하는 단어가 두 개 있다. ‘Raw’와 ‘Overexposure’. 직관적인 시선으로 잡아낸 날것 같은 강렬함, 그리고 과다 노출로 하얗게 날린 필름 사진 톤이 그가 만드는 사진을 대변하는 두 축이다. 2003년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이러한 시그너처 스타일을 갖게 된 데에는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1986년 뮌헨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군대 문제를 피하기 위해 별다른 대책 없이 런던으로 거처를 옮겨 어시스턴트가 되고자 찾아간 사진가 닉 나이트,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베네티아 스콧(그녀 역시 사진가이기도 하다)이 두 주인공. 닉 나이트는 콘탁스 G2 35mm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진 작업을 하는 유르겐에게 ‘어시스턴트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만의 작업을 하라’고 조언했고, 베네티아 스콧은 함께한 첫 작업 후 ‘당신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지금 찍는 사진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며 당시 유르겐이 한동안 빠져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 작업을 때려치우고 35mm 카메라로 돌아가 특유의 작업을 해나갈 것을 권했다. 이후 베네티아와 유르겐이 연인 관계로 발전해 90년대에 양산한 수많은 멋진 패션 화보와 광고 작업은 지금도 회자된다(그러나 둘은 2003년 헤어졌다). 하이패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섞어낸 이들 작업의 특징은 당시 ‘그런지 슛’, ‘안티-패션 슛’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패션계를 열광시켰다. 그뿐 아니라 상업적인 패션
사진 작업에만 갇히지 않고 자신의 가족, 주변의 공간과 사물 등 다양한 피사체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담아낸 유르겐의 개인 작업은 그를 예술 사진가로 인정받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는 패션계와 미술계 양쪽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저는 늘 여자의 옷,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선택권을 줄지에 관해 생각하죠.” 이번 시즌 그래픽 패턴이 돋보이는 컬렉션을 내놓은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는 이를 가장 세련되게 담을 사진가로 유르겐 텔러를 택했다. 모델은 중성적인 동시에 고전적인 얼굴을 가진 안나 클리브랜드가 발탁됐고, 장소는 1940~50년대 유명 건축가이자가구 디자이너 카를로 몰리노의 예전 저택인 토리노의 ‘뮤제오 카사 몰리노’가 낙점되었다. 그래픽적인 룩을 걸친 묘한 피사체, 화려한 배경, 그리고 직관적인 시선이 결합해 탄생한 결과물은?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이 살아 있는 세련된 컷들! 이는 여자의 실제적인 옷차림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는 토마스 마이어의 방향성에도 멋지게 부합한다. 이에 더해 촬영 날, 캠페인 촬영에 이어 유르겐의 시선으로 보테가 베네타의 주얼리를 예술적으로 해석하는 특별한 작업도 함께 진행됐다. 이를 위해 모델 안나는 산화된 어두운 실버 소재인 아르젠토 오시다토와 지르코니아 큐빅이 어우러진 보테가 베네타의 새 시즌 주얼리만 걸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제 작업에 반응하고, 작업을 존중해주는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기 때문에 재미없는 촬영을 그저 돈 벌기 위해 하긴 힘들
죠.” 지난 2009년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유르겐이 했던 이야기다. 그가 6년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찍은 샬럿 램플링과 라쿠엘 짐머만의 누드 시리즈와도 어딘지 닮은 이번 작업을 보니 그가 이번 촬영을 하며 토마스, 안나와 얼마나 깊이 교감을 나누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에디터
이경은
포토그래퍼
JUERGEN TELLER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