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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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 넬슨의 이야기>는 사실 제인 버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40여 년 전 발표된 세르주 갱스부르의 걸작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다.

<멜로디 넬슨의 이야기(Histoire de Melody Nelson)>(이하 <멜로디 넬슨>)는 세르주 갱스부르가1 971년에 발표한 콘셉트 앨범이다. 7곡의 노래가 흐르는 28분 동안 그는 자신과 멜로디 넬슨이라는 소녀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연한 사고로 시작된 10대 여자아이와의 로맨스는 결국 몽환적이고 퇴폐적인 사운드와 함께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가상의 회고담 형식을 취한 이 작업에 영감을 준 건 당시의 연인이었던 제인 버킨이다. 그녀는 이 앨범에서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연기했고, 토플리스 차림에 원숭이 인형을 끌어안은 채 재킷에 등장했다.

발매 당시 상업적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멜로디 넬슨>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드 라 소울, 포티셰드, 마이클 스타이프, 플라시보, 벡 등 수많은 뮤지션 이 시적인 프렌치 록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고백한 바 있다.4 0여 년 전에 세상에 나온 노래들이지만 실험적인 사운드의 충격은 여전히 유효하다. 애초에 제인 버킨과의 인터뷰가 추진된 건 리마스터링 음원이 포함된 <멜로디 넬슨L>P 미니어처 음반이 한국에 발매됐을 무렵, 그러니까 작년 초겨울쯤이었다. 하지만 촘촘한 투어 일정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참담한 사건이 발생한다. 버킨이 영화 음악가 존 배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딸 케이트 배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두 달 정도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조심스러운 연락이 닿게 됐다. 이제는 괜찮아졌다며 그녀가 미뤄둔 약속을 챙겼다. 제인 버킨은 세르주 갱스부르의 음악을 사람들과 꾸준히 나누는 것이 자신에게 남겨진 당연하면서도 소중한 책임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한때의 연인이자 평생의 친구에 대해, 그리고 전설로 기억되는 음악에 대해 물었다.

발매 당시 <멜로디 넬슨>은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 당신과 세르주 갱스부르에게도 그 무렵의 상업적 실패는 큰 충격이었나?
물론 그는 실망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는 작업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 기운을 북돋으려고 했다. 나는 그의 확신이 언젠가는 보상을 받을 거라고 봤다. 다행히 세르주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은 오래 살았다. 그리고 <멜로디 넬슨>으로 받은 골든디스크를 내게 주었다. 레게 앨범 <무기와 그 외의 것들(Aux Armes Et Caetera)>이 상업적 성공을 선물했다면 <멜로디 넬슨>은 비평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도 결국에는 처음의 실망감을 다 극복했을 것이다.

<멜로디 넬슨>은 1971년의 당신에게,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당신에게 각각 어떤 의미의 앨범일까?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있지 않을까?
레코딩 당시의 흥분을 여전히 기억한다. 전에 시도되지 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작업이라는 절대적 확신이 있었다. 앨범 안에서 이야기가 흐르고, 그 끝에는 놀라운 마무리가 있지 않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난 세월 내내 멜로디는 그렇게 우뚝 서 있었으며 나는 실로 웅장한 작업의 목격자로 남아 있다.

수록곡인 ‘En Melody’에서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듯한 당신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녹음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나?
유고슬라비아에 앤드루(영화감독인 제인 버킨의 오빠 앤드루 버킨)와 함께 있을 때였다. 한창 장난을 치고 있는데 세르주가 문득 녹음기를 들고 근처로 왔다. 그때 앤드루가 날 마구 간지럽힌 거다. 스물다섯 살 무렵이었다. 녹음을 한 게 앤드루였는지 세르주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진 않는다. 아무튼 세르주가 앤드루로부터 테이프를 건네받았고, 그 웃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멜로디 넬슨> 앨범에 들어간 것만은 분명하다.

세르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킷 사진에 등장한 원숭이 인형을 그의 관에 넣어줬다고 들었다. 그 인형은 어떤 의미였나?
어린 시절의 내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미신 같겠지만 내게는 정말 소중했기 때문에 인형 없이는 여행도 다니질 않았다. 세르주 역시 원숭이를 존중해줬다. 아마도 나를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원래는 삼촌이 펍에서 따온 물건이었다. 6~7살 이후로 늘 함께했으며 내가 좋아한 유일한 인형이다. 심지어 여동생은 그 원숭이가 학교에 다니고 음식도 먹는다고 믿었다. 내가 인형에게 숙제를 시키거나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척했기 때문이다. 정말 온갖 추억을 함께 쌓았다. 그런 애정을 알게 된 세르주는 내게 ‘오랑우탄(Orang Outan)’이란 곡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관에 인형을 넣었을 때, 아이들(샤를로트와 케이트)은 인형이 세르주를 돌봐줄 거란 생각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별로 귀여운 구석은 없는 인형이었다. 하지만 항상 내게 믿음과 미신,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지금도 세르주 갱스부르의 음악을 듣곤 하나? 특히 자주 듣는 곡이나 앨범이 있다면?
또 다른 콘셉트 앨범인 <양배추 머리 남자(L’Homme a tete de chou)>는 마릴루라는 소녀와의 사랑에 미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무기와 그 외의 것들>은 프랑스에서 처음 시도된 아방가르드 레게 앨범이었다. ‘떠난다는 말을 하러 왔소(Je suis venu te dire que je m’en vais)’ 역시 세르주가 남긴 위대한 노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르주 갱스부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다. 대중이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의 세르주는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은 예술가이며, 그가 쓴 가사 역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한때는 거침없는 인터뷰 때문에 구설에도 올랐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노스탤지어의 대상이다. 그의 기백이나 허세는 사실 나약한 부분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당시 기준에는 오만불손해 보였지만 이제는 다들 그 이면의 수줍음을 이해하는 듯하다. 옷차림이나 거칠거칠해 보이는 턱수염 등은 하나의 스타일이 됐다. 재킷과 진, 액세서리, 간편한 댄서용 구두, 양말을 신지 않은 발목 등은 요즘 청년들이 곧잘 흉내 내는 것들이다. 나는 그가 새로운 ‘댄디함’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세르주는 무척 지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남자였다.

소중하게 여기던 원숭이 인형까지도 오래전에 세르주 갱스부르에게 내어줬다. 요즘의 당신이 아끼는 물건은 어떤 것들인가?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필요한 물건이야 있을 텐데 그 목록은 대충 이렇다. 베개, 귀마개, 오래된 테니스 신발, 내 아이들의 사진, 내 아이들의 아이들 사진, 새 시계(오랫동안 차던 시계는 한국에 갔을 때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했다), 그리고 안경. 이게 없으면 난 앞을 못 본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기타
GETTYIMAGE/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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