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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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불어닥친 미니멀리즘의 파고가 전통적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재편마저 요구하고 있다. 2011 S/S 시즌은 그 절충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동공을 확장시키는 휘황찬란한 장식은 줄어들었고, 라인업의 절반은 한 번쯤 입어볼 수 있음직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간결하다 해도, 수천 시간을 들여 옷을 짓는 장인 정신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마음 한켠을 아리게 한다. 쿠튀르의 환경은 급류를 타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원류는 지속된다는 증거다.

GIORGIO ARMANI PRIVE

파리에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열리기 며칠 전, <러브 앤 드럭스>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앤 해서웨이는 단단히 솟은 강인한 어깨선이 돋보이는 아르마니 프리베의 시퀸 장식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섰다. 우아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레드카펫 스타일치고는 과감한 선택이었고, 이 드레스는 혹자에게는 환호를, 일부의 패션 폴리스에게는‘ 체포감’이라는 평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앤 해서웨이의 이 드레스는 2011 S/S 오트 쿠튀르에서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진짜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의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쇼를 앞두고 아르마니는 강인하며 현대적인 여성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이번 컬렉션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꼼꼼하게 몸에 맞도록 재단된 실루엣, 정밀한 세공을 통해 탄생하는 보석의 커팅 라인, 그리고 유색보석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광채와 비비드한 색감 같은 것이 보여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조적인 재단과 커팅, 그리고 번쩍이는 소재와 눈에 띄는 주얼 컬러. 이런 키워드에서 예상할 수 있듯,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한 마디로 미래적이었다. 일찍이 피에르 가르뎅과 티에리 뮈글러가 시도한 것의 ‘아르마니판’이라고 칭하면 적당할 듯하다. 몰딩된 재킷과 좁다란 스커트, 그리고 레깅스로 이루어진 첫 번째 룩은 소재의 세련된 광택감과 필립 트레이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행접시 모양의 헤드피스와 어우러져 마치 화성에서 온 패셔너블한 여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부분의 데이웨어는 지극히 매끄러운 라인으로 이루어졌고, 실크와 메탈을 섞어 만들었으며 루비 레드, 에메랄드 그린, 사파이어 블루 같은 주얼 컬러로 구성되었다. 이는 아르마니로서는 좀처럼 시도하지 않던, ‘뉴 룩’인 셈이다. 잘 재단된 재킷과 여신에게 어울리는 바이어스 드레스 같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난 시도였으니.

오트 쿠튀르에서 기대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라는 면에서도 아르마니는 역시 노련했다. 특히 가장 새롭고 놀라운 것은 이브닝웨어에 적용한 프로포션이었는데, 가슴이나 아랫배 부근에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단단한 페플럼 덕분에 보디라인이 더욱 살아나 보이는 효과는 압권이었다.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몇 인치쯤 커팅을 넣어 배색한 아이디어도 멋졌다. 몇몇 이브닝 라인업에서는 꼭 맞는 팬츠와 시프트 드레스를 이용해 가슴을 단단하게 감싸고, 허리는 잘록하게 보이는 보디컨셔스 실루엣이 주요하게 나타났는데, 주얼 장식의 커다란 네크리스 외에 다른 액세서리를 자제해 그 효과를 배가했다. 클라이맥스 즈음에는 색색의 메탈 플레이트로 가슴을 겨우 가린 과감한 드레스도 나왔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본인조차도 “이런 스타일을 모든 여성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레이디 가가라면 충분히 소화하고도 남는다. 한 시대를 풍미한 노장이,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다고 패션계에 고하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컬렉션이었다.

JEAN PAUL GAULTIER

장 폴 고티에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앞두고 프리뷰에 참석한 <WWD>의 기자는 “컬렉션의 테마가 ‘펑크 캉캉(Punk Cancan)’이라고 하자, 주변의 반응은 매우 회의적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쇼 직전 일부 공개된 피스들-색색으로 염색한 모호크족 스타일의 헤어피스, 찢어진 피시넷 스타킹, 거대한 양의 루슈 주름을 잡은 튤 드레스, 핏빛 스터드를 박은 카메오 초커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이 어지러운 피스들(쓰레기처럼 보였다는 표현까지 썼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 도대체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컬렉션이 시작되자, 고티에는 역시 고티에라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쇼의 시작을 알리며 장내의 조명이 점등되자, 룩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카트린 드뇌브의 목소리가 울렸다. 옛 쿠튀르 쇼의 방식 그대로였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패션계에서 장 폴 고티에 하면 과도한 극단을 즐기는 디자이너로 정평이 나 있고, 가끔은 너무 막 나간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이번 컬렉션만큼은 그 모든 어지러운 것들이 지극히 고티에스러운 방식으로 아름답게 정렬되어 있었다. ‘펑크 캉캉’을 보여주겠다는 호언장담 역시 허세가 아니었다. 타탄 체크, 찢어진 메시 같은 전형적인 브리티시 펑크의 요소와 몽파르나스의 쇼걸들이 입는 볼륨 스커트와 러플은 고티에 특유의 ‘프렌치 시크’다운 방식으로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었다. 영국의 ‘펑크’와 프랑스의 ‘캉캉’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패션 피플들의 짓궂은 호기심이 제대로 충족된 것이다. 고티에가 과도한 콘셉트를 즐기는 악동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뛰어난 테일러링 실력을 갖춘 디자이너라는 점 역시 이번 컬렉션에서 제대로 부각되었다. 특히 최근 파리 패션의 주요한 흐름으로 부각된 ‘르 스모킹’을 다양한 버전으로 보여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날렵한 재킷, 매력적이고 우아한 펜슬 스커트, 넓은 통의 와이드 팬츠, 가죽과 새틴 소재로 만든 점프수트, 고티에의 시그너처인 트렌치코트-이브닝드레스 대용으로도 충분한-등의 테일러드 아이템이 입체적인 엠브로이더리 장식과 어우러져 빛을 발했다. 캉캉 쇼걸들의 볼륨 가운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무늬의 드레스에도 어김없이 고티에다운 유머가 들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우아함을 기본으로 하는 오트 쿠튀르의 정신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고티에는 이번 컬렉션의 룩을 두고 ‘난 무정부주의자다(I Am an Anarchist)’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르메스 제국과 결별하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몸이 된 디자이너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꽤 의미 있는 발언이다. 게다가 그는 무시무시한 한파가 파리를 뒤덮은 컬렉션 당일, 쇼를 1시간 20분이나 늦게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쇼장을 뜨지 않았다. 고티에는 역시 패션계의 앙팡테리블(악동)이라는 공공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컬렉션이었다.

VALENTINO

너무나 예쁘게 접힌 플리츠, 플리츠, 플리츠. 이것이 이번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를 정의하는 딱 하나의 단어다. 드레스, 스커트, 블라우스 등 모든 아이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플리츠가 등장했다. 발렌티노를 이어받은 이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 듀오는 레디투웨어와 오트 쿠튀르를 가리지 않고 발렌티노 하우스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섬세한 소재, 누드와 파스텔 위주의 서정적인 색조, 리본과 나비장식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에는 플리츠였다. 빨간 드레스, 리본, 커다란 시폰 소재 러플 등 하우스의 유산 중 눈에 잘 띄는 것들을 먼저 손댄 치우리와 피치올리는 상대적으로 그늘에 가려졌지만 발렌티노의 DNA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플리츠에 주목했고, 이를 재구성하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다.

물론 플리츠 외에 특별한 장식이 없었던 건 아니다. 팔각그물 모양의 프랑스 산 샹티 레이스를 덧붙인 거나, 벌집 모양의 엠브로이더리가 수놓인 네크라인, 꽃무늬 아플리케가 장식된 드레스들은 지극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몇몇 룩에서는 ‘숨겨진’ 쿠튀르적 장치가 튀어나오는 놀라움도 선사했다. 예를 들면 스커트의 주름 사이에 레이스와 아플리케 장식을 숨겨두었다가, 모델이 워킹을 할 때 살짝 드러나도록 했다. 정수리부터 꼼꼼하게 땋아 내린 시뇽 헤어조차 의상의 한 부분인 것처럼 보였고, 서정적인 헤어&메이크업과 의상이 어우러져 모델들은 잘 손질된 우아한 정원을 탐닉하는 나긋나긋한 요정들처럼 느껴졌다. 특히 밑으로 뚝 떨어지는 피터팬 칼라의 셔츠 드레스가 등장하자 관객들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파스텔 색조의 꽃 아플리케가 장식된 얇은 검은색 오간자 튜닉 드레스 역시 베스트 룩 중 하나로 꼽을 만했다. 그렇다고 이번 컬렉션이 지나치게 달달했던 것만은 아니다. 꽃무늬 드레스가 너무 소녀스럽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을 위해 연한 초록색 폴딩 스커트 같은 성숙한 무드의 아이템도 여럿 배치했다.

컬렉션을 앞두고 치우리는 “쿠튀르는 디자이너로서의 나 자신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테스트’가 장인 정신이나 핸드메이드 기술, 하우스의 비전을 해석해내는 안목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번 컬렉션은 꽤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패션계는 이들 듀오의 심미안이 그저 이 정도에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드와 파스텔, 시폰과 오간자만으로 패션 미학을 설파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테니까. 치우리와 피치올리에게 진화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GIVENCHY

리카르도 티시는 게임을 즐기는 디자이너다. 게임의 장르로 따지면 지능형 두뇌퍼즐게임 정도라 할 수 있겠다. ‘내 옷, 아름답지? 게다가 여기엔 너희는 한 눈에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문화, 철학적 영감까지 들어 있다고!’라고 자랑하는 듯하다. 젠 체하는 이 젊은 패션 천재가 그다지 밉지 않은 이유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게 꽤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 티시는 이번 시즌에도 단 10벌만의 쿠튀르 피스를 만들고, 고풍스러운 팔레 방돔으로 소수의 관객만 초대해 자신의 작품을 겨우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감상하도록 했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가 말하고자 한 바는 1950년대 시작된 일본의 전위무용이자, 문화운동인 ‘부토(舞踏)’다. 티시는 자신의 절친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통해 부토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관심을 가질수록 부토가 단순한 무용이 아니라 초현실과 미니멀리즘, 표현주의, 군국주의와 민족주의, 새디즘과 아나키즘 등 다양한 역사, 철학적 배경을 가졌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이번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티시는 부토의 창시자인 가즈오 오노를 뮤즈로 의상을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오노(내면을 표현하는 섬세한 춤사위로 유명하다)의 여성적이고 로맨틱한 면을 부각시키되, 고딕 스타일로 대표되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조화시켰다는 설명인데, 사실 컬렉션 의상 그 자체만 보면 ‘부토’나 ‘가즈오 오노’ 같은 배경을 바로 눈치 채긴 힘들다. 다만, 룩의 영향이 일본에서 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필립 트레이시가 고안한 거대한 모자는 전국시대의 일본 장군들이 쓰는(혹은 일본의 로봇 만화에 등장하는) 보호 모자를 연상시킨다. 티시가 즐겨 쓰는 가톨릭 십자가 같은 모티프는 로봇의 얼굴 부분을 닮은 아플리케 위에 곁들여져 볼레로 가운 위에 수놓였다. 반면 세부 장식은 오트 쿠튀르의 정통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커팅에만 2천 시간, 재봉에만 4천 시간을 들인 옷이다. 하양과 검정 위주의 컬러 팔레트에도 변화가 있었다. 라일락, 누드, 피스타치오 같은 연한 파스텔 컬러에 주황색 같은 눈부신 네온 컬러를 포인트로 사용한 것은 기존의 지방시에서 크게 변화한 대목이다.

오트 쿠튀르를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브랜드는 오늘날 거의 없다. 그나마 남은 몇몇마저도 판매를 의식해 데이웨어와 이브닝웨어의 비율을 비슷한 정도로 조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카르도 티시의 행보는 오늘날 오트 쿠튀르가 어떤 의미로 패션계를 지탱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저 아름답고 난해한 부토-로봇 드레스를 누가 입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PHOTOS|JASON LLOYD-EV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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