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의 재발견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GPS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알리며, 주변에 있는 온라인 친구를 찾는다. 이런 지금 세월과 문화를 깨알같이 쌓아온 강북의 동네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당신이 어디서 노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것.

1. 상수역에서 당인리발전소 일대로
홍대 카페의 중심을 옮겨놓은 이리카페.
2, 9. 개성 있는 출판물을 판매하며
낭독회나 잡지공방 등의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작은 서점 유어마인드. 3. ‘삼거리포차’앞에
낭만적인 배경 음악을 선사해온
음반가게 레코드 포럼. 4, 7. 홍대 거리 전경.
5, 13, 15. 뮤지션 싸지타 부부가 운영하는
서프 바 썬샤인. 6, 11. 아티스트 소규모 출판물을
다루는 책방 더 북 소사이어티. 8, 14. 환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카페 겸
동네 병원 제너럴 닥터. 10. 미대 중심의
홍익대학교 학풍은 홍대 앞에도 특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12. 낡은 공장 내부를
멋있게 살린 카페 앤트러사이트.

홍대

“여기 홍대 클럽이 어디예요?” 주차장 골목에서 마주친 어느 20대 여자아이가 한껏 멋을 낸 차림에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길을 이리저리 짚어 M2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 여자아이의 내비게이션에 무작정 ‘홍대 클럽’을 목적지로 입력한 손가락은 무슨 충동으로 움직인 걸까? 아마 홍대에 오면 금요일 밤의 열기를 가장 뜨겁게 쐴 수 있으리라는 기대일 것이다. 삼거리 포차와 바이더웨이사거리를 따라 포진한 젊은 사람들, 새벽 3시에도 저녁 8시처럼 북적이는 인파, 수노래방 유리창 안에서 자신을 놓은 서울의 청춘들…. 밤의 관광객들은 이런 걸 기대하고 불빛에 끌리는 날벌레처럼 홍대로 모여든다.

낮 시간의 홍대는 한결 말쑥한 얼굴로 내숭을 떤다. 주간에 홍대에오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장소는 카페와 맛집들이다. 서울의 먹을 만한 장소를 소개해놓은 온라인 서비스인 윙버스 사이트에는 홍대 지역의 맛집이 강남역(119), 압구정(204)을 누르고 2백44곳이나 실려 있다. 강남은 대체로 가게 면적이 넓고 강북은 좁다는 특성이 반영된 숫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업소 면적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홍대의 골목 사이를 거닐어보면 카페들이 과포화 상태에 이른것을 목격하게 된다. 한 골목을 따라 한 집 다음 또 한 집, 빈틈없이들어찬 카페들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밀도를 자랑하며 온갖 스타일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 밀도 높은 가게들 가운데는 썩 괜찮은 덮밥을 6천원에, 제대로 된 이탤리언 코스 요리를 3만8천원에 먹을 수 있는 공간이 포함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로수길이나 청담동에서 놀다가 홍대로 옮겼을 때 체감 물가는 70%선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주머니는 가볍지만 감도 있게 놀고 싶은 사람들에게 홍대는 유혹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홍대를 저렴한 버전의 가로수길이나 젊은 청담동으로만 만들지 않는 건 홍대만의 자생적인 문화다. 파인 아트와 디자인이 발달한 홍익대학교의 특성,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한 뮤지션들과음악 애호가들의 발걸음은 일찍부터 홍대의 자유분방하고 예술 친화적인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지난해 말 서교동에서 상수동으로 이전한 이리카페는 가장 홍대다운 카페라 할 만하다. 여기를 정의하는 데는 빈티지한 인테리어나 서가에 빼곡한 예술 서적만 언급하는것만으로는 모자라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낭독회나 작가와의 대화가 열리며, 기타나 하모니카, 우쿨렐레 등의 악기를 꺼내놓고 자유롭게 연주하는 뮤지션을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건 이곳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만 가능할 테니까.‘당인리 커피공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페 앤트러사이트 역시 전시와 공연에 두루 활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홍대 인디’로 분류되지 않은 오버그라운드의 메이저 뮤지션들 역시 홍대의 작은 공간에서 리스너들과 직접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앤트러사이트에서는 김동률과 이상순의 ‘베란다 프로젝트’의 작은 공연이 열렸고, 정재형은 카페이면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기도 한 ‘제너럴 닥터’에서 게릴라 콘서트를벌이기도 했다. 홍대에는 공연장이나 클럽의 형식을 벗어나 친밀하게 소통하는 쇼케이스에 유연하게 문을 열어주는 공간, 그리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공존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축제와 행사가 홍대에서 유독 많다는 것 또한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될 것이다. 일례로 100여 개 출판사와 80여 명의 저자 및 예술가가 참여하는 책문화 축제인‘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은 6회째 홍대 주차장거리에서 열리고 있다. 아마추어에서 전문 예술 단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독립문화 축제인 ‘프린지 페스티벌’또한 홍대 곳곳의 예술공간과 거리를 무대로 벌어진다. 이런 문화행사는 홍대라서 기운을 받고, 또 홍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물론 다른 어디와 마찬가지로 홍대를 움직이는 것 역시 상업 자본이다. 하지만 2010년의 서울에서 창의적인 마인드를 가진 젊은 누군가가, 작은 규모로 자기 공간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게 가능한 곳이 있다면 그나마 홍대라고 모두들 입을 모은다. 그런 선택을 지지해줄 만한 소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울림 소극장 인근에서독립출판물과 개성 있는 간행물을 파는 책방‘유어 마인드’를 운영하는 이로는 이렇게 말한다.“ 홍대에서 뭔가를 한다는 게 좀 재미없는 선택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모든 일이 홍대에서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나니까요. 전혀 새로운 동네에서 서점의 정체성을 알려가는 일이 더 의미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홍대에 자리를잡게 됐네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서점에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오는 건 홍대라서겠죠. 자본의 투입으로만 모든 게 결정되지 않는, 자기 콘셉트를 가지고 커뮤니티적으로 어떤 사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가 있는 동네라고 생각해요.” 비슷한 대안 서점‘ 더 북 소사이어티’의 임경용 대표의 이야기도 흡사하게 들린다. “이런 게(소규모 출판으로 펴낸 아티스트 서적) 팔릴 만한 동네는 서울에서 홍대 아니면 경복궁 정도죠.”

유어마인드의 이로는‘홍대피플’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을, 청담동의 패션피플과 대응되는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유어마인드에서 얼마 전 열린 낭독회에는 뮤지션 이아립과 시와, 제너럴 닥터의 의사 정혜진, 친환경 디자인그룹 리블랭크의 매니저 이지연 등이 참여해서 각자 고른 책을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다. 이 동네를 무대로 저마다 의미 있는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이,또 그 중 한 공간에 모여 살롱처럼 교류하는 풍경을 홍대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공간을 만드는 건 사람이다. 홍대는 젊다. 지난20년간 줄곧 젊었다. 오늘도 생각이 젊은 사람들이 뭔가 즐거운 일을 찾아서 여기 모인다.

썬샤인 뮤지션 싸지타 부부가 운영하는 서핑 바. 벽면에는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영상이 흐르고, 80년대 주택구조를 그대로 살린 내부 공간에는 느긋한 여름 음악이 넘실댄다. 몇 잔의 칵테일에 문득 계단을 내려가면 해변이 펼쳐져 있을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곳. 상수역에서 합정 방향 큰길가, 새로 이전한 레게 치킨 2층에 있다. 02-338-3438 이리카페 가장 홍대다운 아우라를 풍기는 카페. 서가에는 예술 서적이 가득 꽂혀 있고, 예고 없이 즉흥 연주를 벌이는 뮤지션들의 회합을 바로 곁에서 목격할 수 있다. 커피 프린스 골목에서 이전해오면서 한 해 전까지만 해도 허름한 뒷골목이던 상수, 당인동 일대를 가장 떠오르는 카페 골목으로 바꾸어놓았다. http://www.yricafe.com/

앤트러 사이트당인리 발전소 앞의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카페. 1층에는 커피를 볶는 로스팅기계를 두었고, 2층에는 널찍한 공간에 천장을 드러내고 내벽을 남겨 멋지다. 각종 전시와 공연, 프레젠테이션 등 흥미로운 이벤트가 종종 벌어지는데 베란다 프로젝트와 톰스 슈즈 등이 여기를 거쳤으며, 심지어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의 입시설명회도 열렸다. 02-322-0009유어마인드1년 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서 3개월 전 오프라인 책방을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냈다. 국내와 해외의 사진, 일러스트, 텍스트를 실은 간행물, 독립출판물, 수집책, 동화, 잡지 등 분야별 도서를 두루 취급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소규모 기획출판을 하거나 잡지 공방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낭독회를 여는 등 재밌는 일 꾸미기를 즐기는 집단이기도 하다. http://www.your- mind.com/

더 북 소사이어티 미디어버스가 운영하는 프로젝트스페이스이자 서점. 아티스트북, 디자인, 소규모 출판물을 기획하고 판매하며 작가들의 토크, 낭독회, 전시 등 출판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아티스트들의 티셔츠와 에코백, 콘셉 추얼한 성향의 간행물을 훑어보는 일은 거의 책을 주제로 한 전시를 구경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http://www.the booksociety.org/

제너럴 닥터 카페이면서 동네의원인 독특한 공간.‘왜 병원에 가면 늘 불편하고 주눅이 들까’를 환자의 입장에서 고민하며 인간적인 진료를 펼치기 위해 카페라는 형식을 가져왔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그리고 보통의 병원이 영업하지 않는 시간에도 상담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최근 한 층을 더 넓힐 정도로 이들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http://www.generaldoctor.co.kr/

유즈드 프로젝트 일본의 D & Department를 떠올리게 하는 다용도의 장소. 좋은 디자인을 가진 제품에 제대로 쓸모를 찾아주고 싶다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 연회비 1만원을 내면 자신이 가격을 매긴 중고물품 및 새제품을 위탁판매할 수 있으며 공용 작업실로도 대여가 가능하다. 홍대 정문 맞은편네스카페와 스타벅스 사이, 폴 앤 폴리나 오른편 골목. http://www.used project.net/

1, 3, 5. 계동 주택가의 호젓한 골목들.
2, 9. 한옥체험공간인 사간동 9번지.
주소를 간판 대신 걸었다. 4. 분식점처럼 소박한
파스타 레스토랑 이태리 면사무소. 6, 14. 최근 사직동으로
자리를 옮긴 카페 커피한잔이 아직 계동에 머물 무렵.
7, 12. 플랫폼 토이 윕의 갤러리 겸 숍인 델리 토이즈.
8. 계동교회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10. 계동길 입구의 고풍스러운 건물 최소아과의원.
11, 13.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쇼룸 겸 갤러리 체어스 온 더 힐.

북촌

물론 ‘ 동네’란 사는 곳 근처를 뜻하는 심상한 단어다. 그런데 종종 이 말을 들을 때면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가물가물한 풍경을 그리게 되곤 한다.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키 작은 주택들, 손바닥만 한 점방, 글자 받침이 하나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낡은 간판, 진공 상태처럼 고요한 오후의 골목 같은 것들. 그러니까 요즘 대부분의 서울 주택가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 말이다. 찻길 옆 고층 건물의 한 칸씩을 차지하고 사는 우리들의 주변은 대체로 바쁘고 소란하다. 당연히 동네지만, 어쩐지 동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재동 초등학교에서 몇 걸음만 더 떼면 닿게 되는 계동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도 동네라는 단어가 맞춘 듯 어울리는 곳이다. 단정한 한옥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을 것 같은 가게들이 자연스레 뒤섞여 있는 광경은 어딘가 정답게 느껴진다. 미용실, 목욕탕, 그리고 서점까지 죄다 20년 전의 사진에서오려낸 것처럼 그리 세련되질 못한데 그 투박함이 되려 반갑다. 특히 길 허리쯤에서 열어둔 유리문 틈으로 기계 소리를 툴툴 흘리는 계동 방앗간은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라는사실을 잠깐이나마 잊게 만든다.“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난다는 게 정말인가 봐요. 가끔씩 그 주변에 떼로 모여들곤 하던데요?” 최근 계동길의 일원으로 합류한 회화 작가 심아빈은 이 거리의 구식 매력을 흡족하게 즐기고 있었다. 삼청동 언저리를 돌며 적당한 작업실 자리를 찾다가 그 호젓함이 마음에 들어 내려앉게 된 지역이다. 과연 계동주변은 경유지보다 목적지로 삼고 싶은 풍경이다. 계동, 그리고 이곳과 맞닿아 있는 가회동에선 몇 년 새 다른 지역으로부터 옮겨온 미술작가, 공예가, 가구 디자이너 등의 스튜디오나 숍, 갤러리 등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그 지형도는 평화롭게 불균질한 인상을 띠기도 한다. 고요한 동네에서의 일상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주민들과 그 남다른 공기에 이끌린 예술가들, DSLR을 멘 소수의 아마추어 사진가들, 그리고 <겨울연가>의 촬영지였던 중앙고등학교를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아직까진 서로 괜찮아요,하는 태도로 뒤섞인다.

그런데 과연 이 언저리는 언제까지 지금의 여유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북촌을 주목하는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많아지는 눈치다. 아트토이 윕(Ouip)의 숍과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델리토이즈’에 머무는 동안, 길 건너편에선 한 케이블 TV의 패션 정보 프로그램 촬영이 한창이었다. 가로수길이나 삼청동이 그랬듯 조만간 이 골목도 재미없게 세련 된 카페와 식당들에 점령당하고 마는 걸까?“ 상업 공간이 늘고 있는 건 확실해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급한 변화는 없지 않을까 예상하고, 또 기대합니다. 한옥보호지구라는 게 일종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상황이죠.”‘델리토이즈’의 이재혁 디렉터가 덧붙이는 의견이다. 물론 느리든 빠르든, 그리고 거창하든 소박하든 모종의 변화는 찰박찰박 차오르는 빗물처럼 인근 한옥의 댓돌들을 적실 것이다. 최근에야 이 드문 풍경을 발견하고 마음을 주게 된 객의 입장에서는 모쪼록 그 변화가 신중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수년째 계동길의 사랑방 노릇을 해온 카페‘ 커피 한잔’이 9월 초에 사직동으로 이사했다는 건 꽤 서운한 소식이었다. 일부러 생채기를 낸 가짜빈티지가 아닌, 진짜로 고물상이나 벼룩시장에서 막 주워온 듯한 물건들을 천연덕스럽게 쌓아둔 채 정신이 바짝 들 만큼 진한 더치 커피를 팔던 이 가게야말로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퍼즐 조각 같았으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멀끔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대신 들어서기라도 한다면 아마 꽤 서글플 거다. 함께 나란히선 파스타 식당인 ‘ 이태리 면사무소’의 것처럼, 그리 새침하지 않은 간판이 새로 붙길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 계동과 가회동에서 벗어나 정독도서관 앞까지 걸어온 뒤 조금만 더 헤매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사간동 골목과 만나게 된다. 불과 한두 블록 밖의 소란한 거리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듯 한갓지기만 한 길이다. 번지수를 고스란히 상호로 삼은‘ 사간동 9번지’는 일종의 한옥 숙박(혹은 체험) 시설이다. 이곳을 집이자 일터로 삼고 있는 나정원은 마당과 함께 지내는 일상에 혹해 해외로 떠나려던 계획도 보류하고 일단 자리를 폈다. 익숙하거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몇 시간의 유쾌한 취기, 혹은 하룻밤의 색다른 숙면을 제공하는 지금의 생활이 그럭저럭 즐거운 듯 보였다. 너그러운 가격이나 서비스는 사업가의 수완보다 사람 좋아하는 오너의 인심으로 해석해야 할 거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간동에선 숙박시설이든 문화시설이든 상업공간이든 다들‘집’과 닮아 있다. 갤러리 현대는 양옥집 하나를 프로젝트 전시 공간으로 꾸민 뒤 이름은‘16번지’라고 담백하게 붙였다.‘ 사간동 9번지’와 마찬가지로 간판 대신 주소를 내건 점이 눈에 띈다. 개성이 뚜렷한 젊은 작가들이야말로‘16번지’가 특별하게 반기는 손님이다. 9번지나 16번지나 겉으로 보기엔 별스러울것도 없이 아담한 한옥, 또는 양옥이지만 그 시침 뚝 뗀 대문 안쪽에선 즐거운 궁리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사간동은 좀 이런 느낌이다. 아는 사이에만 유쾌한 꿍꿍이를 내어 보이는, 흥미진진하게 과묵한 친구.

계동, 가회동, 그리고 사간동 등으로 구비구비 이어지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가 막연하게 품고 있는 동네에 대한 동경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이 지역은 홍대 앞처럼 젊지도 않고, 이태원만큼 세련되지도 못하다. 그저 사람들이 1백여 미터 밖보다 조금은 느릿한 리듬으로 살아가고 가끔씩 재미있는 일들을 벌인다. 초속 1백 미터 정도로 달려가는 도시에도 이런 풍경은 필요하다. 밤이 늦도록 분주했다면 그만 한적하고 편안한 동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질 테니까.

살롱 드 플로르 계동길 위에 자리한 작은 화원 겸 갤러리. 몇 사람만 들어서도 그득해질 만큼 아담한 공간이지만 플로리스트 박사임은 한쪽 벽을 알뜰하게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술작가와 플로리스트의 공동작업이 소담하게 자리한 광경은 방문객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주곤 한다. 꽃을 사려는 사람에게도, 굳이 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열려 있는 특별한 꽃집. 작가 심아빈이 참여한 <꽃다운 내 인생>에 이어 현재는10월 16일까지<우리 동네 꽃집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blog.naver.com/saimiok

이태리 면사무소 역시 계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이름의 파스타 식당. 여고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어색해하지 않고 들를 수 있을 법한 분식집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이 동네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가장 비싼 메뉴라도 1만원을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이나 과하게 자극적이지 않은 집밥 같은 맛, 후식으로 내주는 수국냉차까지 소박한 서비스 덕분에 더 특별해 보이는 곳이다. 02-3676-0233

이도 도자기 숍과 갤러리, 아카데미가 한 건물 안에 모인 가회동의 복합 문화 공간. 도예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여기서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정기적으로 열리는 할인행사인 만원 그릇전 기간에는 알뜰한 쇼핑객들 덕분에 거의 장터처럼 북적대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흔하게 사용하는 그릇이나 소품에도 예술이 깃들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장소다. www.yido.kr

델리토이즈 가회동 큰길가에 위치한 아트토이 윕(Ouip)의 숍 겸 갤러리. 팔다리가 달린 전구처럼 보이는 윕은 말하자면 인형 형태의 캔버스다. 직접 그림을 그려 원하는 대로 꾸미는 용도인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면 ‘델리토이즈’ 한쪽에 전시된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에서 힌트를 얻어도 좋다. www.delitoys.com

체어스 온 더 힐 가회동 골목 안쪽에 깊숙이 자리한,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쇼룸 겸 갤러리. 짜인 틀 안에 사용자가 직접 샴페인 코르크마개를 채워 넣어야 완성되는 의자 ‘CorknCork’ , 몸통에 달린 여러 개의 팔을 접거나 펼쳐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옷걸이 ‘ Swing&Hang’ 처럼 유머러스한 아이디어와 실용성이 모두 돋보이는 작품을 넉넉히 둘러볼 수 있다. www.chairsonthehill.com

사간동 9번지 주소가 곧 상호가 되어버린 한옥 체험 공간. 작은 정원이 딸린 한옥에서 넉넉하게 먹고 마신 뒤 하룻밤의 휴식까지 청할 수 있다. 솔깃한 입소문 덕분에 이미 단골이 적잖이 생긴 터라 궁금하다면 일찌감치 예약을 넣어야 한다. 아예 집 전체를 빌려 오붓한 파티를 열고자 하는 문의도 많다는 귀띔.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는 건 없는 화개장터풍 메뉴판에선 어떤 걸 골라도 다 맛있다. 02-735-4090

1, 5. 포스트 포에틱스
2, 4. 스페이스 꿀
3. 공간 해밀톤
6, 8, 9, 12. 옥사나가든
7. 디앤북스
10, 13. 왓 더 북
11. 스탠딩커피

이태원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같은 장소도,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하지만 이태원에 대한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피부, 다른 체구의 외국인에게서 느낀 괜한 두려움과 호기심, 골목 구석구석 눈보다 코로 먼저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테라스에 나가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실 참이면 외국인 한국인 할 것 없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하던 그 생경한 풍경들 말이다. 그때의 이태원은 분명 하나였다.하지만 지금, 이태원은 네 개가 됐다. 한남대교를 넘어 강북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미술관 리움, 제일기획 사거리, 해밀톤 호텔을 차례로 지난 다음 녹사평역에서 약간 방향을틀어 얕은 언덕이 펼쳐지는 경리단길까지. 각각 자기 이름이 없는 건 아니어도“ 이태원!” 하고 부르면 뒤돌아볼 수많은 거리들은, 서로 간의 거리에 비해 꽤나 다른 얼굴을 가졌다. 그래서 이태원 어디쯤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먼저 해밀톤 호텔을 중앙에 둔 메인 로드. 언제나 그랬듯 다양한 피부색 그리고 그보다 더 수많은 레스토랑과 술집으로 분주한 이 길은, 어느새 낯선 타국의 맛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던 식당들은 잠잠해진 대신 일식, 수제버거, 이탤리언 레스토랑의 3파전이 펼쳐지고 있다. 더 이상 외국인 사이에 몇몇 한국인이 이방인처럼 껴 있던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울 어느 동네보다 자주 마주치는 외국인만 없다면, 일본 요리가 평정한 홍대와 퓨전이란 이름 아래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서양 요리가 난무하는 압구정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강북과 강남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한남대교 북단에서 시작해 UN빌리지로 연결되는 대사관길 역시, 쉽게 이태원으로 분류되는 거리다. 한때 서래마을은 파리크라상 빵도 맛있다며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한남동 파리크라상 역시 프랑스인 제빵사가 직접 굽는다는 소문이 돈다. 정말 이곳의 빵 맛이 특별히 좋든 아니든,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빌라촌에 관한 편견 혹은 동경은 여전하다. 실제로 다른 구석이 많기는 하다. 서울 안에 이런 동네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고요하기야 원래부터 그렇지만, 그런 분위기를 찾아 들어온 식당들은 브런치를 판다면서 일요일엔 문을 닫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완공을 앞두고 있는 UN빌리지 맞은편 ‘한남 더 힐’은 자꾸 값이 오른다.

꿀 간판은 없고, 문은 여러 개. 그 중 가장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간단한 마실거리가 있는 카페가 있고, 거기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7명의 작가들이 6개월 동안 전세를 내고 마치 노동하듯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반지하 방들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옥상이 나타나는 데, 이곳 역시 신나는 놀이인지 고통스러운 예술인지 애매모호한 작품들이 두서 없이 늘어져 있다. 이곳은 작가 최정화가 만든 벌집 같은 공간 꿀. 온갖 예술이 존재하는 데도, 과거 중국집이기도 하고 슈퍼마켓이기도 했다는 일상의 냄새가 더 크게 배어 나오는 골목길 작은 집이다. 리움 맞은편 BMW매장 뒷길. 070-4127-6468

옥사나 가든 가드닝숍 옥사나가든에 가면, 풀과 나무를 키우고 정원을 가꾸는 일이 사치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사는 일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선 물이 잘 빠지라고 화분에 넣는 스티로폼 대신 난석을 사용하고, 포장지가 아니라 종이 신문에 포장을 해준다. 과일 껍질과 같은 음식물 쓰레기를 먹은 지렁이의 분뇨로 비료를 만드는 지렁이 상자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첫눈엔 영국에서 직수입했다는 예쁘고 튼튼한 가드닝 제품에 본능적으로 끌리지만, 아픈 식물을 데려가면 고쳐주고 지나가다 들러 물어 보면 다 대답해줄 만큼 나무와 풀을 잘 알고 사랑하는 직원들이 있어 더 정이 간다. www.oxanagarden.com

스탠딩 커피 한때 연극을 했다는 또는 전문 바리스타이기도 하다는 다섯 명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 웃고 있지만, 정작 커피를 만드는 건 한 명 혹은 두 명이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게다가 길가에 테이블과 의자 몇 개를 놔둔 게 전부라, 이름이 명령하는 대로 서서 마셔야 한다. 그래도 크게 틀어놓은 음악을 길가에 서서 들으며, 다른 커피집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컵을 손에 쥐는 즐거움이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커피의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그저 자신들이 마셔보고 가장 맛있는 걸로 했다 하고, 왜 이렇게 큰 컵에 주냐고 물으면 그냥 많이 드리고 싶어서라는, 이 길과 참 잘 어울리는 소박한 모습이 커피맛을 배가시킨다.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중앙 경리단 방향.

공간 해밀톤 이태원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해밀톤 호텔. 그 해밀톤 호텔이 서 있는 북적북적한 길 뒤편엔, 또 하나의 공간 해밀톤이 있다. 역시나 같은 이름의 중고 가구점을 개조한 이 공간에선 전시회, 워크숍, 강연, 퍼포먼스, 마켓 등 아무튼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벌어진다. 대안공안 혹은 복합 문화공간이라 부르면 속 편할 텐데 거부하고 싶다니, 직접 가서 경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게 흠이다. 대신 에어컨 냉각기와, 늘어진 전선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빨갛고 파란 간판과 같은 외면만으로도 속을 짐작할 수 있는 순박함이 매력적이다. www.spacehamilton.com

포스트 포에틱스 작은 공간에 많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 책을 옆으로 세워놓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커다란 나무 책상과 책장에 정직하게 표지가 앞에 오도록 책을 진열해놓은 포스트 포에틱스에서 더 자꾸 책을 들춰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문화, 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과 정기간행물을 수입해 배급하는 포스트 포에틱스. 낯설게 느껴질 만한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대형 서점이 골라서 눈에 잘 띄게 진열해 놓은 혹은 인터넷 서점이 적극적으로 미는 책이 아니라, 오직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곳까지 당도한 저력 있는 잡지들을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www.postpoetics.org

왓 더 북 “Hello, What thebook” 전화를 걸면 영어로 받는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영문 서적이 있는 영어서적 전문 서점. 요즘엔 알고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더 많다. 새 책뿐만 아니라 중고 책도 구할 수 있는데, 내가 가진 책을 팔 경우엔 파는 가격의 30~50%을 크레딧 형태로 얻고, 그걸로 다시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많은 권수와 폭넓은 셀렉션도 매력적이지만, 대형 서점에선 느낄 수 없는 갈색빛 아늑한 공간에서 오래된 책만이 가진 촉감과 냄새를 경험 할 수 있어 자꾸 찾게 된다. www.whatthebook.com

디앤북스 경리단길에서 출발해 하얏트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디앤북스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서점이 있기엔 안 어울리는 장소인데다, 주로 다루는 분야 또한 디자인, 그래픽, 건축, 아트, 포토, 패션과 관련된 것들인지라 혹시 마니아적인 컬렉터가 차린 책방이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저희는 책을 수입하는 무역회사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말 이 책방 맞은편엔 60년 가까이 일본 정기간행물을 비롯한 각국의 전문 서적을 수입, 판매하고 있는 동남도서무역이 자리하고 있고, 이곳은 그곳에서 수입한 책들을 파는 일종의 전시장인 셈. 이런 책들을 꾸준히 수입하고 있는 것도 고맙지만, 수입 업체가 직접 운영하는 책방이라 가격도 한결 저렴하다.
www.dnbooks.com

섞임과 혼란의 미학

녹사평에서 하얏트 호텔로 이어지는 중앙 경리단길 혹은 해방촌은 처음과 끝이 모순적인 동네다. 이 길의 시작은 마치 80년대 어느 동네에 와 있는 듯 아날로그적이다. 좌판을 밖에 내놓은 신발가게, 옛날 간판을 달고 있는 목욕탕처럼 최근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즐비하다. 그러다 중간 즈음 오르면, 캐주얼한 레스토랑과 펍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들이 나타난다. 과거의 이태원마냥 한국인은 이방인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계속 올라 하얏트 호텔에 가까워지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휘황찬란하진 않지만 계산서는 꽤나 무거운 한정식집, 일식집,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그곳에 들어가 창을 마주하고 앉으면, 언덕 아래로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의 풍경이 펼쳐진다. 지붕아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붕들이 주는 정취가 오히려 이곳을 평온하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무엇보다 요즘 가장 흥미로운 동네는 단연 한강진역 근처다. 2004년 리움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너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라 소수만을 위한 미술관 아니냐는 시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 맞은편에 그저 빵집일 뿐인데 뭐가 이렇게 크고 화려한가 싶기도 한 패션5가 성공을 거둔 이후, 얼마 전엔 꼼데가르송의 플래그십 스토어 또한 문을 열었다.걸어서 5분 거리 이태원 메인로드와 왠지 다른 (혹은 다르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이 동네를 뜨겁게 하는 지금의 화두는‘문화’. 아주 작은 레스토랑이나 술집까지도, 이곳은 그저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한눈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물론 앞에 나서는 것은‘ 문화’여도 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자본’이있고, 그 둘이 교통 좋은 동네에서 만나는 형국이니, 여기 와서 즐기는 게 자본인지 문화인지 종종 헷갈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밖으로 밖으로 확장되는 경계만큼이나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네 개의 거리가 모여 있는 이태원은, 흔한 말로 지금 가장 ‘핫’한 동네다. 하지만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떠오르는 단어만으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태원 본연의 모습과 다른 지역으로부터 떠밀려온 트렌드가, 내국인과 외국인이, 몇 남지 않은달동네와 전통적인 부촌이, 그리고 문화와 자본이 쉴 새 없이 맞물려 돌아간다. 그렇다고 이태원이 변질됐다거나 위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태원은 원래부터 서로 다른 것들이 때로는 뒤섞이고 가끔은 밀쳐내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를 잃어버릴 동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