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하루를 찬미하는 로사 로이의 개인전 <고요한 작품들>

전여울

독일 출신의 화가 로사 로이(Rosa Loy)는 매일 아침을 같은 풍경으로 연다.

자전거 바구니에 강아지를 태우고 10km를 달려 도착한 작업실, 그곳에서 찻잔을 손에 쥐고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간을 기다린다. 세상의 소음과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 이 규칙적이고 간결한 일상은, 작가에게 고요하지만 강렬한 창조의 힘이 되어줬다. 4월 23일부터 5월 30일까지 갤러리바톤에서 열리는 개인전 <고요한 작품들>은 작업이라는 정직한 노동과 반복하는 일상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본래 밭의 사람이었다. 원예가 집안에서 자란 덕에 흙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일이 자연스러웠던 사람.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주축으로 꼽히는 예술가, 로사 로이(Rosa Loy)의 이야기다. 수년간 원예사로 일하며 체득한 감각은 그녀의 캔버스 위에 싱그러운 꽃과 식물을 만개하게 했다. 옛 동독 시절, 나이 지긋한 할머니부터 집안의 모든 여성이 부지런히 노동하며 능동적으로 삶을 일구던 풍경은 그녀가 ‘여성 주체’라는 전면적인 화두를 탐구하게 만든 근본적인 동력이기도 했다. 화폭 너머로는 탐스러운 머리칼을 가진 여성들과 생동하는 자연이 뒤섞인 기묘한 풍경이 펼쳐지지만, 이 서사들은 결국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대한 ‘모호함’으로 유려하게 미끄러진다. 여기에 프레스코화에 주로 쓰인 고전적 매체 ‘카제인’은 특유의 몽환적인 질감을 더하며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한 아스라한 잔상을 남긴다.

세상의 속도가 무색하리만큼 로사 로이의 세계는 여전히 견고하다. 화폭 너머 여전한 여성들과, 여전한 자연의 풍경. 다만 최근의 그녀는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일상의 규칙적인 루틴이 주는 힘에 한층 집중하는 모습이다. 작업실과 집을 오가는 간결한 궤적은 그녀에게 뜻밖의 고요와 평화를 선사했고, 그 내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상을 찬미하는 개인전 <고요한 작품들>을 갤러리바톤에서 올린다. 한때 강인한 투사나 다소 관능적인 표정으로 화폭을 채운 여성들은 이번 전시에서 한층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자연과 기꺼이 연결된다. “힘은 고요 속에 깃든다.” 고요한 수면 아래 쉼 없이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 로사 로이가 ‘고요한 힘’의 실체에 대해 말했다.

‘모두를 위한 햇살’을 뜻하는 작품 ‘Sonne für Jeden’. 커다란 태양, 해바라기로부터 강렬한 에너지가 전해진다. 계절에 많은 영향을 받고, 빛이 풍부한 봄여름을 사랑하는 작가의 내밀한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W Korea> 오늘 입고 계신 셔츠가 무척 근사합니다.
로사 로이
엊그제 갤러리바톤 근처의 테일러 숍 ‘레리치’에서 고른 셔츠예요. 테일러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의 고대 벽화에서 영감을 받은 패턴이라고 해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목, 사냥하는 소년, 호랑이 같은 모티프들이 보이죠? 한국에 와서 북한에 뿌리를 둔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로워요.

서울은 얼마 만이시죠?
마지막 전시가 2022년이었으니 오랜만이네요. 어제는 마침 스페이스K에 갔다가 서울식물원에 들렀는데, 나무들이 그새 몰라보게 자랐더군요. 도시 일대가 한층 짙은 초록으로 물든 기분이었어요. 오래된 건축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현대적인 아파트들이 들어선 풍경도 흥미롭고요.

지금 거주하시는 독일의 슈피너라이는 어떤가요? 그곳을 가로지르는 강줄기를 보며 서울의 청계천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카를 하이네 운하를 보셨군요? 작고 소박한 강줄기인데, 도시의 심장이자 근사한 풍경 그 자체예요. 지금 묵고 있는 호텔에서도 온종일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정말 환상적이에요. 사실 슈피너라이는 서울과는 무척 다른 도시예요. 우선 100여 년 전 유럽 최대의 방직 공장이 자리했던 곳이에요. 독일에서도 보기 드문 거대한 산업 유산이 있는 곳이죠. 과거 수천 명의 여성이 실을 잣던 역사를 지나, 이제는 100명이 넘는 아티스트들의 터전이 된 도시이기도 하고요. 근처에 미술용품점부터 갤러리까지 밀집해 예술가들의 안락한 요람 같은 곳이죠.

슈피너라이가 방직 공장으로 번성한 시절에는 3,000명의 여성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고 들었어요. 이 특별한 터에 작업실을 꾸린 결정이 당신의 작품 세계에도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럼요. 전 1994년부터 이곳에 머물렀어요. 거의 초창기 멤버죠. 처음 들어갔을 땐 공장 곳곳에 특유의 공기랄까, 방직공장만의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어요. 이곳에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여성적인 정취’가 흘러요. 투박한 느낌과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기운이죠.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건 여성들의 전형적인 노동이었으니까요. 작은 박물관에 남겨진 기록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어쩌면 이 공간이 나로 하여금 여성을 그리게 했구나.’ 공장 바로 앞, 강가 옆엔 여성들이 아이를 맡긴 유치원 건물도 있었는데, 그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그 모든 환경이 마치 오직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 같았죠.

30년 넘게 한곳에 머물며 작업한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요즘 대다수 예술가는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살잖아요.
글쎄요, 전 장소를 옮길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슈피너라이가 좋거든요. 문을 닫고 들어가면 완벽하게 고요해져요. 또 슈피너라이는 시내 중심가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어요. 그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고요 덕분에 오로지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죠. 아티스트는 결국 작업실에서 홀로 일하는 존재예요.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강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을 오가는 길은 온전히 저만의 고독한 시간이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나 혼자 방 안에 머무는 그 상태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매일 강아지와 함께 출근하나요?
그럼요, 매일요. 이름은 ‘몰리’예요. 퍼그인데, 녀석을 자전거 바구니에 태우고 작업실로 향하죠. 가는 길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어요. 거기서 잠시 멈추면 몰리는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다른 친구들을 만나 인사하느라 바빠요. 그렇게 한바탕 산책을 즐기고 나면, 다시 몰리를 바구니에 태워 작업실로 향해요. 그게 우리의 변함없는 아침 루틴이에요.

슈피너라이에서 보내는 보통의 하루는 어떤 모습인가요?
보통 아침 7시쯤 일어나 식사를 해요. 자전거를 꺼내 바구니에 강아지를 태우고, 간단히 먹을 도시락을 챙겨 출발하죠. 작업실까지는 10km 정도인데 자전거로 1시간쯤 걸려요. 저에겐 일종의 모닝 스포츠 같은 시간이에요. 가는 길엔 집도, 사람도, 교통체증도 없어요. 오직 자연뿐이라 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죠. 점심은 남편과 함께 먹어요. 작업실에 작은 주방이 있거든요. 저희는 좀 게으른 편이라 점심 먹으러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오후엔 사무를 도와주는 어시스턴트와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서류 작업을 처리하고, 다시 작업에 몰두해요. 그러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저녁 6~7시쯤 집으로 돌아가죠. 그게 제 일상의 전부예요.

그림을 그리기 전, 꼭 차 한 잔을 마신다 들었어요. 그게 ‘스위치’ 역할을 하지 않나 짐작해요. 한 인간에서 예술가로 전환하는, 일종의 내면의 신호 같달까요?
정확해요. 작업실에 들어서면 우선 며칠에 한 번씩 출근하는 어시스턴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셔요. 그러면서 어제 그려둔 그림들을 가만히 바라보죠. 그러곤 생각해요. ‘오늘 그림들은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어떤 날은 그림이 저를 깜짝 놀라게 해요. ‘아니, 여기를 완전히 바꿔야지’라고 외치는 것 같거든요. 또 어떤 날은 ‘음, 아주 좋아’라고 속삭이기도 하고요. 결국 작업한다는 건 저와 그림 사이의 깊은 대화에 들어가는 일이에요.

“캔버스 앞에 선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듯한 전율을 기다린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죠.
맞아요. 누군가는 그걸 ‘영감’이라 부르죠. 에디터님도 글을 쓸 때 무언가를 기다리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 영감을 만나려면 우선 머릿속을 제대로 비워내야 해요. 사실 그게 정말 어려워요. 단 1~2분이라도 비운 상태를 유지한다는 건 꽤 긴 시간처럼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그 공백을 견뎌낼 때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와요. 꿈을 꾸는 것 같지만, 그보다 훨씬 생생하게 깨어 있는 상태랄까요.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절대로, 정말 절대로 스마트폰을 가까이 두면 안 돼요. 스마트폰은 우리를 아주 얄팍한 방식으로 깨어 있게 만들거든요. 무의식의 적이죠.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아주 고요하고, 아주 비어 있어야 해요. 제가 매일 동일한 아침 루틴을 고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차 한 잔을 마시는 그 반복하는 행위가 제 몸과 정신에 신호를 보내는 거죠. ‘자, 이제 고요해질 시간이야’라고요.

영감이 나를 ‘통과’하기를 기다리는 셈이군요.
그렇죠. 작업실에 들어선다는 건, 세상 모든 소란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나와 그림을 감싸는 단단한 ‘거품(Bubble)’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에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죠.

이번 전시 <고요한 작품들> 역시 이러한 일상의 루틴 속에서 발견한 평화에서 시작되었죠. 지금 이때 ‘고요함’을 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 역동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소란스럽죠. 세상엔 매일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죠. 물론 그런 토론들도 매우 중요해요. 하지만 저에게는 작업실로 돌아가 내 몫의 일을 해내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유익한 방식이에요. 전 스스로를 예술가라기보다 그저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라고 생각해요. 손으로 무언가를 짓고 만드는 공예가에 가깝죠. 삶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이게 저에겐 무엇보다 중요해요. 제 목표는 세상에 아주 작은 아름다움이라도 보태는 것이거든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안전함을 되찾길 바라요. 작업실에서 그림과 연결되어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일하는 것, 최선을 다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기여라고 믿어요.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짐짓 떨어져 내면의 고요를 선택한 결과일까요? 이번 전시작들을 관통하는 기류가 이전과는 제법 달라 보여요. 과거 캔버스 위 여성들에게서 사뭇 강인한 인상이 스쳤다면, 지금의 여성들은 무척 온화하고 또 자연과 깊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맞아요. 20년 전 제 그림 속 여성들은 때로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가는 등 꽤 강인한 모습이었죠. 하지만 이제 제 작업에서 그런 유의 긴장감은 사라진 듯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훨씬 평화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믿거든요. 지금의 저는 자연 속에 머물면서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훨씬 중요해요. 제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내고, 그런 성실함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예술적 층위가 도약하는 지점을 마주하게 돼요. 지금 제 예술이 도달한 그 지점은 바로 자연, 그리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더 이상 공격적일 필요가 없죠. 그림 속 여성들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고, 이웃을 돌보는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그게 지금 제가 선택한 방식이에요.

그네를 타거나 공중 곡예를 하는 인물들의 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 ‘Aufenthalt’. 그림 속 여성들은 한층 자연과 연결되어 유희를 즐기는 모습이다.

<고요한 작품들>이라는 제목과 달리, 어떤 작품들에선 꽤나 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져요. ‘Aufenthalt’(머물다) 속 그네를 타거나 공중 곡예를 하는 인물들이 그렇고, 주유소를 배경으로 한 ‘Tankstelle’(주유소)는 그 자체로 ‘이동’을 전제로 하니까요. 커다란 태양과 해바라기가 그려진 ‘Sonne für Jeden’(모두를 위한 햇살)에서도 어떤 팽팽한 생동감이 느껴지고요.
정확히 보셨어요. ‘고요’와 ‘움직임’은 결코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에요. 아주 조용한 상태에서도 우린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죠. 주유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예로 들어볼까요? 주유소는 자동차라는 ‘몸’에 좋은 양분(연료)을 채워주는 장소예요. 열기를 식히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일종의 ‘수공예적 돌봄’이 일어나는 공간이죠. 모두가 그 먹이고 돌보는 행위에 집중할 때 그곳엔 아주 밀도 높은 에너지가 흘러요. 함께 요리하거나 쿠키를 굽는 순간을 상상해보세요. 방 안은 완벽하게 조용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할 일을 정확히 알고 물 흐르듯이 움직이죠. 그때 발생하는 에너지는 그 어떤 소란보다 강력해요. 모두가 같은 파동 위에서 함께 흐르는 상태, 그게 제가 말하는 ‘고요한 작품’의 본질이에요. 겉으론 고요해도 내면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죠.

쿠키 만들기를 예로 드시니 단번에 이해가 되네요. 종종 베이킹을 즐기는데, 설탕을 버터에 녹이는 그 단순한 행위에 집중하다 보면 무척 고요하면서도 신선한 활력이 피어오른다고 느끼거든요.
아니, 베이킹을 즐긴다고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너무 말랐잖아요! 혹시 쿠키를 만들고 정작 본인은 안 먹는 거 아니에요?(웃음) 전 베이킹엔 영 소질이 없으니 오랜 취미이자 옛 직업이었던 원예로 다시 말해볼게요. 전 원예가 가문에서 태어나 흙과 함께 자랐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안락함을 느꼈어요. 누군가는 옷을 만들며 마음을 다스리듯, 저는 어린 시절 자연으로 나갔고, 추운 겨울이면 집안의 망가진 물건을 직접 고쳤죠. 그런 단순한 수작업을 할 때 머릿속의 복잡한 의도들이 사라지고 비로소 ‘고요한 힘’이 차오르는 걸 느꼈어요. 예술가로서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저를 가장 편안하고 강하게 만들죠.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과거 동독 시절의 여성들은 지금보다 사회적으로 평등했고, 집안의 여성들 역시 모두 직업을 가졌다고 들었어요. 그 오랜 기억이 여성을 그리는 근본적인 동력이 되었을 것 같고요.
맞아요. 저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해야 하고, 노동은 삶의 필수라는 가치관 속에서 자랐어요. 할머니를 비롯해 집안의 모든 여성은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죠. 설령 은퇴해 집에 머물더라도 온종일 베이킹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정원에서 잼을 만드는 등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셨어요. 거기서 중요한 진리를 배웠죠. 쿠키를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번엔 어떤 쿠키를 만들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이걸 ‘행동이 창의성을 감염시킨다’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무언가를 행할 때, 그 행위 자체가 다음 아이디어로 나를 감염시키는 법이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창의성도, 지성도 교육되지 않아요. 결국 영감이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취시키는 거예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우린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배우게 되죠.

말씀하신 ‘수행’의 중요성 때문일까요? 작품 속 여성들은 늘 무언가 ‘일’을 하느라 분주해 보여요.
설령 쉬고 있을 때조차 곁에 책을 두거나 독서에 빠져 있죠. 언제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 즉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발적인 가능성을 늘 품고 있는 셈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휴식의 가치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정반대죠. 저 역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에 가듯 엄격하게 작업에 매진하지만, 주말만큼은 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요. 진정한 몰입 뒤에는 반드시 온전한 휴식이 필요하니까요. 제 그림 속 여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 강요된 노동 때문이 아니에요.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시간을 채워가는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프레스코화에 쓰인 옛 매체 ‘카제인’을 고집해오셨죠. 평소 무의식을 강조하시는데, 빠르게 건조되는 카제인의 특성상 논리적인 계산을 하기 전 무의식이 개입할 틈을 열어줄 듯해요.
매체는 무의식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저에게 카제인은 단연 최고예요. 작업실에 들어서면 그림이 가끔 저에게 말을 건다고 했죠. ‘이 부분을 다른 컬러로 덮어버려’, 혹은 ‘여기를 바꿔’라고요. 오일이나 아크릴은 마를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지만, 카제인은 제 직관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요. 전 놀라움을 느낄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고 믿는데, 카제인은 그 찰나의 놀라움을 지체 없이 캔버스 위에 고착시켜줘요. 카제인에 정착하기 전엔 에그 템페라도 시도해봤어요. 하지만 제 취향은 전혀 아니었죠. 달걀노른자를 섞어 쓰다 보니 모든 색감이 미세하게 노란빛을 띠는 게 싫었거든요. 게다가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한가요! 옛 거장들은 노른자가 하얀 달걀을 얻기 위해 닭에게 초록 풀조차 먹이지 않았다지만, 현대에 그런 정성을 들이긴 어렵죠. 반면 우유 단백질에서 추출한 카제인은 냄새도 없고, 색의 순도를 완벽하게 지켜주면서도 제 무의식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와줘요.

주유소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 ‘Tankstelle’.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주유소는 자동차라는 ‘몸’에 ‘양분’(연료)을 채워주는 장소다. 열기는 식히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일종의 ‘수동예적 돌봄’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평소 계절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하셨죠. 어느 계절에 붓을 잡느냐에 따라 색감도 달라진다고요. 유독 당신에게 말을 자주 걸어오는 계절이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겨울과는 그리 친하지 않아요. 제가 사는 곳은 위도가 높아서 겨울엔 빛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아침 8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오후 4시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해요. 빛을 사랑하는 저로선 그 긴 어둠을 견디는 게 참 고역이죠. 그래서 단연 봄과 여름을 가장 사랑해요. 가을도 나쁘진 않지만, 곧 겨울이 올 거라는 예감 때문에 마음이 조금 서둘러지잖아요.

원예사에서 화가로 전업을 결심할 당시 이런 생각을 하셨다죠. ‘혹여 화가로서의 길이 여의치 않게 되거든, 언제든 원예사로 돌아가면 돼.’ 이제는 어느덧 화가로 산 세월이 훨씬 깁니다. 돌이켜보면 원예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작가로서 회의가 든 순간도 있었나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특히 그림만으로 생계를 잇는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에요. 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그래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원예 기술이 제 가방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자유를 줬어요. 여차하면 원예 일을 병행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거든요. 안전망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비로소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돼요. ‘누가 이 그림을 살까?’, ‘대중이 뭘 좋아할까?’ 같은 시장 논리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죠. 돈 때문에 타협하는 건 작가의 커리어에 결코 좋지 않아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해로운 건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주저하게 되죠. 하지만 창의성의 세계에선 아주 용감해져야 합니다. 누군가 비판하더라도 ‘이게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이에요. 긴 경력을 통해 제가 배운 건 단 하나예요.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곁눈질하지 마세요. 당신은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오직 당신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전 가르치는 일에는 소질이 없지만, 이 말만큼은 분명히 전하고 싶네요.

실제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계시죠. 그곳에 시대와 국적을 떠나 단 한 명을 초대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초대장을 부치고 싶은가요?
정원을 가꾸며 자기만의 지혜를 쌓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뉴욕 하이라인을 만든 네덜란드의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처럼 메마른 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문가도 좋고, 이곳 한국의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기르는 평범한 농부들도 좋아요. 한국에서 정원을 가꾸는 어느 여성과 나란히 앉아, 각자의 밭에서 기른 토마토와 샐러드를 나눠 먹으며 식물 돌보는 법을 나누는 상상도 해요. 사실 지금도 매주 하루씩, 은퇴한 조경가인 제 남동생이 정원에 찾아와 일을 도와주곤 하죠. 그와 나누는 정원 이야기는 저에게 무엇보다 소중해요. 국적이나 시대를 초월한 단 한 명을 고르긴 참 어렵네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식물을 키워내며 자기만의 우주를 일군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정원이 되지 않을까요?

포토그래퍼
이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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