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춤추게 할 거야, 백예린

이예지

오랫동안 백예린의 음악은 누군가를 조용히 구원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규 3집 이후의 백예린은 조금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Wanna See You Dance’라는 단 한 줄의 라이너 노트에는 그런 오기와 야심이 담겼다. 어느덧 네 번째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를 앞둔 지금,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대담하고 즐거워 보인다.

척 70 X 하이 화이트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트랙 재킷, 튜브톱 점프슈트는 Meryll Rogge 제품.

우선 근황을 물어야겠어요. 지난해 정규 3집 <Flash and Core>를 낸 뒤로 이번이 첫 번째 매체 인터뷰잖아요.
백예린
작년 말까지 3집 관련 공연을 했죠. 그러고는, 열심히 산 내게 보상해주느라 잠깐 놀았어요. 앨범 작업한다고 몇 달 미뤄둔 친구들과의 약속을 소화하고 클럽도 가고요. 요즘엔 밴드 합주를 하고, 서울재즈페스티벌 무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너무 오랜만에 팬들뿐 아니라 좀 더 넓은 대중과 만나는 자리여서 조심스럽고 걱정되는 것도 많거든요.

뭔가 큰일을 앞뒀을 때, ‘난 이렇게 준비한다’ 하는 게 있을까요?
어쨌든 저는 고민을 해결해야 잠들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해결 자체가 해결의 방법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연습을 그만큼 더 많이 한다든가, 안 되는 것도 될 때까지 머리를 부딪쳐가며 무조건 해보는 거죠. 그냥 열심히 해서 두려움을 없애는 것. 제 방법은 평범해요.

평범한데, 좀 무서운 방법이네요.
무서우세요?(웃음)

네…(웃음). 참, 그런데 기타 실력은 많이 늘었나요? 몇 년 전에 만났을 땐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수줍게 말했잖아요.
기술적으로 많이 늘었다기보다는 지금은 ‘뭐 어때’ 하는 생각으로 해요. 무대 위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아요. 나는 기타 대신 노래를 잘하니까, 하는 식으로 배짱이 늘었달까요.

척 70 X 하이 아머 블루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보우 장식 실크 드레스는 Meryll Rogge 제품.
척 70 X 하이 파치먼트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러플 장식 드레스는 Ice Dust 제품.

네 번째 서울재즈페스티벌 출격이죠? 이번에 특별히 준비한 게 있다면 살짝 귀띔해주세요.
이제는 제 노래도 많이 생겼고, 2집 때보다는 확신에 찬 마음이 더 강해요. 저는 제가 달라졌다고 믿거든요. 아마 보시면 ‘내가 알던 예린 음악이 아닌데’ 하실 분도 있고, ‘쟤가 저런 것도 하네’ 하고 좋아해주실 분도 있을 거예요. 저의 이번 서재페는 한마디로 3집 <Flash and Core>입니다.

확실히 지금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도 배짱이 느껴져요. 무엇이 백예린을 ‘배짱이’로 만든 걸까요.
무대에서 내려온 나, 백예린은 그닥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제가 데뷔 15년 차 정도 됐고, 29년을 사는 동안 3집 제작할 때만큼 열심히 산 적이 없는 듯해요. 뭔가 먼저 물어보고 먼저 요청하는 성격이 아닌데, 3집을 준비하면서는 염두에 둔 프로듀서에게 먼저 DM도 보내고, ‘제가 데모들고 찾아봬도 될까요?’ 하고 들이대기도 했죠. 발로 뛴 거예요. 방문판매 사원처럼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내 취향도 음악에 더 적극적으로 담게 됐죠. ‘내가 온전히 좋아하는 걸 한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면에서 3집은 제게 ‘성공한 앨범’이에요. 자존감이 그래서 많이 올라갔죠. 되게 즐겁고 되게 사랑스러운 시간들이었어요.

그렇게 ‘방문판매’로 만난 게 프로듀서 피제이죠? 작년 5월 낸 싱글은 제목을 아예 ‘I Met Peejay’로 지었네요. 왜 피제이를 택한 건가요?
오래전, 그니까 제가 스물한 살 때쯤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 씨의 문래동 작업실을 오가면서 여러 아티스트를 접할 무렵이었어요. 그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피제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주 들었죠. 오랜만에 그 이름을 기억에서 꺼냈고, 그와 작업하면 클래식한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클래식하면서도 제가 거기 묻었을 때 조금 새로운 것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

척 70 X 하이 에나멜 레드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가죽 재킷은 Ice Dust, 꽃무늬 보디슈트는 Shushu/Tong 제품.
척 70 X 하이 멜론 드라마틱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반짝이는 비즈 드레스는 Stella McCarteny H&amp;M 제품.

피제이와 협업 과정은 실제로 어땠나요?
그를 처음 만날 때 제가 2022년부터 2024년 사이에 혼자서 보컬을 녹음하고 트랙도 직접 만든 데모 스템(Stem)들을 다 가져갔어요. ‘이것들을 기반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면서요. 며칠 뒤, 너무 끝내주는 편곡을 입힌 음원을 피제이가 보내준 거예요. 큰 자극과 감동을 받아서 저도 다시 새로운 곡을 쓰게 되고,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좋은 것들이 겹겹이 쌓였어요. 끊임없는 토론과 토의로 앨범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큰 즐거움이었어요.

데모 트랙 작업도 직접 했군요. 기타 연습을 하듯, 몇 년 전 만났을 때 트랙 메이킹도 걸음마 단계라고 했는데, 진짜 음악가 백예린에게 그동안 많은 모색과 진보의 시간이 있었네요. 완성된 3집을 들으면서도 어떤 장르로 꼬집어 말하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 한 곡 안에서도 변주되는 곡들 때문에 아이디어가 가득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저도 요즘 K팝 곡들처럼 많게는 10여 명이 한 곡을 만들어내는 송캠프식 작업에 호기심이 있긴 해요. 하지만 이런 ‘맨투맨’의 소통, 나와 그 사람의 대화가 담긴 앨범이 아직은 제게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3집의 라이너 노트가 강렬했어요. 단 한 줄이더군요. ‘Wanna See You Dance.’ 어떤 의미인가요? 서재페에서도 우리 관객들, 춤추면 되는 건가요?
서재페, 춤추셔야 하고요(웃음). 사실 저 한 문장이 3집의 핵심이에요. 계기가 있어요. 3집 제작을 결심할 무렵에 춤추는 일을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하루는 그를 따라 난생처음 프리스타일 댄스 배틀에 가봤어요. 충격을 받았죠. 늘 노래와 소리에 집중하는 사람인 제가 그토록 강렬하게 시각적이고 직관적인 예술을 보니…. 그런데 그 친구의 친구들이 저를 알아보고는 ‘예린 님 노래는 쉬거나 힐링할 때 들어요. 좋아요!’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 나름대로 2집에서 하우스 음악도 했는데 속으로 약간 속상했죠. 오기가 생겼어요. 내 음악이 이렇게 댄스 배틀을 하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DJ들이 알아서 선곡해서 트는 곡이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내겠다는 목표요. ‘Wanna See You Dance’는 그렇게 나온 모토예요.

정말 야심 찬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네. 제 마음속에서 되게 거창한 앨범….

척 70 X 하이 화이트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트랙 재킷, 튜브톱 점프슈트는 Meryll Rogge 제품.

<Flash and Core>라는 앨범 제목은 뭘 뜻하나요?
백예린이라는 변하지 않는 중심(Core), 그리고 반짝반짝 번뜩이는(Flash) 아이디어. (예린은 이때 이마 위로 왼쪽 손바닥을 펼쳐 올렸고, 오른손은 주먹 쥐어 명치 끝 쪽에 위치시켰다.)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그 모든 취향과 유행이 지나간 뒤에도 남아서 이렇게 굳게 자리잡고 있는 나….

수록곡 ‘No man’s land’에서는 김아일과 랩 배틀을 하는 듯해요. 이거, 거의 랩 맞죠…?
그러게요. 제가 감히…. 그냥 재밌는 짓을 하나 하고 싶었어요. 랩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리드미컬한 속삭임도 노래의 한 방식일 수 있어요. 물론 친구들한테는 ‘또 나 트롤 짓 했다’고 털어놓긴 했지만요(웃음).

아일랜드 출신의 래퍼 레지 스노우가 참여한 ‘Your Yerin’도 떠올라요.
맞습니다. 그것도 제 방문판매로 시작됐어요. 레지한테 다짜고짜 DM을 보내서 ‘다 완성된 트랙이 있는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당신이란 래퍼를 원한다’는 식으로 큰소리를 쳤죠. 정말 다정하고 착한 레지, 훌륭한 랩을 해준 레지에게 너무 고마워요.

이제 서재페에 네 번이나 나온 가수가 됐는데, 백예린에게 재즈란 어떤 건가요?
잘라 말하면, 제게 가장 어려운 음악. 결국 또 재즈 이야기를 하면 전 무조건 석철 씨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2017년 첫 서재페 때 함께 무대에 나갔는데, 재즈란 벽이 너무 높게 느껴져서 두려워만 하던 저를 용기있게 이끌어준 게 윤석철 트리오였어요. 록 음악을 통해 제가 많은 걸 배운 것처럼, 재즈 안에서도 저는 많은 걸 배웠죠. 그전까지 저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 정해진 녹음, 연주 밖으로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윤석철 트리오는 연주도중에 제가 박자를 놓치거나 틀려도 끊지 않고 맞춰서 음악을 가져가더라고요. 연습생 생활과 가수 활동에 익숙했던 제게 그건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요.

이번 서재페에서 아티스트 말고 관객으로서 꼭 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요?
일단, 엘라 마이. 그의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또, 자넬 모네. 제가 그의 ‘Tightrope’를 커버한 적도 있죠. 그리고 아직 무대를 한 번도 못 본 태버 오빠, 그리고 바로 제 앞 순서에 나오는 알파 미스트.

6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는 밴드 ‘더 발룬티어스’로서 출격하죠? 기타 든 로커 백예린, 그리고 팝 디바 백예린.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무대에 올릴 때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둘의 공통점은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음, 더 발룬티어스의 키워드는 제게 문화와 도전이에요. 원래 저는 ‘록알못’이었고 멤버들한테 어깨너머로 이런저런 걸 배우면서 그 문화 자체가 너무 좋아져서 시작하게 됐거든요. 저 역시 제 음악을 듣는 친구들, 앞으로 들을 분들에게 저처럼 ‘도전적으로 다른 걸 시도해보라!’고 권하는 마음이 이 밴드를 할 땐 늘 있어요.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기타 메고 무대에 서면 마음 가는 대로 막 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솔로로 무대에 설땐 청소년 팬들을 의식해서 정신 차리고 책임감 있게 행동을 조심하죠. 그러니까 제 몸이 하나의 모니터라면 두 개의 본체가 있는 셈이에요.

두 본체를 ‘딸깍’ 하고 오가는 전환 스위치는 뭔가요?
이름이죠. 예전에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서 하루는 더 발룬티어스, 다음 날은 백예린으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름 하나로 꺼졌다 켜졌다가 되더라고요.

여전히 많은 리스너들이 백예린의 음악을 치료제로 기억해요. 백예린 본인에게도 치유의 기능을 하는 음악이 있겠죠?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소라, 김광진, 빛과 소금 선배님들의 음악을 많이 들어요.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치유받고 싶을 때 일과 관계된 건 절대 안 하려 해요. 음악도 안 듣는다는 이야기예요. 또, 좋은 가사조차 위로가 안 되는 날이 있으며, 결국 힘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음악이 아니라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가요가 제게 치유처럼 다가오는 건, 그 선배님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그게 저를 정신 차리게 만들어요. 나도 훗날 누군가에게 이런 음악가로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힘든 생각도 지친 마음도 조금은 잊히는 것 같거든요. 긍정적인 생각도 들고요.

척 70 X 하이 블랙 스니커즈는 Converse 제품. 시스루 톱, 쇼츠는 Annakiki 제품.

올해 더 계획하는 것, 미래에 더 꿈꾸는 게 있나요?
올해는 확실히 더 발룬티어스의 해가 될 수 있게 할 거예요. 저는 늘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살아요. 그래야 덜 불행할 수 있거든요.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환상이 돼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게 우리의 음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요. 팬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해줘요. ‘더 발룬티어스가 활동하면 그 여름이 너무 예뻐져요’라든가 ‘우울하고 슬픈 여름이었는데 음악 덕에 미화돼요’ 같은…. 저희 음악을 다시 꺼내 들을 때만큼은 어떤 온도, 날씨, 풍경이 생각날 정도로 그 여름의 기억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거기에 맞춰서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더 장기적으로는 페스티벌이나 단독 공연 말고 다른 방식의 퍼포먼스를 이어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작년을 살아내면서 ‘아, 나는 그냥 보컬은 아니구나. 퍼포머구나’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사실 지금 답은 없어요. 하지만 저나 저와 비슷한 친구들이 함께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이나 방식을 꼭 찾고 싶어요. 이르면 내년에는 어떤 것이든 구체화해서 실행에 옮겨보는 게 목표입니다.

인간 백예린이 아주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것, 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고 찾아가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필요한 것을 넘칠 정도로 운 좋게 많이 받은 사람 같아요. 엄마, 아빠한테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요.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재밌는 것’일 거예요. 새로운 걸 계속하는 것. 그런데 새로운 걸 해서 재밌는 게 아니라 재밌는 걸 하다 보니 새로운 게 나오고, 그걸 하면 또 너무 재밌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사는 게 행복해서 내일이 기대가 되고 그렇게 음악과 삶이 연결되는 것. 그런 재밌는 게 계속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혹 나타나지 않더라도 좋아요. 그걸 찾는 과정, 그런 마음조차도 삶을 의미 있게 할 테니까요.

포토그래퍼
박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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