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F/W 컬렉션 다이어리 – 파리

김신, 이예진, 이예지, 김민지, 김현지, 장진영, 신지연

2026 F/W 컬렉션이 열린 뉴욕에서 파리까지, 장장 28일간의 미행(美行).

PARIS

2026.3.2 ~ 3.10

베스트 퍼포먼스

이름부터 ‘부유하고 우울한 아이들’이라니, 앙팡 리쉬 데프리메가 펑키한 미학으로 기성 패션의 틀을 쿨하게 부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번 파리 쇼는 런웨이에 낭만적인 인공눈을 흩날리고 마릴린 맨슨을 오프닝에 세우는 파격을 시도하며, 한 편의 강렬한 누아르 영화같은 서사를 펼쳤다. 고독하면서도 거친 에너지를 시각과 청각으로 꽉 채워낸 퍼포먼스는, 패션이 단순한 옷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까지 예술적 영감을 확장할 수 있는지 그 매혹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

이번 로에베 쇼는 독일 아티스트 코지마 폰 보닌(Cosima Von Bonin)과 협업하여, 파리 뱅센성 런웨이를 초현실적인 해저세계로 탈바꿈시켰다. 쇼장 좌석을 점령한 거대한 문어와 범고래 같은 조각품은 조개 모양 미노디에르, 게 집게발 참 등 위트 있는 액세서리로 이어지며 컬렉션 곳곳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네오프렌과 라텍스를 활용한 의상들이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 듀오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와 결합하여, ‘진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진지함’이라는 로에베식 초현실주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박물관은 살아 있다

패션 역사학자 올리비에 사이야르는 파리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 <살아 있는 패션 박물관>을 선보였다. “마네킹에 박제된 옷은 죽은 것과 같다”는 도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전시로 모델들이 직접 오래된 의상과 일상의 옷을 입고 전시장 곳곳을 누비는 퍼포먼스를 통해, 옷을 정적인 유물이 아닌 신체와 호흡하는 생명체로 재정의했다. 하이 패션부터 일상복, 아카이브 자료까지 다양한 콘텐츠가 모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시적이고 철학적인 패션의 이야기를 전하며, 박제된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서의 패션을 보여주었다.

<유포리아>가 발렌시아가에 들어왔다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HBO 드라마 <유포리아>의 감독 샘 레빈슨과 협업해 쇼를 하나의 시네마틱한 내러티브로 재구성했다. 샘 레빈슨이 <유포리아>의 상징인 강렬한 조명과 네온 컬러를 활용해 런웨이의 미장센을 영화처럼 설계하고, 쇼의 배경이 된 영상과 사운드를 영화적 서사로 구성하여 몰입감을 극대화했다면, 피촐리는 특유의 ‘꿈꾸는 듯하고, 혼란스러운 <유포리아>의 이미지를 담은 그래픽 프린트를 적용하거나, <유포리아>의 상징인 글리터 메이크업, 화려한 파티 의상을 상징하는 소재인 시퀸, 크리스털 장식, 메탈릭 소재를 활용하고, <유포리아>에서 감정 상태를 대변하던 네온 블루, 일렉트릭 퍼플, 강렬한 레드 등의 컬러를 이용해 감독과의 협업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두 고수가 만나 만들어낸 극강의 컬래버레이션!

런웨이를 접수하라

패션계 전설부터 새로운 세대의 뮤즈까지. 미우미우가 지향하는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세대를 아우르는 인물들이 ‘런웨이’로 모였다.

누구냐, 넌

파리 기반의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인 마테오 가르시아는 셀린느의 2026 F/W 컬렉션을 위해 단순히 소리를 내는 장비를 넘어, 목재와 스틸 소재를 결합해 공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조각적 스피커’를 탄생시켰다. 그는 평소 전통적인 수공예 방식과 하이파이 기술을 결합하여,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예술품으로서의 오디오를 제작한다. 이번 작품은 마이클 라이더가 애정하는 70년대의 그루브와 빈티지한 아카이브 무드를 가르시아의 묵직한 오디오 조각을 통해 청각적으로 완성되었다. 기술과 조각이 어떻게 하나의 완벽한 공감각적 언어로 기능할 수 있는지 증명해낸 사례.

리허설을 무대 위로

세실리아 반센은 이번 시즌 런웨이를 리허설 무대로 바꿨다. 안무가 미르토 게오르기아디, 퍼포먼스 컬렉티브 오라마 아틀리에(Oráma Atelier)와 협업해 무용수들의 실제 리허설 장면을 그대로 런웨이 위에 펼쳐낸 것. 스트레칭, 호흡, 동선 체크까지 모두 연출의 일부가 되며 쇼는 완성된 공연보다 그 직전의 긴장감을 담아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늘 완벽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무대.

헤어 쇼쇼쇼

파리에서 가장 극적인 액세서리는 모자도, 주얼리도 아닌 헤어 스타일링이었다. 느와 케이 니노미야에서는 헤어 아티스트 신지 코니시가 구조물처럼 솟아오른 헤어를 완성하며 쇼를 하나의 아트 퍼포먼스로 만들었다. 동물 형상의 조형물을 얹고, 촘촘히 엮은 브레이드 구조물 위로 긴 헤어피스를 드리운 것. 조형물에 가까운 아티스틱 헤어가 룩과 완벽히 맞물리며 착장의 범위를 머리끝까지 확장한 셈. 키코 코스타디노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본 듀오 헤어 아티스트 팀 토미코노가 작업한 파충류와 조류를 연상시키는 볏 형태의 헤어는 모델들을 기이한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헤어 아티스트들이 런웨이의 공동 저자처럼 느껴진 순간들.

‘씨’나리오

패션위크의 또 다른 묘미는 패션 브랜드들이 각자의 스토리텔링을 담아 건설한 무대를 관전하는 것이다. 루이 비통은 루브르 박물관 광장을 미지의 야생 지대로 꾸몄는데, 암석 구조물과 흙, 이끼를 배치해 도시와 자연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에르메스 쇼에서는 넓은 잔디가 깔린 가운데 푸른 달이 떴는데, 이번 컬렉션 테마인 ‘밤의 산책자’를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샤넬은 넓은 그랑 팔레에 거대 크레인을 설치해 남다른 스케일을 보여줬다. 마티유 블라지가 지향하는 건설 중인 샤넬의 미래와 변화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거뒀다.

재기발랄 대잔치

파리 패션위크 초입부를 연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의 두 브랜드. 바퀘라의 디자이너 듀오 패트릭 디카프리오와 브린 타우벤시는 “꽉 붙잡되, 가볍게 놓아주라”는 슬로건 아래,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뒤틀린 우아함을 강조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녹색 음모, 선글라스 브라, 팔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도형 드레스 등이 대표적이다. 호다코바 쇼는 가정이라는 공간과 자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의자 다리가 붙어 있는 상의나 찻잔으로 만든 브라 등을 선보였다.

스모킹 핫!

“옷이 너무 뜨거워 실제로 타기 시작했다”는 유머를 담아 이번 컬렉션의 파격적이고 강렬한 에너지를 ‘연기’로 표현한 장 폴 고티에의 듀란 랜틴. 런웨이에 실제 연기 나는 드레스가 등장했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알게 된 그 정체는 바로 모델이 직접 제어하는 연기 기계였다.

자연에 살어리랏다

풋풋한 풀내음을 느낄 수 있었던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두 거장의 컬렉션. “자연은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라고 선언한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나무 막대기에 매단 보따리 모양 가방, 나무집 형태 백, 시골 목동에게 영감을 얻은 모자 등 동화적이고 유머러스한 오브제를 선보였다.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은 파리의 상징적인 튀일리 정원에 온실을 마련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에서 영감을 받은 배경을 연출했고, 수련 모양 힐, 개구리 모양 클러치, 섬세한 꽃장식을 통해 우아하고 세련된 ‘플라워 우먼’ 이미지를 구현했다.

리 맥퀸에 대한 헌사

션 맥기르는 이번 시즌 단순히 맥퀸의 아카이브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리 알렉산더 맥퀸의 2001 S/S ‘보스(Voss)’ 쇼를 전격적으로 소환했다. 가장 직접적인 장치는 단연 사각형 중앙 무대. 관객이 사방에서 둘러보는 박스형 구조는 당시의 세트를 거의 그대로 환기했다. 리 맥퀸이 정신병동과 관음증에서 영감 받아 패션쇼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확장했던 것처럼, 션 맥기르 역시 이번 무대를 통해 런웨이가 아닌 잊지 못할, 강렬한 ‘장면’을 만들고자 한 듯 보였다. 전임자의 유산을 피해 가기보다, 하우스를 정의한 가장 상징적인 쇼를 정면으로 마주한 셈. 아직 자신의 언어를 구축 중인 디렉터가 택한 가장 대담하고도 위험한 방식의 헌사였다.

작별 인사

알라이아에서 마지막 쇼를 선보인 피터 뮐리에는 무대 양옆 스크린에 아틀리에 팀원들의 포트레이트를 띄웠다. 자신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하우스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에게 돌린 것. 스승인 라프 시몬스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기념비적 순간까지 남겼다. 반면 꾸레쥬의 니콜라 디 펠리체는 하우스에서의 5주년 컬렉션을 소박하게 기념하며 이별을 고했다. 백스테이지에서는 케이크를 나누며 축하했고,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 쇼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작별을 준비한 사람과, 작별을 숨긴 사람. 같은 이별이지만 다른 방식을 선택한 두 디렉터의 넥스트 챕터가 기대된다.

@lyas

이젠 패션위크의 비공식 베스트 프런트로는 쇼장이 아니라 패션 평론가이자 스토리텔러인 리아스(Lyas, 본명 Elias Medini)의 워칭 파티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열린 무료 ‘La Watch Party’에서는 메이저 쇼들이 줄줄이 상영됐다. 초대받지 못한 이들도 패션위크를 경험할 수 있게 만든 이 이벤트는 이제 단순한 단체 관람을 넘어, 패션위크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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