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고도 흐르는
디즈니+ <탁류> 속 ‘장시율’은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내다. 그러나 이를 연기한 로운은 오히려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변화를 주저하지 않는 배우의 궤적은 지금도 고요히, 그러나 쉼 없이 흐르고 있다.


<W Korea> 오늘 촬영장에서 군대 얘기가 나왔는데, 입대가 예정된 로운 씨만 웃지 못하고 있더군요…(웃음).
로운 하하. 사실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히려 정지가 아닌 재구성의 시간이 될 수 있겠다 싶거든요. 빨리 다녀와서 얼른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연기가 너무 그리울 것 같거든요. 최근 <탁류>의 후시 녹음이 잡혀서 반나절 정도 스튜디오에 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때 ‘아, 빨리 다녀와서 일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그 재구성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싶어요?
훈련 외에 개인 시간이 있으면 언어를 배울 계획이에요. 시간을 잘 써서 뭐 하나라도 배워 나오면 좋겠네요.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일부러 자주 하는 얘기이기도 해요. 입 밖으로 꺼내다 보면 적어도 근처에는 가 있더라고요. 요즘은 시장도 크고, 장르의 폭도 훨씬 넓어졌잖아요.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
<탁류>가 공개를 앞두고 있죠. 조선시대 물류 경제의 중심지였던 경강, 이곳에 모여드는 상인과 노동자를 관리하는 실세 ‘왈패’들 이야기예요. 2021년 KBS <연모>, 2023년 KBS <혼례대첩>에 이어 또다시 시대극에 도전하는 셈이에요.
그렇죠. 시대극을 연달아 하다 보니 처음엔 대본을 펼치기까지 조금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시간을 내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었는데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어요. 읽는 내내 장면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무조건 해야겠다’ 싶었죠. 곧장 제작사에 전화를 걸었어요. “늦게 읽어서 죄송한데, 혹시 캐스팅 이미 끝난 건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웃음).” 그만큼 욕심났어요.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은 작품이었어요.

두 시대극 장인의 만남으로 이미 화제를 모으고 있어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감독, KBS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함께하는 작품인데, 이들과의 작업에서 어떤 기대가 있었나요?
사실 이번 작품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추창민 감독님이 제게 던진 한마디 때문이기도 해요. 첫 미팅에서 절 보시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셨어요. “난 너에게서 가장 중요한 무기를 뺏을 거야. 바로 잘생김을 뺏을 거야.”
그보다 좋은 ‘저격’은 없었을 듯한데요? 2021년 <더블유>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잖아요.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잘생겼다’ 말해준다. 그게 나의 무기이긴 하지만, 연기할수록 외적인 것이 아닌 진짜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요. 감독님 말씀을 듣고 속으로 대신 대답했죠.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발, 제발 그래주세요.” 그 순간 감독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어요. <탁류>는 ‘왈패’라는 낯선 소재와 세계관을 가진 데다, 타격감 있는 액션 신으로 가득한 활극 장르예요. 사실 제가 정말 오래 기다려온 이야기예요. 늘 어떤 목마름이 있었는데 마침 그 갈증을 해소해줄 작품이 제게 온 거죠. 그리고 감독님의 이 한마디에 확신을 굳히게 됐고요. “작품이 공개되고 나면 많은 사람이 너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될 거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배우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선물이 있을까요.
추창민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7년의 밤>,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의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탁류>로 첫 시리즈 연출에 도전했죠.
감독님과 작업하며 얻은 게 정말 많아요. 그중 하나는 ‘연기에 정답은 없다’는 깨달음이에요. “100점짜리 연기는 없어. 단지 지향하는 방향이 있을 뿐이야. 우리는 그 영점을 맞추는 데 시간을 쓰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현장에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죠. 완벽한 준비보다 진실된 현장성을 중시하고, 배우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두는 스타일이세요. 아무리 촬영 시간이 촉박해도 배우가 납득할 때까지 테이크를 밀어붙이고요. ‘배우는 즐기는 사람이고 고민은 연출자의 몫이다.’ 이런 분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은 감독님께 제가 살면서 느낀 모든 희로애락을 죄다 털어놓기도 했어요.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을 듯하네요.
정말로요. 예전에는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회할 때가 많았어요. ‘내가 최선을 다했나?’ 스스로 의심이 들곤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촬영을 마치면 오히려 이렇게 말했죠. ‘아, <탁류> 맛있다!(웃음)’ 스물여덟 살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이번에 맡은 ‘장시율’은 어떤 인물인가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과거를 감추고 마포나루의 왈패가 된 사내예요. 맑고 순수한 마음을 지녔지만, 사정이 있어 이름이 밝혀져선 안 되고, 신분이 드러날 위험이 생기면 무조건 떠나야 하는 처지예요. 늘 도망치고 숨어 지내니, 타인에게 쉽게 정을 주거나 기대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극본을 맡은 천성일 작가에 따르면 <탁류>는 “부둣가 하역 노동자들이 전국구 보스가 되는 이야기”라죠. 로운이 생각하기에 이번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는것 같나요?
저는 ‘장시율’을 연기했기 때문에 그 인물에서 출발해 생각하게 돼요. ‘이름이 없어야 하는 사내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되는 이야기.’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많은 의미를 품잖아요. 그래서 <탁류>는 성장의 서사이자, 인생을 배워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같은 왈패 역할을 맡은 배우들과 남다른 호흡을 자랑했다고 들었습니다.
크, 정말 좋은 의미로 미친 분들입니다(웃음). 박지환, 박정표, 윤대열, 안승균, 김철윤 형님들. 지방에 오픈 세트를 지어 촬영했는데 비가 오면 촬영이 자주 취소됐어요. 그런 날이면 형님 중 한 분이 슬쩍 이렇게 운을 떼세요. “로운아, 어디 알아봐라.” 그러면 제가 그 지역의 괜찮은 한정식당 리스트를 딱 대령하죠(웃음). 술자리도 자주 가졌는데 취중에 연기에 대한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어느 날 지환이 형이 그러시더라고요. “로운아, 위스키도 좋지만 가끔은 소주도 마셔라.” 연기든 사람이든 결국 가까이 부대끼며 살아봐야 안다는 뜻이잖아요. 사람을 좋아하고, 곁은 내주고, 그 속에서 관계가 깊어진다는 거죠. 몇 번 저녁 먹고 술 마셨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끈끈해질 수 있나 싶을 만큼 참 낭만이 있는 현장이었어요.

2021년 <더블유>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아무래도 나의 원동력은 열등감인 것 같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간다.” 지금도 여전히 열등감을 동력 삼아 나아가나요?
물론이에요. 쉽게 변하진 않을 것 같아요. 열등한 나는 저에겐 최고의 재료예요.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열등감을 핑계 삼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나의 아픔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받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가 어떤 단어가 먼저 떠오르나요?
지금은 ‘피해의식’이 떠올라요. 내가 힘든 이유가 명확해지면 거기서부터 ‘왜?’를 끝없이 던져요. 그 밑바닥에는 늘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있더라고요. 이건 나에게 정말 솔직해지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거예요. 누구나 자신의 인정하기 싫은 모습을 발견하면 피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냥 인정해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 결론이 나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이용할까?’를 고민해요. 어쩌면 나에게 굉장히 냉정한 편인데,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요즘 마음 속에 품고 사는 한 문장이 있다면요?
‘진짜로 원하면 가지게 되어 있다.’ 예전엔 이 말이 허황하다 느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노랫말처럼 ‘말하는 대로’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미리 해두고 싶은 말은, 저는 무조건 좋은 배우가 될 거예요. 오래 일하는 배우가 될 거예요.
빨리 나이가 들고 싶은가요?
아니요. 단지 너무 기대돼요. 저는 앞으로 멋지게 익어갈 거거든요. 30대, 40대, 50대… 점점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아요.


<탁류>의 ‘장시율’은 비밀을 품은 인물이죠. 로운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을까요?
저는 사람을 정말 좋아해요.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하고 존중하려고 애써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가끔은 사람이 무섭기도 해요. 또 의외로 굉장히 솔직하고 털털한 편이에요.
좀 슬프지만… 조만간 ‘곰신’이 될 팬들을 위해 노래 한 곡을 추천하고 떠나주세요(웃음).
하하, 적재의 ‘The Door’. 요즘 푹 빠져 있는 노래예요. 가사가 참 좋은데, 제 마음을 옮겨 적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수더분하면서도 오래 남아요. 그리고 저를 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탁류>는 봐주세요(웃음). 아니다, 진지하게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압니다. 제가 30대에 더 멋있어질 거라는 사실을요. 진짜로. 이건 근자감이 아닙니다.’
오늘 빛을 머금은 티파니 주얼리와 함께 촬영했어요. 로운이 생각하는 반짝이는 순간은 무엇인가요?
최근 깨달은 게 있다면, 가지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삶보다 나누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거예요. 물론 먼저 내 것이 있어야겠죠. 그래야 나누는 기쁨도 진짜가 되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넬 때, 그 순간만큼 반짝이는 시간은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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