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미술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던 LA가 금세 떠오를 거라고 간파한 갤러리. 구성원 대부분이 블랙, 유색 인종, 네이티브 아메리칸이거나 LGBTQ인 젊은 세대가 끌어가는 VSF(Various Small Fires). 역시 다채로운 배경을 지닌 젊은 작가군은 내년 전시에서 선보일 최신작들을 프리즈 서울에서 공개한다.
GINA BEAVERS ‘WARM PALETTE LIPS’(2022), ACRYLIC ON LINEN ON PANEL, 121.9 X 91.4 X 12.7CM.
‘할리우드 중심에 ‘힙’한 갤러리가 있다’는 풍문이 서울까지 닿은 건 약 3년 전이다. 그러니까, 프리즈 LA가 출범한 2019년. 같은 해 4월 1일, 한남동에 아담한 규모의 VSF가 문을 열었다. 아트 바젤 홍콩을 둘러본 VIP들이 서울로 모인 시점이었다. 아트페어 여행자들이 전통적인 갤러리 외에 ‘발견’이라고 할 만한 갤러리를 입에 올릴 때, 마침 VSF 서울 지점이 등장한 것이다. 만우절에 개관한 건 ‘한 유머’ 하는 전속 작가 빌리 알 벵스턴과 그의 절친인 에드 루샤의 아이디어였다. 2012년 LA에서 출발한 VSF를 말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갤러리의 태생적 배경부터 짚어야 한다. 대표인 에스더 김 바렛(Esther Kim Varet)은 텍사스 댈러스로 이주한 가정에서 자란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10년간 미술사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전설적인 미술 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조교를 지냈고, 이후 큐레이터 경력도 좀 쌓았다. “뉴욕의 모든 영향력 있는 갤러리 소유주는 거의 백인이었어요. 그 당시 분위기는 ‘원래 여기는 이런 거야’ 같았죠. 앞으로 ‘대나무천장’에 부딪힐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서울을 포함해 LA와 댈러스에서 일하는 직원 대부분은 블랙, 유색 인종, 네이티브 아메리칸이거나 LGBTQ다. 구성원 모두 마흔 살 이하이고, 몇몇은 1세대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VSF의 구성원은 서로 다른 언어와 시각과 배경을 지녔어요. 우리는 다채로운 배경과 분야에서 살아온 작가들을 대표하고자 합니다. 같은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는 거죠.” 에스더의 말처럼, ‘다양한 작은 불씨들(Various Small Fires)’이 미술계에 피어났다.
VSF의 전속 작가 수는 현재 22명이다. 그 라인업을 짧게 요약하면 이젠 가고시안 갤러리의 대표 작가가 된 조나스 우드가 우상처럼 여기는 LA 미술계의 기수, 노장 화가 빌리 알 벵스턴부터 디올 디자이너 출신인 알렉스 폭스턴을 거쳐 1994년생 마크 양에 이른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 참여하는 작가는 비교적 젊은 작가군이다. 우선 시선을 사로잡는 ‘입술’의 향연이 흥미로운 작품은 지나 비버스(Gina Beavers)의 ‘Warm Palette Lips’(2022)다. 아테네 태생으로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이 작가의 작업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구글 등 온라인에서 아카이빙한 이미지들로부터 시작된다. 최근 작가는 메이크업 튜토리얼 영상, 연예인 사진, 해시태그 ‘#foodporn’으로 찾은 이미지를 주요 자료로 사용한다. 그것들을 촉각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 아크릴 물감을 겹겹이 바르며 텍스처를 만든다. 대상이 무엇이든 작가는 우리가 인스타그램에서 목격하는 비주얼보다 더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것을 표현해낸다. 작가가 다루는 주제는 ‘누군가 원할 만한 삶의 이미지’ 혹은 ‘유혹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소셜미디어, 거기에 드러난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ALEX FOXTON ‘GAVRILO’(2022), OIL AND ACRYLIC ON CANVAS, 41 X 33 CM.
가장 최근 VSF에 합류한 알렉스 폭스턴(Alex Foxton)은 하이엔드 패션 제국에서 커리어를 쌓은 끝에 페인팅이라는 ‘기본’으로 향한 경우다. 그의 작품들에서 우선 느낄 수 있는 건 남성성과 거친 면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연관 있는 보스니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폭스턴 스타일의 터치로 담은 초상 ‘Gavrilo’(2022)도 그렇다. 다소 우울함이 감도는 작업도 다수인데, 그림에 대담함이 있어서 우울해도 궁상맞지 않다. ‘패션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3분 이상 가만히 팔짱만 낀 채 시간을 흘려보낼 순 없다는 걸 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모델에게 남성복을 입히던 디자이너는 이제 캔버스 앞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흘려보내며 미감을 발휘하지 않을까?
MARK YANG ‘THE LAMENTATION’(2022), OIL ON CANVAS, 127 X 101.6 CM.
마크 양(Mark Yang)은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화가다. 학창 시절 레슬링팀 일원으로 활동한 경험, 한국과 다른 미국의 남성 문화,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정체성에 작업의 뿌리를 둔다. 그가 표현을 위해 선택한 것은 ‘몸’. 일러스트 전공자답게 몸의 윤곽과 형태를 다채롭게 조형하는데, 잘린 몸의 일부나 그렇게 보이는 형상을 그리기도 한다. 평면의 회화이지만 입체감 있는 조각의 물성이 느껴지게끔 그리기 때문에, 관람객이 그의 작품 실물을 감상할 때는 회화인지 부조인지 확인하고자 캔버스 앞으로 몸을 바짝 움직이게 될 것이다. ‘애통’, ‘비탄’이라는 뜻을 지닌 ‘The Lamentation’(2022)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화가가 탐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The Lamentation of Christ’를 모티프로 제작했다. 죽음을 맞이한 채 누워 있는 예수를 그의 발끝에서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 마크 양 식의 신체가 그림 속에 있다.
NIKKI S. LEE ‘THE SENIOR PROJECT 19’(1999). NIKKI S. LEE ‘THE SCHOOL GIRLS PROJECT 13’(2000).
VSF의 초창기부터 함께한 사진가 니키 리(Nikki S. Lee)의 작업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영화를 준비 중으로 꽤 오랫동안 신작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다. 2015년 원앤제이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이후로는 해외 전시만 있었다. 그래서 리움미술관 재개관전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은 국내에서 오랜만에 니키 리의 작업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정체성이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고, 속일 수도 있는 것.’ 이러한 생각과 실험으로 감행한 ‘프로젝트’ 연작은 니키 리의 대표작이다. ‘시니어 프로젝트’(1999)와 ‘스쿨걸 프로젝트’(2000)를 비롯한 이 프로젝트는 그녀가 여피족, 스케이트보더, 히스패닉, 레즈비언 등등 다양한 타인의 집단에서 그들과 융화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센세이셔널했던 이 연작이 발표된 이후 시간이 꽤 흐른 최근, 그 과거 작업을 두고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에 대해 말하는 시선이 생겼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문화로 생각하자면, 타 문화권을 유용하는 문제를 두고 뜨거운 갑론을박이 곧잘 벌어지는 분야는 힙합계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구겐하임과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등 35개 뮤지엄 및 기관에서 소장 중인 니키 리의 작품이 문화적 전유라는 이슈와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궁금해진다.
MATH BASS ‘NEW TEETH’(2022), OIL ON LINEN, 101.6 X 96.5 CM.
‘그’나 ‘그녀’가 아닌 ‘논 바이너리’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매스 배스(Math Bass)는 기하학적 이미지, 시각적 기호, 단색 등을 요소로 작업한다. 작품 ‘New Teeth’(2022)도 그렇듯 ‘그들’의 그림을 보면 깔끔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데, 작가는 2014년부터 ‘기호학과 시각적 처리 문제’라는 다소 어려운 탐구를 해왔다. 예를 들면 작업에 등장하는 꽃인지 나비인지 새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요소들은 하나의 정답이 아닌 여러 가지를 연상시키는 기호인 셈이다. 어쨌든 VSF가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작품 중 가장 산뜻한 느낌을 줄 것 같다. VSF의 작가들은 프리즈 서울에서 대부분 신작을 내놓는다. 페어장은 갤러리가 내년에 선보일 프로그램에 관한 개요가 되어줄 것이다. 언급한 위 작가들 외에 알렉스 베세라, 릴리 웡 등의 작품도 이 자리에 포함된다.
VSF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건 작은 불씨이나마 개척자의 면모다. 뉴욕이 현대미술의 수도로 군림할 때, 뉴욕에서 LA로 건너간 에스더 김 바렛은 ‘LA로 미술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걸 감지했다. 올 초 세 번째 갤러리가 들어선 텍사스 지역은 에스더 대표의 고향이자 그녀가 판단하기에 아직 아무도 넘보지 않은 미술 시장 영역이다. “일하면서 점차 깨달았어요. 제 비즈니스 운영 스타일은 남보다 빨리 움직이고 한 걸음 앞서가는 식이라는 걸. 그럴 때 가장 편안하고 차분해집니다.” 그녀가 2012년 LA에 갤러리를 차리며 갤러리스트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때,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큐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동료들은 저널리스트나 큐레이터, 작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VSF는 갤러리의 프로그램에 대해 건설적인 호평을 받고, 상업 갤러리지만 진지한 분위기도 확립해갔다. 게다가 미술계가 주목하는 젊은 컬렉터들은 VSF에게 고객이라기보다 에스더와 두루 친한 친구 사이다. VSF가 젊은 갤러리라는 인상이 강한 건 구성원과 작가들의 평균 연령대 때문이기도 하고, ‘다양성’이라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VSF 구성원과 작가들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끌리기도 하고, 우리의 메시지가 다음 세대에게도 강하게 전달될 거라고 믿어요. 우리 모두 5년 후가 아닌, 50년 후를 위해 일한다는 마음입니다.”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사진
- COURTESY OF THE ARTISTS AND V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