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이슈 04 – 이승조 (Seungji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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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이승조는 ‘파이프 작가’라 불렸다. 캔버스에 규칙적으로 배치한 금속성 원통의 모티프들은 그가 살았던 1960~80년대 산업화 현장의 파이프를 연상시켰다. 한국 기하추상 역사에 불을 지핀 화가 이승조의 작품을 이번 프리즈 서울 및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반세기 전 탄생했으나 놀랍도록 모더니티가 살아 숨 쉬는 회화, 그가 펼친 예술 세계에 성큼 걸어 들어가볼 기회다. 

파릇한 청년 화가 시절의 이승조는 어느 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때는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 중이던 당시, 창밖으론 성냥갑처럼 높다랗게 솟은 고층 빌딩과 제철소 굴뚝이 빨리 감기 하듯 스쳐 지나갔다. 쏜살같은 속도에 의해 어쩌면 한 줄의 색띠, 원통형 파이프로 보였을 도시 풍경들. 그때 이승조는 불현듯 한 생각에 붙들렸다. 1982년 훗날, 한 인터뷰에서 이승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기차 여행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무언가 망막 속을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즉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당시 뇌리에 깊게 새겨진 이미지를 캔버스 위로 옮겼다. 그러곤 말했다. “오늘의 파이프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 등장해 30년 가까이 활동해온 고 이승조(1941~1990) 작가는 흔히 ‘파이프 작가’라 불린다. 이는 캔버스를 가득 메운 수직, 수평의 금속성 원통 형상으로부터 얻어진 칭호다. 생전의 이승조는 ‘파이프 작가’ 란 칭호에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은 듯했으나,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관객은 그의 작품에서 파이프를 읽어냈다. 한편 오늘날 그의 그림을 보면 질서정연하고 서슬 푸른 빛을 띠는 원통의 형상들은 파이프라기보다 오히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세련된 기하학적 패턴으로도 보인다.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탄생했지만, 오묘한 모더니티가 숨 쉬고 있는 셈이다. 한국 기하추상의 역사에 눈 밝은 이들은 이승조 작업의 탁월함을 일찍이 알고 있었겠지만, 일반 관객이 그의 예술 세계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재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작고 30주기를 맞아 개최한 회고전 <이승조 : 도열하는 기둥>에서일 것이다. 당시 전시는 이승조가 쌓아 올린 기하추상의 진취성을 펼쳐 보이며 그간 그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단색화 계열 화가들에 비해 다소 덜 발견된 이승조 고유의 예술 세계를 소개했다. 지난 <이승조 : 도열하는 기둥> 이 그의 작업을 연대기별로 살피는 장이었다면, 오는 9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1970~80년대 그가 매진한 검은 화면의 후기 ‘핵’ 연작을 대거 살필 수 있는 기회다. 나아가 그의 작품을 프리즈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지금이 이승조의 세계에 더 깊숙이 진입하는 절호의 타이밍인 셈이다.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처음으로 국내에 상륙하는 만큼, 한국적 기하추상을 선도한 이승조의 수작을 국내외 미술 애호가 및 관계자에게 널리 알릴 기회라고 생각해요. 이승조라는 작가는 그간 국내외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미술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작가입니다. 이런 보석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이야말로 갤러리의 역할이지요.” 국제갤러리 관계자의 말이다.

이승조가 화단에 등장한 대한민국의 1960년대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1964년 주거용 고밀도 건축의 시초라 불리는 마포아파트가 서울 도화동에 들어섰고, 1968년엔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했다. 또 1969년, 바다 건너 미국에선 사람을 우주선에 실어 달로 보냈다는 뉴스가 들려오던 기이한 시대였다. 어쩌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문명의 속도, 한국 산업사의 정황은 고스란히 이승조의 예술 세계에 거세게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떠난 기차 여행에서 이승조는 창밖의 도시 풍경이 빠른 속도에 의해 ‘빛’으로 소급되는 현상을 마주했다. 1968년 <제12회 현대작가 초대전>에서 발표한 초기작 ‘핵 10’은 당시의 강렬한 경험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는데, 작품에선 빨강, 파랑, 노랑 등의 경쾌한 색띠가 수직으로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부드러운 붓이 아닌, 마치 벼린 칼로 그은 듯한 수직의 색띠는 어쩐지 속도감을 내며 캔버스 위를 질주하는 듯했고, 이는 당시 한국의 도시화 풍경과 교묘하게 겹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파이프와도 같은, 선명한 입체감의 원통형 모티프가 손에 잡힐 듯 툭 솟아올라 있었다. 분명 2차원 평면이지만 3차원으로 보이는 착시, 이는 발명에 가까웠던 채색 방법을 통해 구현됐다. 캔버스를 무시로 사포질해 평면을 방해하는 질감을 없애고, 그 위로 넓적한 평붓의 양 끝과 중앙에 유화 물감을 발라 10차례 반복적으로 붓질하는 전에 없던 채색법. 빛에 대한 영감에서 출발했고, 물감의 질료적 발견을 통해 비로소 완성한 ‘핵’ 연작은 이후 30년 가까운 이승조의 예술적 여정에 함께하며 그를 ‘파이프 작가’라 불리게 만들었다.

“1972년 결혼하기 직전, 남편은 저에게 말했어요. ‘평범하게 살 생각 하지 마.’ 그때는 작가니까 그런 말을 하나 보다 싶었는데 살면서 그게 무슨 이야기였는지 점차 알겠더라고요. 광화문, 덕수궁 등지에서 열리는 전시 출품을 위해 ‘구르마’에 작품을 싣고 흑석동에서 한강을 건널 때, 겨울 칼바람에 작품이 날아갈까 한 손으로 내내 붙들고 간 사람이에요. 밥은 굶어도 물감만은 사야 하는 작품에 대한 애달픈 사랑이 있었죠. 남편은 언제 어디서나 강렬한 작가 의식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고 그 메시지를 주변에 전달하는 사람이었어요.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하고 자기 작품에 책임져야 한다’라고.” 이승조 유족 대표이자 부인 고정자는 예술가 이승조, 인간 이승조를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사적인 일화를 묻는 말에 이처럼 답했다. 일화에서 엿볼 수 있듯 이승조란 사람의 우직스러움은, 그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만의 고유한 세계를 전개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기계적 미감이 충만하게 드리운 이승조의 기하추상은 1960년대 한국 미술계에선 마치 홀로 튀어나온 송곳만큼이나 낯선 것이었다. 당시엔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하는 앵포르멜 미학이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흔히 ‘뜨거운 추상’이라 불리는 앵포르멜의 대척점에 서서 이승조는 ‘차가운 추상’으로 대변되는 기하추상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 결과 추상보다는 구상에, 기하학적 추상보다는 표현주의적 추상에 호의적이던 화단 분위기 속에서 그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보수적 구상회화의 거점이라 여겨지던 <국전>에서 연이어 수상하며 ‘예외’를 만들어냈다. 한편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70년대 한국에서는 집단적으로 ‘한국의 모노크롬’이 주류 경향으로 발전했다. 익히 알려졌듯 모노크롬 열풍에서 단색화라는 현대미술 사조가 탄생했는데, 이때 많은 화가들이 ‘백색’의 미학에 열중하고 조형적 요소를 제거하는 ‘탈 이미지’를 강조할 때 이승조는 그만의 독자성을 묵묵히 지켜가기로 했다. 이 당시 작가는 온통 검은 화면 속 원통형 이미지인 파이프를 여운으로만 남겨놓는 연작을 대거 발표했는데, 이는 후기 ‘핵’ 연작으로 불린다.

명상적 검은 화면 속 마치 아지랑이처럼, 때론 커튼의 결처럼 일렁이는 원통의 파이프들. 후기 ‘핵’ 연작은 금속성 기계 미학이 뚜렷하던 전기 ‘핵’ 연작과 나란히 봤을 때 관객을 보다 추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만 같다. “당시는 작가가 노자 사상에 주목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화면이 물질적 세계를 넘어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됐죠. 작가는 끊임없이 창조라는 명제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불안과 근심을 떠나 정신적 내재화를 위해 무채색 안에서 안도감을 찾은 것 같아요.” 고정자의 말이다. 일견 칠흑 같아 보이는 후기 ‘핵’ 연작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블랙 안에서 블루, 그린, 그레이가 살며시 피어오른다. 시퍼렇게 서슬이 오른 붓 자국이 불현듯 떠오르고, 이처럼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고요함에 직면하게 된다. 30년이라는 짧았던 이승조의 예술적 여정의 마침표로서 기록된 검은 그림은, 어쩌면 그가 회화를 통해 이윽고 무한으로 나아가려는 준비이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할 뿐이다. 이렇듯 색띠에서 출발해 검은 무한으로 뻗어나가기까지, 이승조의 작품은 한국 기하추상의 발달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궤적이라는 점에서도 물론 유의미하지만 그보다 작품 하나하나가 절박한 삶과 작가 정신이 깃든 예술 노동의 집합체였다는 점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더 큰 울림을 주는 듯도 하다. 오는 9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과 그의 작품이 소개되는 프리즈 서울을 앞두고, 고정자는 이렇게 전한다. “이승조는 예술에 대한 신앙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얀 캔버스의 공포를 절친으로 만드는 다독임, 평면과의 대화를 즐거움으로 만드는 스킬,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도 작품의 퀄리티를 유지하려 했던 애달픈 사랑까지. 이번 서울에서 열릴 두 전시를 통해 그가 걷고자 한 미래에 대한 무한 도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핵 88-19’(1988) 195×132.5cm. 작품 ‘핵 88-19’. 금속성 원통형 파이프의 형상이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이승조(1941-1990), 핵 88-19, 1988, OIL ON CANVAS, 195X132.5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 국제갤러리.

‘핵 85-21’(1985) 199×299.5cm.

이승조(1941-1990), 핵 85-21, 1985, OIL ON CANVAS, 199X299.5CM. 

‘핵 88-19’(1988) 200×318cm.

이승조(1941-1990), 핵 88-89, 1988, 200X318CM.

‘핵’(1987) 130×97cm.

이승조(1941-1990), 핵, 1987, 130X97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 국제갤러리.

이승조는 1960년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의 산업화를 목도했다. 쏜살같은 문명의 속도는 그의 작업 세계에 거세게 문을 두드렸을 터, 마치 마치 캔버스 위를 질주하는 듯한 수직, 수평, 사선의 모티프들에선 어떠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핵’(1976) 116×90cm.

이승조(1941-1990), 핵, 1976, 캔버스에 유채, 116X90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 국제갤러리. 

후기 ‘핵’ 연작 중 하나로, 명상적 검은 화면 속 여운으로만 남은 파이프 형상이 마치 커튼의 물결처럼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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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에디터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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