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으로 인해 디지털 런웨이로 2021 S/S 시즌을 발표한 서울의 디자이너들. 가장 눈에 띄었던 다섯 디자이너들을 꼽아보니, 그들 중에는 서울에서 첫 번째 쇼를 치른 디자이너도 있었고, 네 번째, 다섯 번째인 디자이너도 있으며, 10년 차 베테랑 디자이너도 있었다. 디지털이라는 공간은 이렇듯 계급장 떼고 서로를 진솔하게 바라볼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은 내가 아는 모습도 전혀 낯선 표정도 보여주었다. 평등한 기회의 땅, 디지털 안에서 런웨이를 펼친 디자이너 중 에디터의 마음을 동하게 한 다섯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Painters
페인터스 @paintersfromseoul
브랜드와 디자이너 본인에 대한 설명 부탁한다.
페인터스는 디자이너 전원이 2018년 6월 런던예술대학교(London college of fashion)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시작한 첫 브랜드다. 한국에서 패션 스쿨을 졸업하고 런던으로 유학을 갔고, 개성이 넘치고 자유로운 도시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들을 토대로 ‘서울에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을 만들어보고 싶어 페인터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등 다양한 나라의 패션위크에 참여했고, 지금까지 총 4번의 컬렉션을 전개했다.
이번 시즌 콘셉트는 무엇인가?
이번 시즌의 주제 ‘Every Failures’는 20대 후반의 나, 그리고 친구들의 다양한 시도와 실패의 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에서는 어떠한 도전에 대한 결과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과정이나 실패에 대해서는 잘 주목하지 않지 않나. 그래서 ‘새로운 시도와 실패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간 겪은 숱한 실패들로 컬렉션을 준비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컬렉션이다. 내가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패브릭의 처리 방식, 프로젝트들로 컬렉션을 구상했고,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룩이 아닌, 무언가 진행 중인 형태의 볼륨, 형태로 컬렉션을 완성해보았다.
디지털 런웨이에 활용한 특별한 설치 작업이나 협업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번 런웨이 영상의 제로웨이스트, 업사이클링, 리사이클링 카테고리에 등장하는 모든 옷은 버려진 박스, 전기선, 버리는 옷, 그리고 플라스틱과 버려진 조화로 만들었다. 버려진 재료들을 가지고 새로운 볼륨과 형태를 만들었고, 그 옷들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장치를 최소화했다.
이번 시즌 룩에서 꼭 눈여겨봐주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테인리스로 된 철망을 늘이고 구부러뜨려 형태를 잡고 그 위에 실로 후작업을 해 만든 옷.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이 착장의주 소재는 이번 시즌 ‘Every Failures’라는 주제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막혀 갇혀 있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코뿔소처럼 단단한 착장을 만들고 싶어서 고민하던 찰나 과거에 스테인리스 철망으로 형태를 잡으며 작업했던 프로젝트를 재발전시켜 구체화한 옷이다. ‘Every Tries and Failures’라는 주제에 맞게 무언가를 감당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작은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디자인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3가지가 있다면?
복잡성(Complexity), 변화(Shift), 새로운 세대(New-Generation).
당신을 어떤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라고 정의하고 싶은가?
알렉산더 맥퀸, 레이 가와쿠보처럼 새로운 형태를 찾아 늘 연구하고 모험하며, 매 컬렉션 마다 다양한 문제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내 그저 예쁘고, 대중적인 옷이 아닌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컬렉션을 하는 디자이너.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진 디자이너로 앞으로 더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이 많지만 시간이 좀 더 흘러서 컬렉션이 쌓이면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주제로 쇼를 하는 서울의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다.
사람들이 당신의 옷을 어떻게 향유하길 바라나? 어느 한 래퍼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것을, 작은 것이라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정의하면서 아침에 누군가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만드는 바리스타의 일도, 또 누군가를 위해 새벽부터 출근해 깨끗하게 길을 치워주시는 환경미화원들도 그리고 우리 주변에 친구, 부모님 혹은 직장 동료들의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예술로 다가올 수 있다고, 그러니 우리 모두 작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되자’는 내용이었다. 페인터스라는 브랜드를 스스로 ‘예술가 집단’이라고 정의하며 처음 했던 생각도 비단, 예술 직종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예술이 있고, 그 작은 예술을 하며 개인의 개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고 싶었고, 이 생각을 앞으로도 더 많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페인터스를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오늘 하루 본인의 작은 예술을 하며 하루를 채워가시기를 소망한다.
Hanacha Studio
하나차 스튜디오 @hanacha_studio
당신의 브랜드와 당신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한국에서 섬유미술과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2012년 런던예술대학교(London college of fashion)의 석사 과정을 마쳤다. 동양인 최초로 최우수 졸업상을 받고 디자이너 레이블을 설립하며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6년에 하나차 스튜디오(Hanacha Studio)로 브랜드 영역을 확장하여‘Studio’ 안에 포괄할 수 있는 컬렉션부터 패션, 아트 및 조각과 인스톨레이션까지 선보이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매 시즌 단순히 상업적 개념의 의복이 아닌 작가의 철학과 예술적 접근 방식으로 탄생한 의상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궁극적으로 ‘예술에 영감을 받은 패션, 다시 패션이 영감이 되어 예술로’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패션의 부가가치 상승 및 지속 가능성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시즌 컬렉션의 콘셉트는 무엇인가?
초현실주의 작가 호안 미로(Joan Miro)에게 영감을 받은 이번 컬렉션은 “A simple line painted with the brush can lead to freedom and happiness”라는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기존에 추구해온 조형적 단순화 과정은 호안 미로의 상징 기호인 원, 점, 선의 요소와 함께 접목되어 일필로 강하게 그어지는 단순화된 선과 도형으로 컬렉션에 표현되었다. 작가적 정신을 보여주는 자유로운 드로잉과 정적인 실루엣은 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작업 세계를 드러낸다.
무드보드의 이미지들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설명해달라.
우리는 미니멀한 동시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결합한 실루엣을 추구한다. 특히 과거의 의상들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번 시즌에는 90년대 브리지트 바르도와 스트럭티드 테일러드 슈트를 입은 비즈니스맨, 이 둘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접목에서 영감을 찾았다. 여기에 호안 미로의 자유 드로잉, 낙서를 수집하여 형태를 단순화하고 점, 선 등을 추출하여 컬렉션에 대입했다. 또 조각, 페인팅, 가구 등이 포함된 예술 작품, 90년대 아카이브 사진들이 뒤섞인 채로 무드보드가 완성되었다.
이번 2021 S/S 시즌 디지털 런웨이에 대한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
디지털 런웨이라면 짧은 시간에 관객의 시선을 잡아야 하는 만큼 영상의 기승전결이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했고, 크게 콘셉트와 런웨이로 맥락을 나누고 그 안에서 영상이 흘러가는 듯한 흐름의 변화를 주고자 했다. 옛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작해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는 그런 영상. 특히 첫 화면에서는 인스톨레이션 사이사이에 모델을 조각 작품처럼 자리 잡게 구성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패션과 예술의 융합적 표현을 강조했다. 조형적인 관점에서는 헝가리 출신의 미국 사진가 안드레 케르테스(Andre Kertesz)의 디스토션 시리즈(Distortion Series)에 영감을 받아 왜곡되고 변화되는 형태의 움직임, 화면의 뒤틀림, 시선의 틀어짐 등을 영상에 담아보았다. 이는 호안 미로의 시적이고 자유로운 드로잉 세계를 재해석한 것이다.
디지털 런웨이의 장단점이 명확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이기 때문에 오프라인 쇼를 했다면 그 현장에 참석해 쇼를 즐길 수 있는 관객이 무척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오픈된 디지털 런웨이 안에서는 쇼를 보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물리적 장벽이 큰 의미가 없었다. 지명도가 낮아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작은 부분이 있으면 몇 번의 클릭만으로 컬렉션을 접할 수 있으니까. 관객의 참여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이 디지털 런웨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장에서 느끼는 작품과 공간의 분위기나 아우라를 직접 체감할 수는 없는 부분은 아쉽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작업은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더 깊고 길게 가는 여운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확 터트리고 사라져버리는 오프라인 쇼와 비교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런웨이는 반복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크기에 결과적으로 만족한다.
특별한 설치 작업에 대한 설명도 부탁한다. 이번 시즌에는 호안 미로의 단순화된 선과 도형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의 드로잉과 아트워크가 컬렉션에 반영되었으며, 이러한 요소를 패션 인스톨레이션으로 재해석했다. 화면에서는 좀 더 작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약 가로 10m 세로 5m에 이르는 대형 설치물을 통해 초현실적을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번 시즌 룩에서 꼭 눈여겨봐주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수공예 감성이 깃든 작업을 옷에 담아내 마치 작품을 입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소비자에게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나차 스튜디오의 시그너처 디자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메탈 프린지(Metal Fringe)를 눈여겨봐주었으면 좋겠다.
디자인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클래식(Classic), 절제미(Simplicity), 융합적 사고(Interdisciplinary Thinking).
당신은 스스로 어떤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라고 정의하고 싶은가?
패션계의 주기적이고 일시적인 성질을 초월하여, 트렌드를 따르는 패션이 아닌 수공예적 근원에서 온 디자인으로 슬로 패션,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고, 또 그 안에서 어떤 긍정적인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것이 제한된 상황이지만, 역으로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한편 점점 더 스페셜리티로 무장한 희소가치, 그리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음이 자명하다. 규모의 크기와 상관없이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스스로 세운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인 입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는 것으로 이어지는 패션 디자인의 입체적 방식을 한국에서 선보이고 싶다. 아카이빙 전시로서 말이다. 디자인이 단순히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이세이 미야케처럼, 영감을 주면서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 디자인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연구,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인해 유행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옷을 찾아 소비한다. 당신의 브랜드를 어떤 이들이 향유하길 바라는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스페셜리티를 추구하며, 시각적 창조물로서의 패션을 향유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입어주기를 바란다.
- 패션 에디터
- 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