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 곽도원, 이희준의 더블유 2월호 화보 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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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n In A Secret Room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이라는 파국이 일어나기까지 40일간의 이야기를 다룬 <남산의 부장들>은 정치나 이념을 구태여 스크린에 되살리는 영화가 아니다. 카메라는 한국 근현대사를 장식한 인물들 앞으로 다가가 그들의 마음과 심리를 좇는다. 이병헌, 곽도원, 이희준을 <더블유>가 차린 밀실로 초대했다.

이병헌 배우가 착용한 검정 가죽 트렌치코트는 Tonywack, 잿빛 터틀넥 톱은 Bottega Veneta, 검정 팬츠는 Tom Ford, 첼시 부츠는 Carmina by Unipair 제품. 이희준 배우가 착용한 검정 가죽 코트는 Xyz, 검정 터틀넥 톱은 H&M, 검정 팬츠는 Intempomood, 반지는 Versace, 더비 슈즈는 Dior Men 제품. 곽도원 배우가 착용한 검정 가죽 코트는 Eots, 검정 터틀넥 톱은 J.Rium, 줄무늬 팬츠는 Munn, 슈즈는 Berluti 제품.

곽도원 배우가 착용한 재킷은 H&M, 검정 팬츠는 Show&Tell, 반지는 Versace 제품. 터틀넥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병헌 배우가 착용한 프린트 실크 셔츠는 Emporio Armani 제품.

이병헌 
여전히 쉽지 않은 남자

새로운 이야기를 맞닥뜨릴 때마다 비슷한 무게로 고민하고, 비슷한 무게로 어려워합니다. 연기가 쉽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처음 연기를 시작하던 때의 분위기와 달리 어느 순간 영화를 말할 때 숫자가 따라붙었어요. 시대의 흐름이 있으니 그 현실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죠. 하지만 여전히 영화란 ‘이야기’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택한 이유도 그 매력 때문이에요.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의 충성심, 존경, 사랑, 그리고 배신… 이 영화는 그 감정선을 따라 아주 세련된 만듦새로 완성됐어요.”

‘이병헌을 인정하지 않기란 어렵다.’ 3년 전, 영화 <마스터>를 위해 은발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서 <더블유> 카메라 앞에 선 그를 두고 당시 피처 에디터가 쓴 말이다. 정말 그렇다. 그가 어떤 연기를 하든, 티끌만큼도 타박하거나 시비 걸 구석을 찾기 힘들다. 어떤 취향을 가진 관객이라도 배우 이병헌 앞에서는 비슷한 목소리로 대동단결하기 마련이다. 오늘 곽도원이 인터뷰에서 이병헌의 연기를 놀라워하며 설명한 표현은 이랬다. ‘절제되고 깔끔하고 젠틀한. 맑은 정화수 같은데 거기에 한 번의 작은 파장이 일어나면 그릇 안의 물 전체를 뒤흔들어놓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정의 디테일이 훌륭한 연기.’ 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때 그 표정을 봐서 아는데, 그건 같이 작업한 동료 배우를 한껏 띄워주기 위한 매너가 아니었다. 경이로움에 가까운 감탄이자 분석이었다. 아직도 명쾌하지 않은 듯 계속되던 곽도원의 분석에 ‘이병헌 배우의 연기를 보면 말끔하고 세련된 슈트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죠’라고 반응하자,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그거! 세련미!’라고 시원해했다.

이병헌은 <내부자들>에 이어 다시 우민호 감독과 작업했다. 독하고 살벌한 현실을 어느 집단의 내부 깊숙이 들어가 보여준다 는 점에서, <남산의 부장들> 개봉을 앞두고도 감독의 전작이 어른거리기 쉽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히 다른 톤이다. “정치인 과 정치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저는 <남산의 부장들>이 정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이념에 치우친 입장을 가진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영화에 가장 매력을 느낀 요소는 사람의 심리와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이었어요. 카메라를 그들의 공간에 툭 떨어뜨려놓고 바짝 줌을 당겨서 바라보는 느낌. 그래서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누아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아르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감정이죠.” 언젠가 김지운 감독은 이병헌이 폭력적인 영화조차 멜로 드라마틱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흔들릴 때, 파멸해 갈 때, 어딘가에 시선을 줄 때, 찰나의 표정에도 섬세한 뉘앙스를 담아낼 줄 아는 배우라서다.

이병헌이 맡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라는 인물을 관통하고 있는 감정은 ‘충성심’이다. 요즘 시대에 멸종된 그 클래식한 가치 말이다. 직장 상사와 후배라는 수직적 관계, 친구나 가족 같은 수평적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중요한 관계에서 충정이야말로 참된 도리와 의리라고 말한 다면 너무 촌스러울까? 나에겐 반가운 그 가치가, <남산의 부장들>이 조명하는 시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극적 결말에 불 을 붙이는 기름으로 작용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날의 총성 에는 권력자들의 ‘충성심 배틀’이 난무했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 개봉한 <백두산>의 이중첩자 리준평이야 재난이 닥치는 상상을 바탕으로 감정의 수위를 조절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 다.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저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견을 함부로 적용할 수가 없어요. 자칫 왜곡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힘든 작품이기도 했어요.”

탁월한 배우가 탁월한 연기를 해내면, 관객의 눈에는 그 매끈한 결과만이 보인다. 우리 앞에 고스란히 던져진 건 배우의 사정과 과정이 생략된 작품 속 인물이다. 그러니까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모든 연기가 수월해 보이기만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란 힘든 것 같아요. 저에 대해 좋은 반응이 있으면 물론 기분이 좋지만, 어디까지가, 얼마나 진실인지 저로서는 알기 힘듭니다. 오랜 시간 연기했으니 이제 웬만한 연기는 뚝딱 하겠다는 시선도 있을 테죠. 하지만 저는 아직도 매번 고민해요. 이번 산은 또 어떻게 넘어가나…” 그는 배 우가 가져야 할 성질을 언급하며 ‘말랑말랑함’이라는 말을 썼다. 특히 곽도원처럼 매 테이크마다 다른 방식으로 변주 하는 상대를 만날 때면, 그 자신이 말랑말랑한 스펀지 같아야 상대를 흡수할 수 있는 법이다. “자기가 할 것을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준비해 나갔다가는 상대 배우의 시도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일 수가 없죠. 상대가 어떤 감정을 툭 보여줄 때 그걸 고스란히 받아서 리액션할 수 있어야 진정한 호흡이 일어납니다.”

치밀하게 관리된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간다고 여긴 배우 이병헌의 세계는 사실 무계획의 결과라고 한다. 초대형 예산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매그니피센트 7>을 찍고 나서 바로 저예산 한국 영화 <싱글라이더>를 찍는 식의 행보에는 그저 ‘이야기의 재미’라는 극히 주관적 감상이 크게 작용한다고. 처음 <지. 아이. 조>를 찍으러 미국에 가서 막상 스톰 섀도의 룩(게임 캐릭터가 입을 법한 올 화이트 룩에 눈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마스크까지)을 입은 낯선 자기 모습을 봤을 때는 ‘이 선택이 과연 맞나’ 싶어 잠을 못 잔 일화도 있다. “저에겐 대단한 포부나 목표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할리우드 활동으로 쌓은 명성의 의미를 묻는다면, ‘다른 경험’을 해봤다는 의미 정도를 들 수 있겠죠. 제가 모험심은 강하거든요. 새롭고 낯선 기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살면서 좀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이들한테서 ‘형, 이런 성격이었구나. 그런데 이미지는 아주 다른 거 알죠?’ 같은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별 반응도 안 합니다(웃음).”

실제의 그와 배우인 그가 자아내는 느낌의 온도 차.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 모양이었다. “저는 선생님들한테 연기와 자세를 배운 세대잖아요. 그게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죠. 그 시절 대선배님들은 이런 말을 하셨어요. ‘배우란 말이야, 집 앞 구멍가게에 나갈 때도 차려입고, 구두 신고 나가야 되는 사람이야. 방송 카메라를 보고 인터뷰할 때는 그게 전 국민을 상대로 말하는 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해.’ 지금 마인드로는 참 낯설죠(웃음). 한마디로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처럼 어떤 태도가 잡혀 있거나 다소 가식적인 사람의 이미지가 쌓였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딱히 고치거나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그의 몸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밴 태도가 멋과 아우라에 관한 문제라면, 그는 연기할 때의 자아란 말랑말랑한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안다.

이병헌 배우가 착용한 줄무늬 재킷은 Man on the Boon 제품.

이희준 배우가 착용한 레오퍼드 패턴 코트는 Dior Men, 화이트 팬츠는 Joosooloo 제품. 검정 터틀넥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희준 배우가 착용한 꽃무늬 셔츠와 팬츠는 Etro, 손목시계는 Omega by Be-antique 제품.

곽도원
지독하게 관찰하는 남자

저에게 연기는 철저한 계산의 문제입니다. 감성과 감정을 위해서 이성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감성이라는 밀가루 반죽을 이성이라는 투명한 랩으로 싸놓은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이성을 누르고 비틀며 조절할 때마다 감성의 형태가 달라지죠. 관객의 눈에는 바로 그 형태만이 보이게 됩니다.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라는 인물이 가진 가장 강렬한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을 거예요. 권력을 휘두르는 입장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밀려나 도망자 신세가 된 사람이죠.”

스크린 속 곽도원이 처음 제대로 눈에 보이던 때. 그 시간을 쉽게 잊을 수는 없다. 한 아파트에서 언젠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봤을 것만 같은 양복 입은 아저씨의 얼굴, 거기 에 얼굴의 절반은 차지하는 금테 안경을 쓰고서 그는 충무로의 아이콘 중 하나인 최민식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권력 의 정점에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범죄와의 전쟁> 속 악질 검사는 관객에게 낯선 배우인 곽도원이었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그저 넉넉한 사람쯤으로 보이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던 그의 몸집은 온몸에 폭력을 실은 육중함과 권위로 다가왔다. 나중에야 곽도원이 <황해>에서 하정우가 ‘엄지 손가락’을 증거물로 챙겨야 했던 청부 살인 대상자였다는 걸 인지했지만, 곽도원이 이제 감독들의 부름을 받을 일만 남았다는 건 <범죄와의 전쟁>을 보는 도중부터 알 수가 있었다. 이후 그는 <곡성>과 <아수라>라는 두 지옥도를 거쳤다. <강철비>에서는 북한, 핵전쟁, 외교전 등 가볍지 않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동갑내기 배우 정우성과 브로맨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범죄와의 전쟁>을 준비하며 법원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70대 노인이 판사가 형을 확정 짓자 억울했는지 ‘참 나’ 볼멘소리를 뱉으며 돌아섰죠. 그러니까 젊은 판사가 다시 오라고 불러 세워요. ‘차려, 열중 쉬어, 차려’ 하더니 벌금을 확 올려 부르는 겁니다. 굳은 표정의 할아버지가 ‘감사합니다’ 인사하더니 군인처럼 각 잡힌 걸음으로 퇴장하더군요. 그 순간 판사의 표정을 봤어요. 안하무인이란 게 뭔지,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건 뭔지를 보여주는 표정이었죠.” 어떤 배우들은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하기 위해 그 캐릭터에 관한 결정적인 한 컷을 필요로 한다. 열쇠가 되는 그 이미지로부터 단서를 얻어 표현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변호인>의 차동영 경감을 준비할 때, 곽도원은 그 실존 인물이 법원에서 계단을 내려오던 장면이 담긴 영상을 찾아 봤다. 군중 속 누군가 공안정국의 앞잡이였던 그에게 ‘사죄 할 생각이 없냐’고 묻자 그가 힐끗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자기 갈 길을 가던 순간. 그 ‘힐끗 쳐다보던 눈빛’이 곽도원에게 ‘결정적 한 컷’이었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곽도원이 맡은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들이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교체되곤 할 때 무려 6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무한 신임을 받던 그가 순식간에 밀려나 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잔인하게 굴던 자는 자기 처지가 달라졌을 때 어떤 최후를 맞을지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했던 방식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테니. “연기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실존했던 인물,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을 연기할 때는 엄연히 있었던 사실에서 가감이 과하면 안 된다는 부담이 크거든요.” 많지 않은 자료 속에서 곽도원은 배역의 모델이 된 그 인물이 미국에서 청문회를 할 때의 사진을 발견했다. “미국 의원들을 모아놓고 한국 정치계의 내부 고발자를 자처하는 그 긴장된 자리에서, 이 사람을 설명해 줄 만한 한 모습을 봤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어떤 자세였죠. 대체 어떤 사람이면 청문회에서 그런 자세로 앉아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할 때 그 자세를 취했을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사소한 동작과 자세도 그에겐 연기의 근거가 되어줬다.

배우의 의무이기도 한 관찰과 통찰에 능한 곽도원은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울음의 정도와 스타일 등을 관찰했다. 그건 의식적으로 관찰했다기보다, 상을 당한 와중에도 ‘황망한 감정과 관찰하는 본능’이 자신도 모르게 투 트랙으로 병행되는 사고 회로에 대한 이야기겠다. “그거, 직업병이죠, 병.” 자기 병세를 털어놓는 그에게,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시간 뒤 영정 사진으로 쓸 데이터를 장례식 장 사진팀에 전달하면서 눈물을 훔치며 ‘얼굴에 노란 끼 좀 빼주시고요…’ 라고 톤 조절을 부탁했던 일화를 고백했다. 병원이나 장례식장 같은 곳은 관찰과 묘사 훈련을 하기에 탁월한 장소다. 특정 상황 속에서 어떤 인물과 장면을 캐치하고, ‘느끼고 있는 나를 느끼는’ 이상한 증상은 약간이라도 예민한 사람 모두에게 일어난다. 다만 배우는 그런 경험 하나하나를 훗날의 디테일을 위하여 축적하는 사람이다. “염을 하는데, 사람이 울 때 ‘꺽, 꺽’ 하는 소리가 이렇게 나는구나 느끼고 있더라고요. ‘언젠가 써먹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러나 아주 미치겠는 거지 (웃음).”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그는 동생 역으로 나온 황정민이 죽자, “저 새끼 이제 형한테 절까지 하라 그러네”라고 했다. 그 멘트는 곽도원의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 절을 올리기 전에 뱉은 말이다. ‘이제 서방한테 절까지 하라 그러네.’ “촬영 현장에서 이런 대사 한번 넣어보면 어떨지 감독님에게 부탁했죠. 영화를 보던 우리 가족은 그 말을 알았을 거예요.”

곽도원에게 ‘질투심을 일으키는 배우가 있나’ 묻자, 그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고 들어왔다. ‘연기란 무엇인가’를 논하던 때만큼이나 고뇌와 놀라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소주를 마신 뒤 ‘캬’ 하고 의성어를 뱉는 느낌으로. “병헌이 형. 그 형은 최고인 것 같아요.” 곽도원이 이병헌을 ‘형’이라고 부른다는 놀라움을 느낄 새도 없이, 긴 묘사가 이어졌다. “공간을 장악해야 해요, 배우는. 우리는 공간을 채운 공기가 뜨거우면 옷을 벗고, 공기가 차가우면 옷을 꽁꽁 싸매죠. 보이지도 않는 공기라는 것의 온도에 따라서 사람들이 반응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기운이 한 공간을 장악하는 거죠. 병헌이 형이 그렇게 장악력이 있더라고요. 내가 아는 이병헌은 없고 그냥 영화 캐릭터가 눈앞에 있더라고요. 와…” 이병헌을 향한 곽도원의 놀라움은 다양한 표정과 감탄사로 전달되었다.

“극단 생활하던 어릴 때, ‘광대’의 한자가 ‘미칠 광’에 ‘큰 대’ 자인 줄만 알았어요. 무대에서 미쳐 날뛰기도 하는, 미친 척하며 창의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들이 광대라고 생각했죠.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넓을 광’에 ‘큰 대’를 쓰더군요. 신기했죠. 그 수백 년 전에, 가장 하층 계급에게 어쩌면 그런 의미가 주어졌을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마저 넓게 감싸고 그들에게 웃음을 주는 광대, 자기로 인해 남이 행복하면 그게 곧 자기의 행복인 존재가 배우인 거죠. 그러려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게 배우의 일일 겁니다.” 고2 때 교회 누나를 따라갔다가 본 연극에 반해 스무 살부터 극단 생활을 한 그는 막노동을 할 때도 미래에 불안함을 가진 기억이 없다.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을 거치면 자연히 배우가 되는 거라는 천진한 생각으로 나이 들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무 살 때 꿨던 꿈은 이미 다 이뤘어요. 영화 시상식 무대에 서는 것, 해외 영화제에 나가는 것, 우리나라의 훌륭한 선배들과 같이 작품 하는 것 모두 다 해봤죠. 너무나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이제 새로운 꿈을 설정해가려 합니다.”

이병헌 배우가 착용한 줄무늬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팬츠는 Man on the Boon, 터틀넥 톱은 Lanvin 제품. 이희준 배우가 착용한 검정 재킷은 Berluti, 터틀넥 톱은 Cos 제품.

곽도원 배우가 착용한 안경은 Retina, 손목시계는 Rolex by Be-antique 제품. 검정 실크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병헌 배우가 착용한 화이트 윙 칼라의 턱시도 셔츠는 Alexander McQueen by Mue 제품.

이희준
물음표를 단 남자

예전에는 연기할 때 표현 방법과 테크닉 위주로 많이 생각했어요. 이제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작은 질문들을 통해 누군가를 알아가고 공감해가는 것에서 이 일이 참 재밌다고 느껴요. 제가 시나리오를 단숨에 쭉 읽는 편이 아닌데 <남산의 부장들> 시나리오는 한 번에 읽었어요. 제가 맡은 경호실장 곽상천을 비롯해 등장인물들 사이의 긴장감 때문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죠. 갈증마저 느껴서, 다 읽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어요.”

요즘 대통령 경호처에서 경호 업무를 맡는 직군은 특정직 7급 공무원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다. ‘경호실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차가운 듬직함이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앞과 옆이 아닌 뒤에 머무는 좌표로, 주연이기보다 숨은 인물로 정의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호위무사’라는 말에는 액션의 이미지가 부각된 클래식한 멋이 있다. ‘보디가드’는 어떨까? 왠지 모르게 장르가 로맨스로 전환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들에 대해서라면 일개 시민은 이렇게 고정관념과 짐작을 통한 상상만 하기 쉬울 뿐이다. 그 세계 밖의 사람들에게는 수면 아래 머물러 있는 존재가 바로 경호실장이다. 그런데 일개 시민도 알 만한 유명한 경호실장이 한국 근현대사에 있다. 19791026일,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 드라마틱한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 그때 그 시절의 경호 실장은 알면 알수록 어마어마한 캐릭터다.

이희준은 <남산의 부장들> 촬영 현장에 모두가 알던 이희준과 다른 풍채로 나타났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먹고 싶은 걸 죄책감 없이 마구 먹었죠. 매일 밤 치킨과 맥주와 함께 했습니다.” 3개월 동안 그는 25kg을 불렸다. 대통령 경호 실장 곽상천이 되기 위해서다. 군인이 아니라 전직 유도 선수 출신이 아닐까 싶은 그 육체는 말랑말랑한 살만이 아닌,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이 가세한 결과다. 곽상천은 ‘차가운 듬직함’ 같은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다. 그는 충성심으로 뜨거운 인물이다. 청와대 안보를 위해서라면 심야의 도심에서 탱크를 운행해도 좋다고 여기는 공포 경호를 펼친다. 그는 대체 무엇을, 누구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사람인가? “각하가 국가야. 국가 지키는 게 내 일이고.” 충성 경쟁 속에서 자꾸만 부딪치는 중앙정보부장(이병헌)에게 그가 던지는 말이다.

이희준이 작품을 준비할 때 잘하는 일 중 하나는 거울을 보면서 그 캐릭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뭘까 찾는 일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른 것도 아닌 두려움의 감정을 파고든다는 이희준 식 탐구가 탁월하다고 느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로버트 드 니로가 감독한 <굿 셰퍼드>라는 영화다. 거기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 거로 기억한다. 누군가를 효과적으로 고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약점이 뭔지만 알면 된다고. 곽상천이라는 인물이, 그 모델이 된 다른 이름의 실존했던 인물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워한 게 뭐였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각하가 지배하는 공고한 체계와 그가 믿는 신념이 무너지는 걸 두려워했을까?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게 제일 두려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확신에 찬 듯한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남산의 부장들>을 위해 자료 조사와 생각을 거듭하며 이희준에게는 끊임없는 궁금증이 붙어 다녔다. 바로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표다. “이 사람은 뭘 믿고 있는 걸까? 이 대사는 대체 어떤 신념을 가지고 한 말일까? 그들은 그런 결과가 초래될 거라는 예상을 전혀 못했겠지? 이런 물음이 계속됐어요. 791026일에 일어난 일은 엄연한 팩트니까, 그 일의 결과라는 팩트를 가지고 나머지는 상상해보는 거죠. 영화이기 때문에 픽션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제가 총을 맞고 기어가는 거리나 제스처까지 사료를 기반으로 구성했어요.” 나라를 위래 한다고 한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는지, 한 시기의 역사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경험은 이희준 개인의 삶에도 의미 있는 파동을 남겼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것들이 과연 다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기는 이렇게 해야 해, 남편은 이래야 해, 삶은 이래야 해… 옳다고 여긴 것들이 정말 옳은가, 혹은 옳고 그름이란 게 아예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호기심 많은 소년처럼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현상은 바로 전 작품인 <미쓰백>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습관이다. 대구에서 극단 생활을 할 때부터 20년간 연기를 해온 그는 배우 인생에 새로운 챕터를 열어준 작품으로 <미쓰백>을 꼽았다. “예전에는 표현 방법과 테크닉 위주로 고민했어요. 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죠. <미쓰백>을 만나면서부터 ‘어떻게’는 제쳐두고 ‘왜’를 먼저 생각하게 됐어요. 한지민 배우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지, 그녀를 도와주고 지키려는 남자였죠. 현실에 그 남자가 있다면 붙잡고서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여자를 지켜주려 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어요. 끊임없이 ‘왜’를 묻는 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는 이제 인물과 이야기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을 품게 됐다.

<남산의 부장들> 촬영 현장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깨우치는 곳이었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과 한데 섞여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자극이며 행운이다. 검투사들의 싸움터라면, 자신도 거기서 칼을 꺼내 들 수 있다는 게 신이 나는. “배우를 한다는 건 내가 몰랐던 세상의 사람들에게 공감해가는 일이기도 해요. 그래서 참 재밌는 일이죠. <해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선원들의 삶이 어떨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여수의 모텔에 묵으며 생활했어요. 매일 아침 어시장에 가보고, 선원들과 술 마시며 이것저것 질문하고. 제가 사람들 인터뷰하는 걸 좋아합니다(웃음). 대구에서 서울에 올라와 오랫동안 반지하에 살던 시절에도 같은 다세대 주택 아저씨들과 막걸리 마시며 친하게 지냈죠. 그 기억이 드라마 <유나의 거리>를 할 때 비슷한 느낌으로 재현 됐어요. 사람에 흥미를 가지고 공감해가는 과정이 참 좋아요 저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과 상상으로 상당히 바쁘다고 한다. 생각과 상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물론 ‘궁금증’이다. 그는 시나리오 를 보면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면 되겠다’ 식으로 답이 나오는 유형이 아니다. 자신도 자신이 뭘 할지 모르는, 그래서 앞으로의 자기 연기가 궁금하다는 사람이다. “내 스스로가 궁금하지 않고 기대되지 않는 순간, 이 일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질 거예요.”

이병한 배우가 착용한 검정 벨벳 트렌치코트는 Kimseoryong Homme, 검정 니트 톱은 Ralph Lauren, 검정 팬츠는 PT 01, 첼시 부츠는 Carmina by Unipair 제품.

패션 에디터
박연경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김영준
스타일리스트
이혜영(이병헌), 박선용(이희준, 곽도원)
헤어
공탄(이병헌), 재경(이희준, 곽도원)
메이크업
정남(이병헌, 이희준, 곽도원)
세트
유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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