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권철화의 새 전시 <바디랭귀지: 회화의 즐거움>이 11월 2일부터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열린다. 아티스트라는 말이 점점 더 넓어지는 지금이지만 권철화에게는, 화가라는 조금 고집스럽고 고전적인 단어가 어울린다.
<W Korea>작업실에서 그림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니 어떤 컬러를 잘 사용하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권철화 어릴 때부터 컬러가 무척 중요했다. 좋아하는 색의 취향이 뚜렷했고. 예전에는 스페인 영화 포스터 같은 강렬한 색을 좋아했다면 점점 차분한 색감을 주로 쓰게 되는 것 같다.
거꾸로 손이 잘 가지 않는 색도 있나? 밝은 그린. 진한 암녹색은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우울한 성향이 있는 사람이고, 그림을 그릴 때도 그런 감정 상태일 때가 많은데 초록은 나에게 너무 경쾌한 느낌이다.
듣고 보니 이 방 안에서 밝은 초록색은 물티슈 패키지뿐 인 것 같다. 이번 전시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전시 제목은 <바디랭귀지>로 지난해와 같다. 거기에 ‘회화의 즐거움’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지난 전시를 끝내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단순해진 것 같다. 이걸 왜 하는가, 본질적인 질문을 파고들면 결국 내가 그림 그릴 때 즐겁기 때문이다. 남의 평가나 시선을 의식한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거기서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 물론 그림 자체는 즐거워 보이지 않겠지만, 그 행위에 대해서만은.
좋아하는 일에서도 괴로운 부분은 있지 않나. 회화의 즐거움 말고, 그림 그리기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면은 어떤 것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일 때 그림이 잘 그려진다. 부정적인 감정에 기댄다는 게 좋지 않게 느껴져서 치우치지 말자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결국 그리는 과정에서 또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균형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인가 보다. 스튜디오 콘크리트의 창작 동료들과의 여러 프로젝트, 그리고 개인 회화 작업이 당신에게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편인가?
그렇다. 콘크리트로서는 사회적인 이슈나 시대의 흐름, 메시지 같은 것을 두고 같이 토론하고 반영하지만 그림에는 투영하게 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개인적인 동력으로 움직 일 때 뭔가를 더 잘해내는 사람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시스템 옴므와 진행한 협업 제품이 요즘 종종 눈에 띄던데.
이미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브랜드에서, 아직 더 성장해야 할 작가인 나에게 협업을 제안해줬다는 게 고마웠다. 나 역시 패션 쪽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존중받으며 수월하게 일했고, 결과도 좋아서 만족스러운 프로젝트였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로 패션 브랜드의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내 그림을 직접 옷에 녹인 건 시스템 옴므가 처음이라 나에게도 의미 있었다.
지난 여름에는 루이 비통 쇼에서 모습이 포착된 스트리트 사진도 봤다.
루이 비통 본사의 초대로 파리에 가서 남성 컬렉션을 참관했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뜻밖의 제안이긴 했지만 나를 알리기 위해 참여한 행사였고, 이런 일 또한 작가에게도 좋은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림으로만 봐주지 않고, 모델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사람은 없나?
모델 시절 오래 활동은 안 했기 때문에 크게 작용하진 않는 것 같다. 스스로 내 이력을 적당히 농담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고.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이거나 아니거나 늘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믿는 부분이 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나?
아주 어릴 때부터 계속 그렸고 입시 미술 수업을 받았지만 미대에는 성적이 모자라서 못 갔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다가 중퇴했고. 석고 소묘를 그때 배운 게 그림의 기술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개인 작업은 한 번도 쉬지 않고 해왔는데 그게 나에게는 삶의 낙이었던 거 같다. 센 취미 쯤으로 여겼다. 너무 좋아하니까 업으로는 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확고했고. 그러다가 이렇게 됐지만.
오일 파스텔, 콩테 스케치 위에 아크릴 물감, 마커 드로잉 등의 매체를 사용한다. 각각의 포맷마다 다른 내용이 담길 것 같다.
종이인지 캔버스인지, 붓을 쓰는지 손으로 하는지 등 매체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마커 드로잉은 선이 줄 수 있는 유연한 느낌에 치중하는 편으로 주로 자연스러운 보디라인을 그릴 때 활용한다. 종이에는 추상적인 그림을 위한 스케치를 주로 많이 하고, 캔버스 앞에서는 터치 하나하나에 좀 더 감정을 싣는다.
요즘의 현대미술은 콘셉트와 아이디어 위주로 나아가는 추세다. 고전적인 의미의 회화 작가 가운데 젊은 사람을 만나는 게 점점 드문 일이 되다 보니 신선하다.
내가 너무 옛날 방식에 머물러 있는 건가 고민도 해봤지만 무엇보다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잘 맞는 방식에 집중했다. 그 안에서 계속 실험을 해나가고 있고. 이를테면 요즘은 붓을 쓰지 않고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짠 다음 물티슈로 손가락을 감싸 그리는 걸 해보는데 나와 잘 맞는다. 오일 파스텔도 손끝으로 펼치는 식으로 그려가기 때문에 좋아한다. 새로운 방식이나 도구에 대한 탐색도 시도하지만, 나에게는 내 손끝에서 나와야 내 그림이라는 개념이 강력하게 박혀 있는 것 같다.
아예 캔버스를 벗어난 다른 시도도 해보나?
이번에 다른 작가와 협업할 기회가 생겨 조각을 시도해봤다. 10월 20일부터 대전에서 열리는 <에너지 스테이션 01> 전시다. 김형중 작가라는 미디어 아티스트인데 이분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내 그림과 접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조각으로 방향을 잡아봤다. 그동안 해온 2D와 다른 과정의 재미가 있었다. FRP 소재의 두상으로 완성했는데, 다음부터는 내 개인전에 조각 작업도 다수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나? 어떤 그림이 떠오르나?
이번 파리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보며 울컥했다. 전시를 보면서 눈물이 난 건 처음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림 그리는 사람의 생애를 봤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거기에 있었다. 그 생애, 탁월한 기술, 뚜렷한 성취, 쉬지 않고 새로움을 채워나가는 현재까지. 인생의 그런 시기까지 ‘즐거운 회화’를 해나갈 수 있다면 행운일 것 같다.
작업실 곳곳에 냉장고 사진들이 붙어 있는데, 저건 뭔가?
스케치를 위한 자료다. 가구들이 빌트인으로 매립된 집을 다니다 보면 냉장고가 설치되어 있는데 대개 약간 튀어나오거나 모자라거나 한다. 매끈한 붙박이가 못 되고 삐져나와 치일 때가 있는. 그게 나 같아서 그려보고 있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이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