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펼쳐진 2017/18 울마크 프라이즈의 아시아 지역 대회 우승자가 발표되었다. 그 명예의 전당에 오른 디자이너는 바로 한국의 카이(Kye)를 이끄는 계한희와 홍콩의 식스리(SixLee). 그 둘이 들려주는 울의, 울에 의한 패션 도전기.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 및 후원하기 위해 1954년에 울마크 컴퍼니에서 시작한 울마크 프라이즈. 이 유서 깊은 패션 어워드가 추구하는 중요한 덕목은 울의 다양한 용도와 현대적 면모다. 그렇다면 울로 무얼 만들 수 있을까. 보다 신선하게, 보다 실용적으로. 이 질문은 울마크 프라이즈에 도전한 모든 디자이너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숙제이자 화두였다. 지난 7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2017/18 울마크 프라이즈 아시아 대회의 여성복 부문과 남성복 부문에서 각각 우승한 한국의 카이와 홍콩의 식스리에게도 그러했을 테고. 하지만 그 둘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우승자로 선정된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노마딕 젠틀맨’이라는 주제로 흥미로운 테일러드 레이어링의 남성복을 제시한 식스리는 메리노 울이 사계절용으로 적합한 소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번 컬렉션을 위해1950년대 남성 속옷과 케냐 마사이족의 전통 의상에 쓰인 타탄체크를 두루 리서치했다. 특히 체크무늬 천을 레이어링해서 몸을 덮는 아프리카 전통 의상의 특징에서 영감을 받아, 울의 기능성을 살린 사계절 착용이 가능한 언더웨어와 아우터를 선보였다. 한편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명한 핑크색을 사용한 카이는 전통적인 울 소재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는 강렬한 스트리트 무드의 룩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아가 친환경적인 워싱과 러프한 프린지 디테일로 섬세한 손맛을 더하기도. 울에 대한 그들의 도전적인 해석은 이토록 흥미롭다. 패션이 지닌 원천, 즉 창의성과 시대 정신에 맞닿은 열정이야말로 ‘울 이상의 울’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명민한 패션 실험을 통한 울의 영역 확장은 이 자리에 모인 신진 디자이너들의 성장만큼이나 가치 있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이어질 다음 도전을 오매불망 기대하고 싶을 정도로.
울마크 프라이즈 남성복 우승자인 디자이너 식스리(SixLee)와 나눈 인터뷰
<WKorea> 더블유 독자들을 위해 당신의 브랜드를 소개해달라.
식스리 홍콩 출신 디자이너로 벨기에의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2011년 남성복 브랜드인 식스리를 론칭해 이끌고 있다. 테일러링과 같은 고전적인 요소를 모던하게 재해석하는 것이 식스리의 아이덴티티다. 고전적인 실루엣에 레이어드 스타일을 접목하거나 실용적인 요소를 더해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이번 수상의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울 소재를 이용해 언더웨어를 개발한 혁신적인 면이 어필한 것 같다. 그리고 남성복의 전통적인 테일러링 기법에 모던한 요소를 대입해서 동시대적인 룩을 만들어낸 것도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모던하게 트위스트된 독창적인 디테일과 레이어링 등 트렌디한 요소가 눈에 띄었다. 이번 울마크 프라이즈를 준비하며 가장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울 소재 자체에 집중했다. 이전의 식스리 컬렉션에서도 울 소재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번엔 좀 더 실용적인 방식에 초점을 두고 디자인했다. 일례로 울 소재에 방수 기능을 더한 재킷 같은 것. 보통 방수 기능을 위해선 원단에 코팅을 입히는데, 코팅 없이도 방수 효과를 주는 울을 개발해 딱딱하지 않고 울의 살아 있는 촉감을 부드럽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리고 제2의 피부처럼 느껴질 수 있는 울 소재의 언더웨어도 개발했다. 무엇보다 메리노 울을 사용해 봄과 여름에는 통기성을, 가을과 겨울에는 보온성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도록 했다.
고급스러운 울 소재는 일반적으로 다가가기 힘든 요소가 있다. 어떻게 울 소재의 단점을 극복했나?
이태리 울 공장들을 직접 방문해서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 많은 종류의 울을 일일이 비교하며 살펴본다. 그중에서도 합리적인 가격대의 마음에 드는 울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내년 1월에 피렌체 피티워모에서 선보일 울마크 프라이즈 컬렉션의 다른 의상도 기대된다.
본선에서는 이번에 선보인 룩을 베이스로 실용적인 콘셉트를 발전시킬 예정이다. 울의 직조를 좀 더 얇게 해서 보다 가볍게 하고, 화재 예방 같은 내염성을 갖추는 방법 등을 고민 중이다.
1954년 개최된 제1회 울마크 프라이즈는 위베르 드 지방시와 피에르 발맹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칼 라거펠트와 이브 생 로랑에게 패션 디자인상을 수여했다. 현대 패션의 아이코닉한 인물을 발굴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앞으로도 수상자들의 비전이 기대되는 상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먼 훗날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은가?
글쎄,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남성복 영역에 있어서 자기 목소리를 지닌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것이다.
울마크 프라이즈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덕분에 아이디어도 얻고 서울에도 오고 반가운 얼굴의 디자이너들도 만났다. 또 꼽자면 울을 통해 좀 더 체계적이고 현실적으로 시장성을 고려한 컬렉션을 기획했다는 점이랄까.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과 시장성 사이에서 그 접점을 더 고민하고 배운 기회였다.
울마크 프라이즈 여성복 우승자인 카이의 디자이너 계한희와 나눈 인터뷰
<WKorea> 축하한다. 당신이 우승자로 뽑힌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계한희 사실 스트리트를 기반으로 캐주얼한 컬렉션을 전개하는 브랜드 카이에게 고급스러운 울 소재는 자주 쓰이는 소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이번 울마크 프라이즈에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번 기회에 울이 갖고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뛰어넘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두운 색상 위주로만 떠올리게 되는 울 소재에 밝은 색상을 대입해보았다. 특히 “왜 울을 덜 입을까”에 대한 고민 끝에 화사한 핑크 색상과 프린지 디테일, 그리고 데님에서 많이 쓰는 워싱 기법 등을 시도했다. 보통 이러한 색감은 약품을 써서 기계로 만들어내지만, 이번에는 천연 섬유인 울 소재에 착안해 직접 내 손으로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냈다.
가만히 살펴보면 섬세한 디테일에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느껴진다.
얼핏 보기에는 스트리트 무드가 강하지만 곳곳에 오트 쿠튀르적 터치를 더했다. 어젯밤까지도 프린지 디테일을 위해 옷감을 뜯어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보기보다 시간을 많이 투여해 완성한 룩이다. 사실 울마크 프라이즈에서 아티스틱한 작품보다는 실제 판매로 이어지는 시장성 있는 룩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아가 글로벌 대회에서 우승하면 국내의 분더샵, 해외의 하비 니콜스와 레클레어 같은 유명 편집숍을 비롯해 마이테레사닷컴 같은 온라인 매장에서도 이 컬렉션을 판매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한 작품보다는 누구나 입고 싶어 하는 룩을 만들고자 애썼다.
‘입고 싶은 옷’이라는 가치에는 디자인 요소뿐만 아니라 울 특유의 매력적인 촉감도 한몫했을 것 같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기법은 거칠지만 고급스러운 울을 사용했기에 면과는 또 다른 포근함과 부드러움이 원단에서 느껴진다. 항상 판매에 있어서 생산 단가가 문제지만 이번에는 대회 취지에 맞춰 울 소재를 대부분 사용했다. 80퍼센트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이번 대회의 기준을 넘어 거의 95퍼센트 이상 썼다.
2014년에는 LVMH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5년엔 SFDF의 우승자로 뽑혔다. 그때의 경험과 비교해 이번 울마크 프라이즈가 특별하게 다가온 점이 있다면? 또 이번 대회를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인가?
소재를 울로 한정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도전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제한된 질문 안에서 무궁무진한 답을 찾는 느낌이었달까. 이번 대회가 아니었다면 울이라는 소재로 이토록 다양한 실험을 해볼 기회가 있었을까. 사실 끊임없이 리서치하고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집에서건 회사에서건 계속 울 소재를 연구했다.
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제일 큰 발견은 무엇이었나?
원래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처럼 표현되는 시스루 울을 꿈꿨다. 하지만 실패했다. 남들이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 울을 80퍼센트 이상 사용해서는 절대 그러한 텍스처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스트리트 무드를 곁들여 데님 형태의 울을 개발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워낙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데, 카이의 다음 도전이 기대된다.
아직 이 도전이 끝나지 않았다. 내년 1월에 피렌체에서 열리는 피티워모 기간의 본선을 위해 다섯 벌을 더 만들어야 한다. 또 가을에 선보일 협업 프로젝트도 있고. 서울 패션위크뿐만 아니라 한국패션협회의 지원을 통해 준비 중인 파리 컬렉션 이벤트도 있다.
요즘 베틀로 직조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고 들었다.
원래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해서 어깨가 빠질 정도로 배우고 있다. 사실 카이의 모든 그래픽 작업을 직접 하는데 로고에 손이 들어가는 이유도 핸드메이드에 관심이 높아서다. 대량 생산은 못하겠지만 아트 패션을 하고 싶던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즈음에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선 아마도 지금부터 30년 정도는열심히 배우고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신진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떼고 패션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카이스러움’을 정립한 것 같다.
하지만 늘 위기라고 생각하며 일한다. 오늘 상을 받았지만 늘 다음의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니까. 좋은 컬렉션을 선보이면 이어서 판매 역시 잘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난 그저 옷을 만들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할 뿐인데 경영을 해야 하고 회사도 꾸려가야 한다. 더구나 요즘은 모든 변화가 온라인을 기반으로 빠르게 이뤄지고 유통 채널도 다채롭다. 디자이너의 수명 역시 갈수록 짧아지고 말이다. 이런 부분이 늘 고민이지만 원래 심하게 좋은 면을 바라보고 담담한 성격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 본인이 가장 열망하는 것은?
그저 다 같이 잘되었으면 한다. 브랜드가 잘되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행복하고… 추상적이지만 그게 다인 것 같다.
- 에디터
- 박연경
- 포토그래퍼
- YOON SANG M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