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속의 머나먼 존재, 만인의 연인인 스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일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감정일까?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경험이기도 하다. 진짜 힘이 센 사랑이 그러하듯.
인지의미론을 공부한 이래 나는 “사랑에 빠진다”는 개념 은유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영어로는 Falling in love, 사랑 속으로 떨어진다. 사랑은 거대한 바다처럼 우리를 감싸는데, 그에 진입하는 과정은 거대한 중력이 나를 끌어당기듯 쑥 낙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경험으로 더 가까운 사랑의 은유는 작은 씨앗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모호한 호감이 있는데 상대가 물을 주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빠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안다. 딱히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느샌가 늘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그가 웃을 땐 즐겁게 귀여워서 내 마음이 조명 백 개를 켠 듯 환해지고, 눈물을 글썽거릴 때는 애틋하게 귀여워서 내 마음 한쪽을 도려내듯 아파지는 것. 다만 당황스러운 것은 이런 감정을 알려준 이가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TV 속 아이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빠질 줄 몰랐다. 평범하게 TV를 보다가, 아이돌 그룹을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한 참가자가 귀엽네, 생각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정신을 차리니 내 컴퓨터와 전화기에는 나 자신보다 그의 사진이 더 많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반복을 싫어하는데, 예의 프로그램을 본방 포함 예닐곱 번씩 시청했다. 마지막 생방송에는 한밤에 서울에서 인천까지 갔다. 모두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실로 나보다 더 당황한 이들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 M은 다른 친구 K에게서 내가 아이돌에게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M이 “걔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라고 했더니 K가 고개를 내저으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만은 사정이 달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나조차 그런줄 알았는데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친구 J가 농담처럼 “네가 다음에 어떤 남자를 만나면, 그렇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종일 생각하는지 두고 볼 거야”라고 말하자, 나는 정색하며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인생 첫사랑일걸”이라고 대꾸했다. 이만큼 확신이 드는 감정을 가진 것조차 오랜만이었다.
나는 줄곧 어떤 아이돌을 꽤 귀여워하는 라이트한 팬이었지만, 집중한 적은 없었다. 팬덤 용어로 머글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열렬한 팬이 되면서 인생과 애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 사람마다 자기 정의가 다르지만, 나는 타인에게 완전히 빠지지 않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판적인 거리를 버리지 못하는 나는 무엇에도 몰입할 수 없는 기질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지금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접어둔 나는 이제껏 보지 못한 내 감정의 일면을 발견하고 말았다. 내가 집중하는 그가 공연 도중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하고 따라오라고 하는 장면에서 집문서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팬들의 농담을, (물론 실제 주지는 않겠지만) 분석하는 머리가 아니라 설레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태도였다. 즉, 나는 남에게 몰입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타인에게 집중하는 능력은 없었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잠재되어 있었다. 일단 내 안에서 애정의 스펙트럼을 발견하자, 사회 전체에 퍼진 50가지 빛깔의 애정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연예인에 대한 몰두, 특히 일정 연령을 넘어서서 어린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심은 사회에서 그다지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한다. 현실과 괴리된 애정이 우리의 생활 감각을 해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만나지 않을 사람을 응원하는 애정이 가능하다면, 거기서 현실적인 연결점을 찾는 것이 더 기괴하다고 느꼈다. 만화나 영화의 주인공에 열광하면서, 개나 고양이에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 그 감정에 너와 나의 연령이나 상황의 조건을 따진다면 이상했을 것과 비슷하다. 연예인에게 느끼는 애정이 연애 감정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감정이 애초에 오로지 이상적 환경에서만 존재한다는 걸 알만큼 현실 감각이 있는 사람은 도리어 비현실적인 조건을 개의할 필요가 없다.
현실에서 먼 이 애정에는 다른 이점도 있었다. 이제는 부정적 감정에 쓸 시간이 없어졌다. 몸이나 마음이 힘들 때 언제든지 얼굴을 보기만 해도 기쁜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었고,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에게 삐딱한 감정이 들어도 그런데 내어줄 마음의 용량이 부족했다. 이 애정은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고리라는 이점도 있었다. 친구들은 처음의 당혹감이 옅어지자, 콘서트 표를 구해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내 얘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며 감정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지금은 내 인생에서 우정이 가장 넘쳐흐르는 시기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비현실적인 애정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깊이 깨닫게 된 사실은 사랑한다는 행위의 또 다른 본질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11년전 <W KOREA>에 비슷한 주제로 “연애를 찬성한다”는 입장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의 요지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에, 그리고 현재에도 나는 연애를 상호관계에 더 집중해서 본다. 감정은 대체로 유동적이라 상대의 행동,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기분이라는 관계적 반응이 사랑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즉, 사랑도 고정적 감정이 아니며 상대가 이런 증거를 보여주면 지속하고, 보여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현실적 연애란 그렇게 상대의 반응에 따라 구축되는 수행적 측면이 강하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몰두하는 관계는 좋아한다는 감정으로만 주로 구성된다. 스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팬의 태도가 달라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일 대 다의 연애는 사고처럼 닥쳐온 애정의 자기 동력으로 유지된다. 나를 모르는, 그리하여 개인화된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는 타인을 깊이 사랑한다는 데는 이제껏 알아온 조건화된 애정의 한계를 넘어 높이 오른다는 느낌이 있다. 물론 스타와 팬의 관계에도 질투와 집착 같은 그늘이 있고, 태양 가까이 날면 곧 곤두박질칠 운명임은 미리 정해져 있으나, 나는 삶에서 이렇게 고양된 감정을 내 안에서 확인한 것 자체가 꽤 벅찼다.
- 에디터
- 황선우
- 글
- 박현주 (번역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