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이미지의 미로, 관능적인 백일몽과 섬뜩한 악몽,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 듀안 마이클스의 카메라는 사진이 담을 수 없는 장면을 실현하고자 한다. 눈 앞의 광경 이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그의 작업 안에서 현실과 환상은 하나가 된다.
“제 경력은 2층의 거실 벽 두 개 사이에서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진가 듀안 마이클스는 수십 년 동안의 아카이브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1층 작업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위적인 환경을 싫어하는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별도의 스튜디오를 가져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촬영은 자택 거실에서 진행한다. 익히 알고 있는 대표작이 탄생한 공간을 직접 밟고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문득, 지금껏 이곳에 다녀간 한국인 인터뷰어가 또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여든셋의 남자는 머릿속을 헤집느라 깊게 주름진 이마를 조금 더 구겼다. “모르겠어요. 늙으면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게 더 많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이곳을 찾은 첫 번째 한국 기자입니다.”
듀안 마이클스와 배우자인 프레드 고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한 때는 1965년이었다. 브란젤리나처럼 파파라치를 몰고 다니지는 않지만 둘도 뉴욕 문화계를 대표하는 커플로 꼽힐 자격이 충분하다. 1960년에 만나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한 연인은 2011년에 마침내 부부가 됐다. 뉴욕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지 며칠 만의 일이었다. 중요한 두 개의 사건, 즉 프레드와의 만남과 맨해튼 타운하우스로의 이사 사이에 듀안 마이클스는 사진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은 사진이란 ‘결정적 순간’의 포착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다. 여러 장의 이미지로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고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까지 덧붙이는 새로운 실험은 불경한 배교 행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순간의 사실적인 묘사는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면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현실보다 환상, 숏보다 시퀀스, 기술보다 감정에 집중하는 그는 스스로를 ‘스토리텔러’로 칭하곤 한다.이미지는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는 이야기를 전달해줄 도구에 가깝다. 다양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주의자에게 ‘사진가’라는 엄격한 분류는 다소 비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8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정력적인 거장은 과거의 전설에만 머무를 생각이 없다. 또 한 권의 초상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얼마 전부터는 영화 작업에도 도전중이다. 얼핏 엿본 작품들은 실험적인 비디오 아트 같거나 <환상특급>의 시적인 에피소드 같았다. “전 평생 모험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여전히 진행형이에요.” 50년 동안 하나의 주소만을 사용한 듀안 마이클스는 비행기 티켓 대신 카메라를 쥔 채 어떤 탐험가보다도 넓고 먼 세계를 여행한다.
수십 명의 어시스턴트를 두고 일하는 사진가도 많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작업을 거의 혼자 도맡는다고 알고 있다. 최소한의 규모를 굳이 유지하는 이유가 있나? 스케일이 불가피하게 커지는 상업 사진 촬영은 예외로 삼지만 그 외의 작업은 내가 전담한다. 워낙 혼자 뭔가를 하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현재 함께 일하는 조시아는 나의 첫 정식 어시스턴트다. 영화를 만들다 보니 기술적인 부분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는 이 일이 비즈니스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리처드 애버던이나 애니 레보비츠를 존중하지만 그들처럼 되는 건 사양한다. (작업실을 둘러보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는 이 정도다. 거리와 맞닿아 있는 작은 집이 나의 세계다. 사람들을 떼로 몰고 다니는 상업 사진가가 되는 건 내 야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듀안 마이클스의 야심은 뭘까? 이미 다 이뤘다. 피츠버그의 철강 노동자들을 보며 자란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면 뉴욕에 가서 근사한 친구들을 사귀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시의 꿈은 결국 현실이 됐다. 나는 평생에 걸쳐 모험을 해왔고 그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모든 것이 다, 심지어 이 인터뷰조차도 하나의 모험이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항상 작고 사적인 스케일로 사유한다.
여러 장의 이미지와 그에 곁들인 글을 스토리보드처럼 나열하는 특유의 연속 사진 작업(Photo Sequence) 역시 상당히 영화적이다. 왜 영화를 만드는지보다는 왜 지금껏 영화를 만들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더 궁금하다. 말했다시피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한다. 연속 사진은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작업이다. 영화는 달랐다.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덕션이 필수였다. 그래서 내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기술의 발전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든 적은 인원으로 신속하게 영상을 완성한다. 이 나이가 되어서 나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무척 짜릿하다. 내 영화는 사진을 통해 구축한 작품 세계를 새로운 매체로 번역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창작욕을 확장시키는 과정이라고 할까?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건 1950~60년대였다.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던 시기다. ‘순간’보다 ‘이야기’에 주목한 당신의 시퀀스 작업이 맹렬한 비판을 받았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초기의 부정적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게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승낙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연속 사진은,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부터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멘토라고 여기는 사람도, 정식 사진 교육 경험도 없다. 아니, 교육을 피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일단 룰을 배우면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무척 어려워지는 법이다. 첫 개인전은 1963년에 뉴욕의 한 언더그라운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게리 위노그랜드는 이건 사진이 아니라고 하더니 곧장 나가버렸다. 르포르타주를 추구하던 당대의 사진가들과 나는 호기심의 방향이 아예 달랐다.
현실의 생생한 기록 대신,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이 목표로 삼는 바는 무엇인가? 많은 사진가들은 피사체의 생김, 장소의 형태, 움직임의 양상 등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나는 현실의 이면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다. 벗어놓은 장갑처럼 말이다. 내게는 사실보다 꿈, 죽음 뒤의 세계, 감정의 실체 등이 더 흥미롭다. 볼 수 없는 것은 찍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찍기 위해 노력해야 할 주제라고 믿는다. 물론 내가 그 목표를 흡족하게 성취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내 사진은 모조리 실패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욕심은 없나? 어쩌면 포토샵은 표현의 범위를 더 넓혀줄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전혀 없다. 새로운 기술을 우러러보기는 하지만 그걸 잘 다룰 두뇌는 갖고 있지 않다. 사진도 여전히 필름으로만 찍는다. 디지털 카메라로는 영화 촬영만 하는데, 그나마도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소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마저 억누르지는 않는다. 물리학과 생물학을 비롯해 인간의 경험을 설명해주는 다양한 학문에 흥미를 느낀다. 언젠가 문득 깨달았는데, 내 가족들이 전부 여든다섯에서 여든일곱 사이에 죽었더라. 지금 난 여든셋이다. 죽기 전에 인터뷰를 마치려면 좀 더 말을 빨리 해야 할 것 같은데?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모든 답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내게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리고 아직 궁금한 게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정말 근사하게 느껴진다. 내 작업에 그러한 호기심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원래는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진로를 바꾸게 된 건 사진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기 때문일까? 스물여섯에 러시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물이 고르게 좋았다. 그때 스스로가 타고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는 집중적으로 촬영을 해본 적이 없다. 러시아어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이 한마디를 외운 뒤 온갖 사람을 만났다. 사진을 발견했을 때, 이게 내 것임을 완벽하게 직감했다.
사진을 통해 아티스트가 되려고 하는 사진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사진가의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갤러리들은 새로운 카테고리를 발명했다. 바로 ‘사진을 찍는 아티스트’다. 대표적인 예가 신디 셔먼이다. 만약 그가 그냥 ‘사진가’였다면 작품 가격은 5천 달러 정도일 거다. 하지만 셔먼의 사진은 수십만 달러에 팔린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뭘까? ‘아티스트’라는 단어다. 이쯤에서 한번 곱씹어보자. 로버트 프랭크는 그보다 못한 작가인가? 아티스트가 아니라 사진가니까? 지금의 미술 시장이 사진가를 모욕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사실에 화가 나고, 다른 사람들 역시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죽음이라는 소재를 중요하게, 그리고 자주 다뤄온 편이다. 왜일까? 일종의 집착이다.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사진에 담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덤, 비석, 상복 차림의 여인, 관속의 고인 등을 찍곤 한다. 하지만 그건 죽음의 거죽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을 줄 수는 없는 사진들이다. 내게 중요한 궁금증은 이런 거다. ‘죽음의 순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종교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가톨릭 교도로 자라났지만 불교에 관심이 많고, 기(氣)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크다. 한국에도 ‘기’와 비슷한 개념이 있나?
물론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엇비슷한 철학과 개념을 공유하니까.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Elan Vital, 생명의 비약)’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 살아 있는 듀안은 이렇다(인터뷰이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건 죽은 듀안이다(혀를 빼물고 축 늘어진다). 차이는? 에너지, 즉 기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곧 에너지다. 몇 년 전부터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을 하나 배우고 있다. 현재 프레드는 알츠하이머 병과 파킨슨 병을 앓는 중이다. 나의 프레드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죽음은 추상적인 사건이지만 사진가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말하는 사람이다. 신디 셔먼이 자화상에 집착하는 것처럼 나는 죽음에 집착한다. 심지어는 ‘죽은 척하는 자화상(Self Portrait As If I Were Dead)’이라는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 알지 못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더욱 매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젊은 시절과 지금을 비교할 때, 죽음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에 바뀐 부분이 있나? 결정적인 변화는 없다. 다만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지금에 와서는 마침내 죽음을 잠재적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한때는 가진게 미래뿐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과거가 99%라면 미래는 1% 정도가 남았을까? 지금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이다. ‘죽으면 죽는 거지. 그걸로 끝이야.’ 이러다가도 ‘아니야, 육신이 사라져도 에너지는 계속될 테니까’라고 태도를 바꾼다. 개인의 역사와 오랜 사랑과 품어온 신념까지, 모든 걸 떠나보내고 나면 우리는 신비에 가까워진다. 살아 있는 동안 명백한 사실이었던 존재가 죽은 뒤에 미스터리가 되는 거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다.
-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LEE JAE SUNG